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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 경영

광해군은 왜 실패했나

김준태 | 376호 (2023년 0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광해군은 대중들의 긍정적 인식과 다르게 그렇게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왕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강박으로 인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특히 동생 영창대군을 교동에 위리안치했다 살해하고 몇 년 후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대비에서 폐서인한 ‘폐모살제(廢母殺弟)’는 그가 벌인 대표적 악행이다. 또한 광해군은 인재를 널리 쓰지 않고 특정 붕당(대북파)에 힘을 몰아준 갈라치기 리더십을 통해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밖에도 그는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동체의 역량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로 이익을 얻으려 할 경우 그 리더십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은 임금이 돼 15년 넘게 나라를 다스렸으나 반정(反正)으로 폐위되고, 묘호(廟號)1 도 받지 못한 채 ‘군’으로 강등된 비운의 왕이다. 하지만 같은 처지인 연산군과는 다르게 우호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의 부담을 줄여줬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조선의 안전을 확보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광해군을 미화한 영화, 드라마의 영향으로 대중의 인식은 더욱더 우호적이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말 그런 평을 받을 만한 임금이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그가 저지른 수많은 실책은 17세기 초반의 조선을 혼돈으로 이끌었다.

흔들리는 전쟁 영웅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세자 시절 그가 보여준 활약에서 출발한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1592년(선조 25년) 4월 29일2 ,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분조(分朝)3 를 이끌면서 동분서주했다. 전쟁터를 누비며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은 광해군의 담대한 행보는 민심을 수습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대의 총지휘관 유정(劉綎)이 “세자 광해군 이혼(李琿)은 청년으로서 자질이 뛰어나게 영리해 온 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존경하며 복종하고 있으니, 국왕께서는 빨리 세자를 재촉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내려가 머물면서 명군(明軍) 본진과 협력해 모든 일을 경리(經理)하게 하소서. 이것이 작금의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4 라며 광해군의 삼남(三南) 지방 파견을 요구할 정도였다. 가히 ‘전쟁 영웅’이라 불릴 만했다.

그런데 세자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임금 선조의 질시도 커졌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던 선조는 여러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키며 광해군을 견제했다. 여기에 영창대군이라는 대체제까지 등장한다.5 물론 큰 공을 세우고 흠결이 없으며 백성과 신하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던 광해군이 교체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명나라로부터 세자의 지위를 공식 승인받지 못했던 터라6 광해군의 불안감은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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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즉위한 후 왕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강박관념을 표출한 것은 그래서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창대군을 옹립하고자 했던 영의정 유영경을 파직하고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시신을 부관참시하게 했다. 또한 왕권에 부담을 주고 있던 친형 임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 보냈고7 1612년(광해군 4년)에는 황해도 봉산에 사는 김제세라는 인물의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역모로 확대해 ‘봉산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파멸된 가문이 100여 집”이나 됐다고 한다.8 이어 서얼들의 형사 강도 사건을 조작해 인목왕후(소성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역모를 꾀했다는 ‘계축옥사’을 벌였는데 북인 대신들이 주도한 것이긴 하지만 광해군도 직접 심문에 나서며 사태를 키웠다. 이 사건으로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선조의 유명(遺命)을 받았던 원로대신들이 투옥, 유배됐고, 인목왕후의 친정은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했다. 영창대군은 교동에 위리안치됐다가 살해당했고, 몇 년 후 인목왕후도 대비에서 폐서인돼 서궁에 유폐됐다. 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다.

한데 광해군은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그의 지위는 예법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굳건했으며 유영경 등 소북파 일부를 제외하곤 서인과 남인, 북인 등 모든 당파가 광해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불안정한 상황이 광해군의 판단력을 흔들어 놓았고, 불필요한 숙청으로 자충수를 두게 한 것이다. 특히 ‘폐모’는 효를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을 정면에서 거스르는 것으로서 광해군의 정통성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는 일차로 광해군 본인의 책임이긴 하지만 선왕 선조의 잘못도 크다. 리더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는 ‘승계 계획(succession plan)’을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이다. 적합한 후계자를 찾아 훈련하고, 후계자가 안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자신에게 방해된다고 후계자를 견제하고 흔들어 놓으면 후계자의 권위가 상처를 입을 뿐 아니라 조직에도 악영향을 준다. 후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라리 교체하는 게 낫다. 그럴 수 없다면 반드시 후계 구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갈라치기 리더십

숙청과 옥사, 폐모살제 등 광해군이 연이어 무리수를 두면서 생겨난 또 다른 문제는 조정이 소수파 일색으로 채워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북인이 집권할 때만 해도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고 있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 기자헌, 이이첨, 유몽인, 박홍구, 박승종, 유희분 등 북인의 여섯 권신이 조정의 주요 포스트를 맡았지만 영의정 이원익은 남인, 좌의정 이항복은 서인, 우의정 심희수는 남인이었던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광해군 정권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대북파9 가 다른 붕당을 배척하고, 광해군이 이를 묵인 혹은 부추기면서 조정은 혼란에 빠졌다.

우선, 1610년(광해군 2년) 9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다섯 현인(賢人)을 문묘에 종사한 것에 대해 대북의 영수 정인홍이 거세게 반발했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였던 그는 자신의 스승이야말로 문묘에 배향될 자격이 충분하다며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깎아내리고 이들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다. 이언적과 이황은 당파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대학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인홍의 상소는 조야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해버리기까지 했는데 그를 유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저 조식의 문묘 배향만 주장했으면 별일 없었을 것을, 자신의 노선과 다르다고 극단적인 배타성을 드러냄으로써 갈등을 고조시킨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면 임금인 광해군이 나서서 사태를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줘야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인홍의 주장에 대해선 침묵한 채 정인홍을 공격하는 유생들만 처벌하려 들었다.

이 ‘회퇴변척소’는 대북파 정권을 외톨이로 만들었다. 서인과 남인 신하들은 상대 당을 존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당만이 옳다는 대북의 편협함, 그리고 이를 감싼 광해군에게 실망하게 된다. 그런데 대북파는 대화와 협력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기는커녕 앞서 소개한 각종 옥사를 주도하며 서인과 남인을 배척했다. 특히 이이첨, 허균 등 대북 강경파가 주도한 ‘폐모론’으로 이덕형이 낙향하고 이항복과 이원익이 유배됐을 뿐 아니라 폐모에 반대한 소북의 영수 남이공이 파직되고, 북인 온건파 기자헌도 문외출송(門外出送)10 되는 등 조정에는 대북 강경파밖에 남지 않게 됐다. 이처럼 갈라치기를 하느라 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10%도 남지 않았으니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책임은 왕권에 대한 노이로제 속에서 친위 세력인 대북 강경파의 탐욕과 전횡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 모든 과정을 승인하고 방치한 광해군에게 있었다.

과도한 토목공사

물론 광해군이 부정적인 면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기유약조를 체결해 대일 관계를 안정시켰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조선의 안위를 확보하고자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공공 의료와 예방 의학의 개념을 도입한 공중 보건 의서 『동의보감』을 편찬해 보급하게 한 것도 광해군이다.11

그런데 광해군은 이러한 업적을 뒤덮고도 남을 실책을 저질렀다.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을 부역으로 대규모 동원해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는 선조 때 시작한 창덕궁 중건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창덕궁을 다시 짓는 것은 임진왜란으로 궁궐들이 모두 불탄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1616년(광해군 8년) 창경궁의 주요 전각들을 중건한 것도, 본래 존재했던 궁궐이고 창덕궁과 ‘동궐’로 한 몸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광해군은 1617년 인왕산 아래 화려한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토록 했고, 비슷한 시기에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이복동생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경덕궁(慶德宮)12 을 짓게 했다. 인경궁은 경복궁을 능가하는 대규모 궁궐이었고, 모든 전각을 염초13 를 사용한 청기와로 덮는 등 호화롭게 지어졌다.14 경덕궁도 지금은 일부 전각만 남아 볼품없어 보이지만 경복궁의 3분의 2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현재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2011년~2030년)으로 전각 254동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총사업비가 약 540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다. 경복궁의 50%를 복원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과 재원이 소요되는 것이다. 한데 다 합쳐서 경복궁의 몇 배나 되는 궁궐을, 몇 년 만에 지었으니 국가의 자원이 모두 여기에 집중됐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내외적으로 불확실성이 가중됐던 엄중한 시기에 민생을 안정시키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써야 할 소중한 재원을 불필요한 일들로 낭비해버린 것이다.

요컨대 광해군이 실패한 것은 국가의 역량을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선조가 후계 구도에 불안감을 심어줬더라도 백성과 신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믿고 갈라치기가 아닌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폐모’라는 무리수를 두지 말고, 대북의 전횡을 통제하며 각 당파의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면 그가 폐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과도한 토목공사로 낭비된 국가 재정을 개혁과 민생에 투입했더라면 17세기 조선은 더욱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을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준 그의 탁월한 활약을 생각할 때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공동체의 역량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갈등과 분열로 이익을 얻으려 할 경우 그 리더십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오늘날 국가와 기업을 이끄는 리더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사례이기도 하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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