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분서(焚書) 혹은 개처럼 살지 않는 방법

70호 (2010년 12월 Issue 1)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방금 읽은 구절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 시인의 「성()」이란 시의 도입부다. 아내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시를 지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문학의 정신과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직감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솔직함과 정직함이다. 자신의 상처나 약점을 솔직하게 토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칠 수가 없다. 상처를 냉정하게 진단하지 않는다면, 치료의 전망도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김수영은 위대한 시인이다. 화려하게 자신의 감정을 치장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에 위대해질 수 있었다. 이런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주의를 노래할 수 있었다. 결국 시인의 불행은 그가 독재 권력으로부터 탄압받을지라도 정치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어느 측면에서 인문학적 정신은 안데르센(Hans Andersen, 1805-1875)의 유명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Kejserens nye Klæder)>을 생각나게 한다. 임금님이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도 어른들은 벌거벗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 사기꾼 재봉사가 어리석은 사람이나 불성실한 사람만이 임금님의 옷을 보지 못하고 벌거벗은 몸만을 볼 것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 한 아이만이 자신이 보았던 그대로 외쳤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네.” 이 작은 외침으로 모든 어른들도 마침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쑥덕댈 수 있었다.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곁에 두고 싶은 인문학자다. 진정한 인문학자라면 일체의 허영과 가식 없이 인간과 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아이와 같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탁오(卓吾)라는 호로 더 유명한 이지(李贄, 1527-1602)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솔직한 정신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릇 동심(童心)이란 진실한 마음이다. 만약 동심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마음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어린아이는 사람의 처음 모습이고, 동심은 사람의 처음 모습이다. 처음 마음이 어찌 없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렇지만 동심은 왜 갑자기 없어지는 것일까? 처음에는 견문(見聞)이 귀와 눈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자라나서는 도리(道理)가 견문으로부터 들어와 우리 내면의 주인이 되면서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기를 지속하다보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이 나날이 넓어진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좋은 줄 알고 명성을 드날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또 좋지 않은 평판이 추한 줄 알고 그것을 가리려고 힘쓰게 되니 동심이 없어지게 된다. - <분서 「동심설(童心說)」>
 
방금 읽은 것이 이지의 「동심설(童心說)」이다. 분명 이지는 유학자였지만 단순한 유학자이기를 거부했던 사상가였다. 유학자란 공자(孔子, BC551-BC479)의 가르침을 따라야만 한다. 그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일까? 아마 ‘극기복례(克己復禮)’일 것이다. “자신을 극복해서 예절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결국 예절을 존중하고 배워야 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유학자들은 자신의 자제들이 예절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엄격하게 가르쳤다. 이지는 이것이야말로 동심(童心), 즉 아이와 같은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을 소멸시키는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경험적 지식, 즉 견문(見聞)이 쌓여도 솔직한 동심은 왜곡되기 쉽다. 윤리적 지식, 즉 도리(道理)가 쌓여도 맑은 동심은 탁하게 가려질 수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철석같이 믿게 된 어느 남자는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의범절을 강조하던 유학자들의 눈에 어떻게 이지가 이단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조선시대 내내 이지와 그의 글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저주받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조선시대만큼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경험 공부와 함양(涵養)이라는 도리 공부가 중시됐던 때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지는 동료나 후배 유학자들로부터 욕을 먹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에 분서(焚書)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워버릴 책’이나 ‘태워지게 될 책’이라는 의미다. 이단으로 치부되는 것을 감내하면서까지 이지가 동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글이 우리의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을 읽었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공자를 존경했으나 왜 공자를 존경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를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의 나는 정말로 한 마리의 개에 불과하였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 <속분서(續焚書) 「성교소인(聖敎小引)」>
 
50살 이전에 한 마리의 개처럼 살았다는 이지의 투철한 자기반성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50살 정도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았던 삶이나 그로부터 얻은 학식이나 평판 등을 정당화하는 데 나머지 생을 할애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지는 비범했다. 물론 이것은 그가 50살까지도 인문학적으로 투명한 정신, 즉 동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한 마리의 개처럼 살았다고 솔직하게 토로하는 순간 그는 드디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지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이제 다른 사람이 임금님이 벌거벗지 않았다고 해도, 그만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은 다른 개가 짖더라도 그는 이유가 없다면 짖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솔직함과 당당함이 바로 동심이 가진 힘이다.
 
이지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는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를 떠올리게 된다. 니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첫 대목, 즉 정신의 자기변형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기억할 것이다. 니체는 우리 정신은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낙타’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아무런 반성 없이 일체의 사회적 관습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정신이다. 마치 낙타가 주인이 등에 짐을 올리면 아무런 저항 없이 실어 나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사자’로 비유되는 정신이다. 낙타와 달리 사자의 등에는 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어떤 짐도 올릴 수가 없다. 짐을 올리려면 우리는 사자를 죽여야 할 것이다. 사자의 정신은 일체의 억압을 부정하는 자유정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의 마지막 단계, 즉 인간이라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정신은 ‘아이’로 비유된다. 니체의 아이는 솔직함과 당당함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상징적인 존재다.
 
동양의 이지나 서양의 니체가 모두 동심, 즉 아이의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한다.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아이나 시인 김수영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인문정신의 보편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된 셈이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솔직함!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해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 자유인의 당당함! 분명 이지보다 니체보다 김수영보다 지금 우리는 아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만큼 솔직하고 당당한가! 어쩌면 우리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언제까지 우리는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것인가? 50살에 드디어 자신으로서 살 수 있게 된 이지는 지금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강신주 철학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contingent@naver.com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기획사 문사철의 기획위원,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철학 VS 철학>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 <상처받지 않을 권리>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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