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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위기극복 리더십

위기 징후 파악하고 백성과 소통하라

박현모 | 26호 (2009년 2월 Issue 1)

우리 역사에서 최대 위기는 언제였나”라는 질문에 대답은 크게 2종류였다. 하나는 주로 역사학자들의 대답으로, 일제치하와 같은 이민족의 지배 시기 또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戰亂)을 꼽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말하는 위기의 관점과 개념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주로 사회과학자들의 반응이다. 위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개념 정의와 함께 어려움을 느끼는 주체에 대한 구분, 즉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지배층인지 일반백성인지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서삼경’에는 나오지 않는 ‘위기’라는 말
위기(危機)’는 대체 무엇이고, ‘국난’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옛 문헌들에서 살펴보았다. ‘위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한 고비’ 또는 ‘위험한 경우다.1 그런데 ‘위기’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나오지 않는다. ‘위기’라는 말이 한 단어로 사용된 것은 중국의 당나라 때부터다.2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51년)에서 위기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이규보는 ‘꿈을 기록함’이라는 시에서 “내가 위기를 (잘못) 밟아서[踏危機] 이제 만 리 밖으로 유배되었네”라고 쓰고 있다. 이 밖에 ‘세종실록’ ‘단종실록’에서도 위기라는 말을 살펴볼 수 있다.3
 
이처럼 ‘위기’라는 말은 비록 ‘사서삼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다. 이러한 용례를 참작하고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에 나오는 ‘위’와 ‘기’의 뜻4 을 토대로 위기를 정의하면 ‘잘 보이지 않지만 작게 일어나는 일의 위태로운 조짐 또는 기회’다. 이것은 병(病)의 증상이 이미 겉으로 드러난 ‘위험’이나 ‘국난’과 달리 병의 싹이 막 자라나려는 초창기에 해당한다. 이규보가 “위기를 밟는다”고 표현했듯이 이것은 대응하기에 따라 오히려 건강이 좋아질 수 있는 ‘위험한 신호’다.
 
우리 역사 최대의 위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가장 많은 사람이 ‘최대 국난’이라고 꼽은 일제치하 시대(1910∼1945년)는 지배층이나 백성 모두에게 어려웠던 듯하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일제 통치 아래의 “가혹한 세금과 난폭한 수렴”으로 “한민족의 처참함이 고금(古今) 어느 나라보다 더 심하다”면서5 “비록 나라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민족의 정신만은 잘 보존하여 나라의 부활을 도모하자”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형(국가)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과 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6
 
그런데 생각해 보면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이전에 ‘위험한 신호’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문을 연 국왕 순조는 34년 동안(1800∼1834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한마디라도 논란하고 연구하여 그 결과를 따져 본 적이 없는’ 임금이었다. 그는 또한 “사람을 임용할 때도 최소한의 자격만 살필 뿐 그 업적과 언어를 상고하여 어진 인재인지를 살피지” 않았다.(순조실록 10/11/21, 홍문관 부제학 김이교의 말) 바로 이런 임금들이 왕위에 있었고, 자기편은 무조건 감싸고 정적은 무조건 ‘박격(搏擊)하는’(순조실록 01/05/25) 신료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세도정치기는 한국사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위정자들은 홍경래의 난(1811∼1812년)과 같은 대규모 민란과 “거의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양선(異樣船)이” 다가와 개항을 요청했음에도(순조실록 14/12/29) 끝내 변화를 거부했으며, 급기야 외세에 의해 멸망당했다.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초에 ‘경세유표’를 쓰면서 “지금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면서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때 그가 제안한 개혁안이 채택되고 실천되었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몽골제국이 예외적으로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한 이유
일제치하 시대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국가적 시련기라고 꼽는 것은 몽골의 침략 시기(1231∼1273년)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는 이민족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이 분출된 시기기도 하다.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몽골군은 1231년 8월 압록강을 넘자마자 처절한 저항에 부닥쳤다. 예컨대 압록강 근처 철주성의 판관 이희적은 식량이 떨어져 성이 함락되려 하자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데리고 스스로 목을 끊어 자살”했다.(고려사 121권) 이어지는 귀주성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기록을 보면 귀주성의 군·관·민은 병마사 박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각종 공성무기로 파상적으로 밀려드는 몽골군을 끝내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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