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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 바’가 있어야 한다

박현모 | 29호 (2009년 3월 Issue 2)
최근 정조의 편지가 300여 통이나 공개돼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그 편지들이 그동안 왕의 개혁 정책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노론 벽파의 영수(領袖) 심환지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고 있다.
 
그러나 정조의 편지는 심환지보다 개혁 지지세력인 시파의 영수 채제공에게 더 많이 갔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실제로 수원화성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채제공에게 보낸 정조의 편지를 보면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명예회복 등을 위해 군신간에 긴밀한 대화가 오갔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왜 채제공을 그토록 신뢰했을까. 1795년(정조 20년) 정월에 채제공이 우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며 사직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다음과 같이 비답(批答)했다.
 
“내가 경에게서 취하고 싶은 것은 기상이다. 좌절되지도 않고 녹아 없어지지도 않아 뜻을 펴지 못했을 때에도 여전하였고, 드날리게 되었을 때에도 똑같기만 하였다. 일찍이 조정에 있을 때나 향리에 있을 때나 그 기개가 바뀐 적이 있었던가. 참소하는 자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은 나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었고, 험난한 길이 곧 평탄하게 된 것도 나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장수가 모두 용감한 나라도 없고, 군사가 모두 용감한 군대도 없다. 따라서 별안간 갑작스럽게 비상을 걸어 징과 북을 울리고 갑옷과 병장기를 번뜩이며 함성을 지르면서 성지(城池)를 공격하게 하는 일은 꼭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기상을 일깨워 사람들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경은 즉시 마음을 바꿔먹고 이 시대를 생각하며 나를 돕도록 하라.”
 
[予於卿 所取者氣也 不挫不鑠, 屈旣如之 颺亦然矣. 何曾巖廊江湖 換其槪乎. 譖夫莫, 非予之明也塗卽夷, 非予之力也. …國無皆勇之將 而軍無皆勇之士. 雖不必鳴金耀戈甲譟呼嘷呶爭城爭池於卒然勃然之間 其振發而作興 人人知有所不爲. …卽幡然思日協贊.] (정조실록 19/01/28 신해)
 
여기서 정조는 채제공의 장점을 “불좌불삭(不挫不鑠) 굴기여지(屈旣如之) 양역연의(颺亦然矣)”라는 말로 요약했다. 일관되고 변함없는 기상의 소유자인 채제공이 전면에 있어 줘야 개혁 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조정에는 참소하는 자도 있고, 비겁한 사람도 있다. 따라서 “사기를 진작시키고 기상을 일깨워 모두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줄 사람이 필요하다. 정조는 그 사람이 바로 채제공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다만 그동안 일관되게 해왔던 것처럼 너무 조급하게 서둘지도, 너무 느긋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정조의 당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지 않는 바가 있어야 한다(有所不爲)’는 구절이다. 정조는 “무슨 일이든 서둘러서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겠으며, 무슨 폐단이고 탐욕 속에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평생에 하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홍재전서 제172권, 일득록)
 
이 말은 맹자의 “사람은 하지 않는 것이 있은 뒤에야 큰일을 할 수 있다(人有不爲也而後 可以有爲)”에서 유래했다. 여기에는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을 다 하려는 사람은 정작 중요한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중요한 통찰이 담겨 있다. 일을 시작할 때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힘이 빠져 꼭 해야 하는 일을 놓치는 경우가 바로 이와 같다.
 
리더십은 인터넷 게임처럼 ‘총알’이 적중하면 ‘에너지’가 올라가지만 성공하지 못하면 금방 ‘게임 오버’ 상황에 직면한다. “사대부는 하지 않는 바가 있은 연후에야 비로소 국사(國事)를 처리할 수 있다(士大夫有有所不爲然後方可以做國事)”는 정조의 말은 현대의 리더들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조(正祖)’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실록학교’ 등에서 세종·영조·정조의 리더십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종처럼: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 <정치가 정조> 등이 있으며, ‘경국대전의 정치학’ ‘다산의 군주론’ 등 50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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