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4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어떤 사람을 쓸 것인가?
종국에는 사람이 문제란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눈다. 어려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것을 극복해 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주어졌을 때도 그것을 완수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쉬운 과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이 있다. 특정 과업이 주어졌을 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완수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까이 둘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이런 ‘과업 종결자’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주위 사람에게 전염되는 경향이 있다. 과업에 대한 자심감과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성취감은 바이러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긍정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사람을 늘 가까이 둬야 한다. 그들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다. 근주자적(近朱者赤)에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하지 않았던가!1
반면에 부정적인 생각,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짓눌려 있는 사람의 패배감도 동일한 전염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부정적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섣불리 조언하려다가 자신도 무력감에 빠져든 경험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부정적 생각과 패배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전문적인 식견이 없다면 패배감과 우울증을 겪는 사람은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렇게 우리는 능력 충만한 사람과 늘 가까이하고 패배감에 시달리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교육받아 왔다. 넘쳐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검증된 사람도 많은데 왜 검증되지 않은 불확실한 사람을 쓸 것인가? 그래서 ‘의심스러운 사람을 쓰지 마라(疑人勿用)’는 용인술은 ‘쓰고 있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用人勿疑)’는 용인술보다 늘 앞서 왔다. 인재를 널리 구해야 할 기업체는 검증되고 보편타당한 스펙을 구비한 긍정적 에너지의 인재를 선호한다. 감성과 지성을 테스트하고 조직 내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검사를 동원해 의심할 바 없는 인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보편타당한 스펙을 구비한 인재가 꼭 뛰어난 인재일까? 탁월한 용인술(用人術)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디치 가문도 최고의 스펙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을까? 콩 심은 데 콩 나니 좋은 콩 밭만 찾아다니면서 처음부터 튼실한 콩만을 입도선매(立稻先賣) 했을까?
그렇지 않다. 메디치 가문의 용인술은 오히려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들은 아직 스펙은 갖춰져 있지 않지만 세상을 바꿀 만한 잠재력을 가진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에게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아직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은 젊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주목하면서 그들의 여물지 않은 미래에 희망을 걸었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스펙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인재들에게 어떤 영감을 불러일으킬지를 먼저 고민했다.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로마 유학파 건축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를 물리치고 무명의 신예 미켈로초(Michelozzo, 1396-1472)를 가문의 건축 책임자로 등용한 코시모 데 메디치는 영감의 리더십(Inspiring Leadership)에 몰두한 사람이다. 10대 무명의 길거리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를 가문의 양자로까지 입양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파격적인 용인술은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코시모의 후원을 받은 미켈로초가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 골격을 완성하게 되고, 로렌초의 후원을 받았던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조각의 최고 정점(Paragon)에 도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잠재력을 가진 인재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던(Inspiring) 메디치 가문의 리더십 때문에 가능했다.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인재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 이상의 업적을 달성했다. 그들의 잠재력조차 능가하게 만들었던 영감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최초의 여성 화가를 발굴한 코시모 2세
무명의 인재를 발굴해 그들의 마음속에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메디치 가문을 따를 자가 없다. 잠재적 가능성이 엿보이면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그 인재의 출신 성분도, 과거도 개의치 않았다. 능력 외에 모든 것은 너그럽게 양해했다. 메디치 가문의 등용문은 출신성분이 낮은 사람에게도, 어두운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도 언제나 개방돼 있었다. 메디치 사람들이 본 것은 미래였지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문화 엘리트로서 많은 역사적 공헌을 남겼다. 특히 최초의 오페라를 탄생시킨 가문도 메디치라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오페라의 전신으로 불리는 인테르메디오(Intermedio)가 최초로 상연된 것은 대공 코시모 1세와 톨레도의 엘레오노라의 결혼식(1539년) 때로 프란체스코 코르테치아(Francesco Corteccia, 1502-71)가 작곡한 일 코모도(Il Commodo)다.2 메디치 가문의 결혼식 축하연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오페라 형식은 1565년, 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와 오스트리아의 조바나(Giovana of Austria)와의 결혼식(La Cofanaria, 프란체스코 담브라 작곡)과 1589년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와 로레인 가문의 크리스틴과의 결혼식을 통해 점차 발전됐다. 오페라(Opera)란 장르의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연주자 겸 악장(樂匠)이었던 야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다. 그가 1597년경 작곡한 다프네(Dafne)가 최초의 오페라로 알려져 있다. 악보가 현존하는 최초의 오페라는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 데 메디치와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의 결혼식을 기념해 만든 에우리디체(Euridice)다. 역시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했던 아코포 페리의 작품이다.
최초의 오페라가 메디치 가문의 저택에서 탄생한 것처럼 최초의 여성 화가도 메디치 가문을 통해 배출됐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 여성은 예술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소비하거나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오브제로 등장해왔다. 귀족이나 왕족 부인들이 예술 작품을 구매하거나, 신화의 주인공인 여성이 누드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형식이 바로 여성과 예술이 관계를 맺어오던 방식이었던 것이다.
17세기 초반, 최초의 여성 화가가 탄생했다. 이름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 1593-1652). 모든 서양미술사에 그 아름다운 이름이 올라있는 아르테미시아는 원래 로마 출생이었지만 메디치 가문이 이끌던 피렌체에서 화가로서의 첫 명성을 쌓게 된다. 아르테미시아는 단 한 번도 여성화가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피렌체의 미술가 길드 겸 대학(Accademia di Arte del Disegno)에 최초로 가입해 활동한 여성 화가다.3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역시 메디치 가문의 산물이다. 어두운 과거와 추문에 시달리던 예술가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메디치 가문 때문에 한 여성은 예술과 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어떻게 아르테미시아에게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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