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농구계의 KCC는 대표적인 ‘슬로 스타터(Slow Starter)’로 유명하다. 말 그대로 시즌 초반 성적은 좋지 않지만 경기를 거듭할수록 전력이 강해지는 팀이다. KCC는 최근 3시즌 연속 초반에는 부진했으나 결국 모두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는 저력을 보였다. 2008∼2009 시즌 초반에는 꼴찌로 떨어졌지만 끝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09∼2010 시즌, 2010∼2011 시즌에도 초반에는 8∼9위권으로 처졌다가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슬로 스타터가 팀 컬러로 굳어진 듯한 양상이다.
아무리 끝이 좋다 해도 감독은 초반 부진이 달가울 리 없다. 게다가 KCC는 하승진, 전태풍, 강병현 등 스타 선수와 다른 팀의 주전에 버금가는 호화 후보 선수를 갖춘 팀이다. 우수한 전력을 보유했기에 좋은 성적을 내도 “당연한 거 아니냐”는 평가가 나올 여지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초반 성적이 좋지 않으면 지도자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허재 KCC 감독은 당장의 성적이나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팀을 운영했다. 2010∼2011 시즌 초 팀의 핵심 선수인 센터 하승진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차출됐고, 전태풍은 부상을 당했다. 강병현, 임재현, 유병재, 추승균 등도 원인모를 부진에 빠졌다. 성적은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허 감독은 하승진이 돌아왔을 때 그를 무리하게 기용하지 않았다. 원래도 ‘유리 몸’으로 유명한 하승진은 풀타임 출전이 어려운 선수다. 어지간한 감독이라면 당장의 1승을 위해 그의 기용 시간을 평소보다 늘렸을 법 한데 허 감독은 하승진의 몸 상태를 배려해 충분히 그를 기다려줬다. 출전이 가능해졌을 때도 출전 시간을 적절하게 조절했다. 전태풍과 강병현 등에게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선수들은 감독의 인내에 보답했고, 순위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허 감독은 슬로 리더십(Slow Leadership)의 요체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슬로 리더십은 미국 우드버리대의 안드레 반 니어커크(Andre van Niekerk) 교수가 주창한 개념이다. 조직 구성원들이 단기 성과, 유행, 주변 여건 등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개인과 조직 전체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실행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해주는 리더십을 말한다. 리더가 일부러 행동이나 의사결정의 속도를 늦춘다는 뜻이 아니다. 조직이 속도를 내야 할 때와 쉬어갈 때가 언제인지를 잘 구분하고, 이 완급 조절을 통해 조직의 성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의미다.
당장의 1승을 위해 아픈 선수를 기용하면 단기적으로는 성적이 좋아질지 몰라도 해당 선수의 부상은 더 악화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정작 필요할 때 그 선수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아픈 자신을 무리하게 기용하는 감독을 진심으로 따르고 충성할 선수도 많지 않다. 진정한 리더라면 당장은 좀 느리고 뒤처지는 듯 보이더라도 장기적으로 팀 전체를 위하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과감하게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21세기 초경쟁 환경에서 속도는 모든 조직의 주요 경쟁 요소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속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속도가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남보다 앞서가는 건 아니다. 조슬린 데이비스와 톰 애킨슨(Jocelyn R. Davis and Tom Atkinson)은 2010년 5월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기고문을 통해 적절한 감속 후 속도를 낼 줄 아는 기업이 무조건 속도만 추구하는 기업보다 3년 평균 매출 및 영업이익 증가율이 각각 40%, 52% 더 높았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그 이유로 전략적 속도(strategic speed)를 들었다. 속도만 추구하는 기업은 제품의 생산 주기를 단축할 수는 있으나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하는 시간까지 단축시키진 못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속도와 효율성만으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슬로 푸드, 슬로 시티, 슬로 트래블 등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운동이 확산되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속 운전이 교통사고로 이어지듯 조직의 과속 경영 또한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술 먹다 죽은 사람은 봤어도 일 하다 죽은 사람은 못 봤다”는 식의 말을 하는 리더보다는 느림의 미학을 이해하는 리더가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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