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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누구에게나 애착 이불 하나씩은 있다

안동섭 | 291호 (2020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스누피로 유명한 만화 ‘피너츠’에는 라이너스라는 남자아이가 나온다. 이 남자아이는 가는 곳마다 파란색 애착 이불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불 없이는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반면 이불과 함께라면 어떤 곳도 두려울 게 없다. 라이너스뿐만이 아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주인공은 마케테와 채찍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적을 물리치고,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꼽히는 알렉스 퍼거슨 경(Sir Alex Ferguson)은 시합 때 항상 껌을 씹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나 큰일을 앞두면 두렵고 떨린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면 떨리는 마음을 다잡을 각자의 애착 이불 하나 정도는 준비하는 게 어떨까.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북경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청중 앞에서 떠드는 일은 실로 이케아 5단 서랍장을 혼자서 조립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면 언내(言內)에서뿐만 아니라 언외(言外)에서도 대화를 주고받는데, 이때 기세가 약한 쪽은 언외의 대화에서 위축되기 쉽고, 언외에서 위축되고 나면 언내에서도 말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청중 앞에선 긴장하기 쉽고 긴장하면 말을 못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도 쉽지 않을진대 여러 사람에게 말하는 게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는 대체로 ‘쪽수’에 약하다. 우리 편 다섯 명을 이끌고 적진에 쳐들어갔는데 적군 열일곱 명이 기다리고 있으면 크게 위축된다. 똑같이 11명씩 나와서 공을 차지만 십만 관중이 모두 상대편을 응원하면 역시 크게 위축된다. 언외에서 이와 같이 큰 기세와 마주치면 우리는 소년만화 주인공들이 내뿜는 패왕색 패기에 짓눌린 한 떨기 무명소졸(無名小卒)처럼 찌그러들고 만다.

언외의 줄다리기를, 그것도 일대다의 싸움을 이기고자 한다면 대칭 전력으론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쪽수의 중과(衆寡)를 무시하는 비대칭 수단이 필요한데, 맹자(孟子)는 이러한 전술무기를 ‘부동심(不動心)’이라고 불렀다. 창끝이 지척에서 눈동자를 겨누고 들어와도 끔뻑하지 않는 마음1 으로 축구를 하면 10만 관중이 상대 팀을 응원하는 원정경기에서도 중동의 모래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라나라, 마음 마음 얍!” 한다고 부동심이 자라나진 않는다. 우리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두발(頭髮)을 애지중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가꾸어야만 부동심이 자라난다. 하지만 당장 내일 중요한 발표를 해야 하는 우리에겐 별을 노래할 만한 여유가 없다. 어쩌면 좋을까. 필자에게 속성 비결이 하나 있으니 이른바 ‘어린아이의 심정(赤子之心)’ 접근법이다. 2

먼저 주변 환경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처음 가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이 우는 것은 환경이 낯설어서다. 마찬가지로 원정경기를 치르는 축구팀이 상당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원정지에 도착하는 것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다(당일치기를 선호하는 유벤투스는 예외로 하자). 나는 늘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사전에 발표 장소에 들러서 기기를 쓰다듬어보고 그루브를 넣어 아기 상어를 불러본다. 무서운 발표실도 적당히 길들이면 동요 노래방이 된다. 한 번 동요 노래방이 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환경 길들이기가 여의치 않다면 무기를 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그게 무엇이 됐든) 길쭉한 것을 들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하다. 산책을 나간 아이들은 자주 적당한 나뭇가지를 찾아내서 들고 다니는데 의젓하게 쓱쓱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마체테(machete)와 채찍을 휘두르는 인디아나 존스 같다. 아무리 징그럽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오는 공포게임이라도 플레이어가 총칼을 들고 퇴치할 수 있다면 딱히 무섭지 않지만 주인공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도망만 다녀야 하는 게임에서는 쫓아오는 적이 몽둥이를 든 경비아저씨만 돼도 찔끔 지릴 만큼 무섭다. 3 공포게임을 이겨내려면 총칼을 든 주인공이 필요하고, 정글을 탐험하려면 마체테와 채찍을 든 인디아나 존스가 필요하듯 발표를 잘하려면 발표자에게 적당한 무기가 필요하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꼭 쥔다거나, 지휘봉을 든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볼펜 한 자루라도 손에 잡고 무대에 올라서 보자. 상사가 악의에 찬 질문을 던지거나 교수가 대놓고 오수(午睡)를 즐길 때 그래도 내 손에 무언가 대항할 수단이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할 것이다.



몽둥이를 들고 동요 노래방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다리는 ‘미실미실’, 가슴은 ‘선득선득’해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면 자기만의 애착이불을 가져가 보는 것도 좋겠다. 스누피로 유명한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라이너스는 늘 애착이불을 가지고 다닌다. 이불 없이는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반면 이불과 함께라면 어떤 곳도 두려울 게 없다.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Slavoj Žižek)는 강연을 할 때마다 쉬지 않고 자신의 코를 쓰다듬고 종교사학자 바런트 테 하(Barend ter Haar)는 강의를 할 때마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끝없이 어루만진다. 나는 강의를 앞둔 바런트의 애착 단추를 몰래 잘라버리는 장난을 꿈꾸곤 했는데 퇴학이라도 당할까 두려워 감히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슬로베니아에 지제크가 있다면 조선에는 혹부리 영감님이 있다. 나는 공연을 앞두고 무대공포증을 이겨내기 위해 혹을 만지작거리는 영감님의 거친 손놀림과 불안한 눈빛을 상상한다. 그 혹이 공교롭게도 손 대기 좋은 자리에 달려 있지 않았더라면 영감님은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도깨비 청중들에게 압도돼 찔끔 지려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염주나 묵주를 만지작거리는 게 기도와 명상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참고할 만하다. 물론 영감님의 혹을 가져간다고 가왕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바런트의 소매 단추를 떼어간다고 강의의 제왕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염주를 쥐고 돌린다고 중생이 바로 해탈할 리 없다. 그래도 조몰락거릴 물건이 없는 것보단 있는 쪽이 낫다. 발표장에 호두라도 하나 들고 가 보도록 하자. 반드시 효과를 볼 것이다.

아이들은 애착 이불을 만질뿐더러 쪽쪽 빨기도 한다. 아기공룡 둘리에 등장하는 희동이가 쪽쪽이를 물고 안정을 되찾듯 어른들도 불안한 순간에는 껌 같은 것을 씹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을 꼽으라면 반드시 한 손 안에 들어갈 알렉스 퍼거슨 경(Sir Alex Ferguson, CBE)은 그 위대한 업적만큼이나 쉬지 않고 껌을 씹어대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제크가 하루 종일 코를 만지는 횟수와 퍼거슨 경이 같은 시간 동안 껌을 씹는 횟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당장 호주머니에 껌도 없고 쪽쪽이도 없어 마땅히 물고 빨 것이 없거든 그럭저럭 손톱이라도 뜯어보자. 손톱의 작은 희생이 커리어상의 큰 전진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현역 시절 박지성의 큰 장점은 그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플레이어였다는 것이다. 애착 이불의 큰 장점은 만지고 빨고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커피는 부동심계의 월드클래스 멀티플레이어다. 잔을 만지작거리고, 빨대를 잘근잘근 씹고, 음료를 꼴깍꼴깍 마시면서 그 뒤에 숨을 수도 있는데다 심지어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 대화가 부담스럽기는 피차 마찬가지다. 꼭 망쳐야만 하는 소개팅이 있거들랑 음식점이나 찻집 대신 그냥 회의실을 하나 빌려서 텅 빈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서 대화해보자. 수 분을 넘기기도 전에 상대방은 공간을 가득 채운 부담스러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엄폐물을 찾다가 그만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 버리고 말 것이다. 반대로 대화를 잘 이끌어나가고 싶거든 반드시 차라도 한 잔 시켜놓자. 우리는 말을 섞는 도중 간간히 숨을 곳이 필요한데 찻잔 뒤에는 공간이 많다. 인류에게 술, 차, 그리고 커피가 없었더라면 베르사유조약, 포츠담회담, 국공합작 가운데 하나 정도는 어쩌면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결렬돼버렸을지도 모른다.

행운의 징표도 중요하다. 우리는 목걸이, 반지, 클로버, 십자가, 부적, 브로치 등을 목, 손, 백미러 혹은 가슴에 달고 다닌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한 번 쓱 만져보기도 하고, 꺼내서 둘러보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시시때때로 그 물건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음을 확인하고 용기를 얻곤 한다. 이러한 진정효과는(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겪었으므로) 진실이요, 결코 거짓이 아니다. 이처럼 작고 평범한 물품들이 우리의 마음에 실질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군가는 그것들 안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긴장이 풀리지 않아 걱정이라면 ‘특별한 힘’을 가진 네 잎 클로버와 십자가와 마네키네코(招き猫, 손 흔드는 고양이상)와 관음상 등을 가방에 챙겨가도록 하자. 마법의 나뭇잎을 거머쥔 아기 코끼리 덤보(Dumbo)처럼 여러분이 멋지게 날아오르게 될지 또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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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영화 속 등장인물인 캡틴 아메리카는 분신과 같은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적을 쓰러뜨린다. `때때로 엄습하는 불안한 마음은 방패가 아니라 옛 연인의 사진이 들어간 작은 나침반으로 막아낸다. 저렇게 힘 세고 멘탈이 강한 사람도 애착 이불을 만지작거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데 우리 같은 범인이야 별수 있겠나. 그러니 여러분도 임박한 발표를 앞두고 필요한 연장을 단단히 챙기길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역시 임시방편이다. 중대사를 앞두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고, 우리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이며, 실패 중에 가장 큰 실패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동심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크고 의연한 용기로부터 나온다. 로마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베드로는 그렇게 하다가 죽을 줄 몰라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목숨이 귀한 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들어가겠노라고 반석과 같이 결심한 뒤 그의 마음이 다시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겠다’4 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각오가 됐다면 굳이 마체테, 채찍, 커피, 펜던트, 염주, 소매 단추, 코 등을 들고 가지 않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안동섭 중국 후난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unix.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논문으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 다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개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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