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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인간의 허위의식

강신주 | 40호 (2009년 9월 Issue 1)
선물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생일, 기념일, 입학식, 졸업식, 취업, 승진 축하 등으로 너무나 많이 선물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선물을 제대로 주고받았을까? 여기서 ‘선물’과 ‘뇌물’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알다시피 어떤 대가도 없이 주고받는 것이 선물이라면, 대가를 전제하고 주고받는 것은 뇌물이다. 이 정의처럼 뇌물과 선물이 분명히 나눠질까? 다음 사례를 보자.
 
A는 친구가 승진하자 축하의 뜻으로 고급 정장을 살 수 있는 시가 100만 원 상당의 상품권을 선물했다. A는 선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하기만 했다. 얼마 뒤 그에게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친구와 마찬가지로 승진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친구는 전화로 축하의 뜻을 전하며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서 그는 조그만 봉투를 건네며 A에게 식사를 사줬다. 친구와 헤어진 뒤 봉투를 열어본 A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봉투 안에는 5만원 상당의 도서상품권 한 장만이 달랑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A는 불쾌감이 들었고, 얼마 전 승진 선물로 건네준 상품권이 뇌리를 스쳤다. 그 순간 A는 자신이 과거에 친구에게 줬던 선물이 사실은 자신도 깨닫지 못한 일종의 뇌물이었음을 알았다. 지금 그는 대가를 바랐던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A만 이러한 경우를 겪는 건 아니다. 선물을 받고 나면 항상 답례로 그 선물의 액면가에 대응하는 선물을 고르는 게 일상적 관례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선물은 명목상으로만 선물일 뿐, 그 이면에는 뇌물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선물의 조건은 ‘망각’
 
선물이나 뇌물과 관련해 프랑스 현대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선물에 대한 우리의 허위의식을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조금 복잡하지만 선물에 대한 그의 논의를 직접 음미해보자.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 <주어진 시간> 중에서
 
인문학적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면, 데리다의 논의는 조금 어렵게 들릴 수도 있다. 특히 선물을 주기는 주지만, 선물을 줬다는 사실을 망각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분명 다음과 같은 반문이 나올 수도 있다. “선물을 준 다음에 내가 선물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면 선물을 주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매우 날카로운 질문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질문이 타당할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데리다가 선물 자체를 부정하고 있진 않다는 점이다. 그가 강조하는 논점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선물을 줘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 선물이 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줬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해야만 한다. 사실 선물을 주고 나서 그 사실을 깡그리 잊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데리다는 그런 식으로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지는 않다. 선물을 줬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우리의 의지만이 선물을 진정한 선물로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가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의지, 다시 말해 선물을 선물로서 주겠다는 의지는 사실 타자와의 사랑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겠다는 의지와 동일하다. 지금은 아련하게 떠오르는 신혼 시절을 생각하며 다음 사례를 살펴보자.
 
아침에 아내가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식사를 남편은 하나의 ‘선물’로 받게 된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을 위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식사를 차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신혼부부의 설레는 행복의 비밀이 있다. 반대로 월급날이 되면 아내는 남편이 가져다준 월급봉투를 ‘선물’로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차려준 식사의 대가로 남편이 월급을 건넨 게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댁이 남편의 월급봉투를 받고서 행복해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부부가 여전히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대부분의 부부들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월급날이 가까워지면 대개 아내의 식단이 좀더 나아지고, 동시에 남편의 반찬 투정도 심해지기 때문이다. 아내는 월급을 받고서 남편의 수고를 떠올리기보다는 오히려 그 돈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남편으로서 당연히 돈을 벌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다 아내가 밤늦게 들어와 저녁식사를 차려주지 않으면, 남편은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 집에서 밥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식사를 차리는 게 아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선물의 관계가 뇌물의 관계로 변질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사랑했던 두 남녀는 이미 하나의 교환 관계,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징적인 것 일반’에 매몰돼버리고 말았다.
 
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을 망각해야
 
신혼부부의 설레는 사랑, 선물을 주고받았던 살가운 관계가 이제 남녀 간의 상징이 부여하는 분업 체계로 흡수돼 증발돼버렸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은 밥을 먹었으니 돈을 벌어와야만 한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서 수행하는 자신의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반대로 아내는 이제 돈을 받았으니 제때 식사를 차려야 한다. 이제 그녀는 아내로서 수행하는 가사 노동이 가정 경제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신혼부부의 사랑을 유지시켰던 선물의 논리가 이제는 마치 음식과 돈이 교환되는 식당에서처럼 뇌물의 논리로 변질돼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도, 선물도 기대할 수 없다. 이제 채권과 채무의 관계, 즉 뇌물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데리다는 이성 중심주의(logocentrism)를 치열하게 비판했던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철학자로 기억되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기존 사유의 해체보다는 우리 삶에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할아버지로 성장했다. 특히 그의 조언은 ‘선물이 가진 역설’과 관련해 빛을 발한다. 선물이 역설적인 이유는 그것이 교환 아닌 교환, 즉 ‘불가능한 교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데리다가 유언처럼 남긴 충고가 지금까지 모든 현명한 사람들이 남긴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체의 대가 없이 네가 가진 것을 주어야 한다.” “수확의 기대 없이 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데리다에게도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망각해선 안 되는 것을 망각하고, 망각해야만 하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있음을 새롭게 가르쳐줬기 때문이다. 이제는 뇌물이 아닌 선물을 주는 지혜를 고민해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에게 설레는 사랑과 진정한 행복의 가능성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해 드립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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