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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옳고, 나도 옳고…’ 포용의 힘

김용성 | 38호 (2009년 8월 Issue 1)
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황희 정승의 일화 중 하나다.
 
하녀 한 사람이 황희 정승에게 와서 자기 사정을 하소연했다. 황희 정승은 그 말을 듣고 “네 말이 옳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대 입장을 가진 다른 하녀도 찾아와 자기가 정말로 옳다고 주장했다. 황희 정승은 “네 말도 옳다”고 답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이 “두 사람이 서로 반대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다 옳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한 사람은 틀려야지요”라고 지적했다. 황 정승은 이에 “당신 말도 옳소!”라고 말했다 한다.
 
아마 서양인은 이 일화를 일관성 없는 노인의 ‘치매성 해프닝’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상호 모순된 세상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거인의 이야기’로 해석해왔다. 이번 글의 주제는 ‘모순’에 대한 동양인과 서양인의 태도 차이다. 서양인은 모순에 대해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지만, 동양인은 모순을 보다 쉽게 수용하며 그로 인해 종종 비범한 의사결정을 한다.
 
 

 
모순을 거부하는 서양인, 모순과 함께 사는 동양인
먼저 서양인들이 논리적 모순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한 이유부터 살펴보자. 서양인들은 역사적으로 상호 배타성에 근거한 형식논리를 통해 사고하는 훈련을 해왔다. 형식논리의 핵심은 언어를 이용해 옳고 그름을 가리다 보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A는 B이고, B는 C가 아니다’라면, 그간 알지 못했던 A와 C의 관계, 즉 ‘A는 C가 아니다’라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형식논리는 고대 그리스의 토론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으며,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펴고 논쟁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논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제3자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의견을 배척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거나 상대방 의견에 논리적 문제가 있음을 밝혀야 했다. 이를 위해 그리스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순이 없고, 형식논리상 흠잡을 데 없는 주장을 펴는 훈련을 받았다.
 
반면 동양인들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의 통합을 강조하는 문화를 형성해왔다. 개인 의견에 차이가 있더라도 당장 그 자리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포용하는 생활 방식을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을 미루고, 상황을 더 크게 보는 사고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프랑스에서 공산당원이 돼 돌아와 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을 세웠다. 그에게 어느 외국인 기자가 200년 전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 묻자 “아직은 말하기 이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포용과 시시비비에 대한 동양인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일화라 하겠다.
 
극단적 일관성은 하수, 상황에 맞는 유연한 태도는 고수
동양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음양설은 모순이 서로를 상쇄하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를 알려준다. 서로 반대인 음과 양은 역설적으로 상대가 있기에 존재한다. 게다가 음 속에서 양의 싹이 자라나고, 양 속에서 음의 싹이 자라나 서로를 대체한다.(그림1) 이처럼 음과 양은 고정되지 않고 변한다. 따라서 사람은 어느 한 극단을 취하기보다는 중용(中庸)을 지켜야 한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이야기는 인생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니, 어느 한쪽으로 마음이 쏠리지 않도록 중용을 지키라는 지혜를 가르친다.
 
[그림1] 음양설의 상징인 태극
 
양 속에는 음의 눈이, 음 속에는 양의 눈이 있다.
 
서양에서는 고대 설화부터 현대 소설까지 많은 이야기들이 선량한 주인공이 악한 존재(용, 적군, 악령 등)를 멸하는 기본 스토리를 갖고 있다. 반면 선악의 구분이 비교적 명확한 동양의 고전 <삼국지>에서도 주인공은 늘 선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종종 주인공은 실리를 위해 악인과 손잡기도 하고, 악인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변화는 변절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대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 또는 더욱 큰 인물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 취급받기도 한다. 상황에 상관없이 사람이 늘 비슷한 선택을 할 경우 서양에서는 일관성이 있다고 말하겠지만, 동양에서는 깊이가 없고 단순하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동양인은 때론 병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상반된 특성을 보인다.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는 이런 동양인의 이중적 모습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미국 정부를 위해 일본인의 특성을 분석했다. 당시 미국 정부는 이제까지 상대했던 적(敵) 중 가장 기이한 존재였던 일본인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미국인은 병력의 30%를 잃어버리면 투항하는 서양 전투의 관례에 익숙해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은 전멸하거나 의식을 잃어 항전하지 못할 때까지 싸우는 일본군을 보며 몸서리를 쳤다. 일본군의 저항을 보면서 미군이 일본 땅에 상륙해도 전투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생포된 일본군은 부대의 위치와 보급 노선 등의 정보를 너무도 쉽게 미군에게 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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