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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논어』란 무엇인가 上

巧言令色은 외양이 아닌 태도의 문제

김영민 | 285호 (2019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번지르르한 말과 꾸민 얼굴, ‘교언영색’을 경계하라”는 공자의 조언은 후대까지 이어져왔다. 『논어』의 문장은 이렇다.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여기서 여러 가지 논란이 발생한다. ‘영(令)’이나 문장을 마무리 짓는 표현인 ‘선의(鮮矣)’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또 이 문장을 누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한 것인지, 이를 행위로 봐야 하는지, 상태로 봐야 하는지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마지막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라는 표현에서는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면서도 ‘인(仁)’한 사람이 드물지만 있긴 하다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해석의 여지가 있다. 여러 해석상의 논란을 파헤치면서 공자의 가르침을 찾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下 편에서 ‘해석상의 논란’이 이어집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는 (사람치고), 드물구나, 인한 사람이.(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논어』 해설 6: 교언영색(巧言令色)의 역사적 의미

어법상의 논란 1: ‘영(令)’의 의미

어법의 면에서 살펴볼 첫 번째 사안은 교언영색에서 ‘영(令)’의 의미다. 이에 대해서는 리위핑(李玉平)이 가장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1 ‘영’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영(令)’을 ‘선(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하안(何晏), 형병(邢昺), 유보남(劉寶楠), 정수덕(程樹德) 등 저명한 『논어』 주석가들이 모두 그렇게 해석했다. 즉, ‘영색(令色)’이란 ‘낯빛을 선(善)하게 하고 겉으로 꾸며내어 남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정도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러한 주석가들의 해설 이전에 ‘영’을 해설한 기록들은 상당히 다른 풀이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호령하다(令=發號)’라고 설명하고, 갑골문/금석문의 기록 또한 ‘영(令)=명(命)’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리위핑(李玉平)은 고대 중국에서 ‘좋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들의 상호관계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첫째, 선진(先秦)시기 ‘영(令)’이 ‘선(善)’을 의미하는 용례는 매우 흔하고 보편적이었다. 다만 ‘좋다’라는 뜻을 지닌 또 다른 글자인 ‘양(良)’에 비해 ‘영’의 사용 범위는 넓지 않았다. 따라서 ‘영’의 내포와 외연을 좀 더 정교히 할 필요가 있다. 리위핑에 따르면, ‘영’은 “주로 인간의 품격, 용모, 명망 등이 좋고 매우 훌륭함을 형용할 때 사용되는 글자”로서 영인(令人), 영덕(令德), 영의(令儀), 영색(令色), 영처(令妻), 영명(令名), 영예(令譽) 등에서 그 용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뜻이 더욱 파생돼 상대에 대한 경칭(敬稱) 혹은 사물에 대한 미칭(美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칭의 용법은 영공(令公), 영형(令兄), 영제(令弟), 영애(令愛) 등의 단어에서, 그리고 미칭의 용법은 영윤(令尹), 영절(令節), 영신(令辰) 등의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어법상의 논란 2: ‘선의(鮮矣)’의 의미

전체 문장을 마무리 짓는 표현인 ‘선의(鮮矣, 드물다)’가 삼가 말하기(understatement)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다. 삼가 말하기에 해당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가 바로 주희(朱熹)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서 주희는 “성인의 말은 박절하지 않아서, 단지 드물다고 말한 것이다(聖人辭不迫切, 專言鮮)”라고 주석을 단다. 말이 박절하지 않다고 해서 어조가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종지사 ‘의(矣)’는 단호한 어감을 전달하는 글자다. 그래서인지 동양 허씨(東陽許氏)는 이렇게 말한다. “이 장의 대의는 성인의 사람 관찰하는 법에 대한 것 같지만 그러나 일찍이 배우는 이를 경계하고 깨우치지 않으심이 없었으니, 그 어조를 보면 매우 엄하시다. 대개 배우는 자를 경계하고 깨우치시는 뜻이 더 많다.”(東陽許氏曰, 此章大意似聖人觀人, 然未嘗不警省學者, 觀其辭甚嚴. 蓋警省學者之意爲多.) 2

위와 같은 주희의 견해에 명시적으로 반대한 이는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다.



“‘드물다(鮮)’는 것은 그런 사람이 적다는 말이다. 천하는 크고 기질은 만 가지로 다르니 어찌 나 한 사람의 견해로 반드시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드물다’고 말한 것이다. 주자의 뜻은 그 사람에게 ‘인이 없다(無仁)’고 말한 것이니 옛글에는 대부분 ‘인하지 않다(不仁)’ ‘아직 인하지 않다(未仁)’고 표현하고 ‘인이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주자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鮮者, 少其人之謂也. 天下之大, 氣質萬品, 豈可以吾一人之見, 而必其無也乎. 故曰鮮, 朱子意, 迺謂其人無仁焉, 殊不知古書多, 曰不仁未仁耳, 未聞無仁也.) 3

이처럼 문헌적 전거에 기초해 주희를 비판한 오규 소라이와 마찬가지로 다산 정약용 역시 경험적 사실에 근거해 주희의 해석에 반대한다.

“교언영색은 죄악이 아니다. 다만 성인께서 사람을 관찰할 때 매양 교언영색하는 자를 보면 그 사람은 대개 인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드물다고 말한 것이다. 교언영색에도 때로는 좋은 사람이 있다. 선의(鮮矣)라는 두 글자는 참으로 적절한 말이다. 만약 절무(絕無)라고 한다면 실제에서 벗어난다.”(巧言令色,不是罪惡.特聖人觀人,每見巧言令色者,其人多不能仁, 故第言鮮矣.巧言令色,有時乎有好人.鮮矣二字,眞是稱停語.若雲絕無則違於實矣.) 4

실제로 교언영색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인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저런 말을 한 것이지, 단지 말을 삼가기 위한 방편으로 ‘선의(鮮矣, 드물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선의’란 그러한 사실이 드물다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라는 말이다. 이는 “교언영색에도 때로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경험적인 근거에 기초한 것이다. 만약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 인한 사람이 전혀 없다면 절무(絕無)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기초해서 정약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교언영색이 반드시 부정적인 함의를 지녔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춘추전(春秋傳)』에는 사광이 간(諫)하기를 잘하자 숙향(叔向)이 『시경』의 ‘교언여류(巧言如流)’라는 구절을 인용해 칭찬했고 『시경(詩經)』 ‘대아(大雅)’에서는 산보(山甫)의 덕을 칭찬해 “영의영색하다”고 했으니 교언영색하는 사람에는 때에 따라서는 좋은 사람도 있다. (『春秋傳』 師曠善諫, 叔向引 『詩』 ‘巧言如流’以美之, ‘大雅’美山甫之德日‘令儀令色’. 巧言令色,有時乎有好人.) 5

그런데 이와 같은 정약용의 주장은 단지 경험적인 차원의 주장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험적 주장은, 결국 교언영색과 인과의 이론적 관계마저 재정의하게 된다. 즉, 교언영색과 인은 함께하기 어려운 경향이 있을지는 몰라도 양립불가능한(incompatible)한 것은 아니라고 관계를 재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재론하겠다.



어법상의 논란 3: 교언영색에 관련된 문법과 그 함의

우리에게 사자성어로 익숙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표현은 내용상 ‘교언’과 ‘영색’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문법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교언과 영색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6 하나는 교언과 영색이 동사+목적어의 어법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언과 영색이 형용사+명사의 어법을 구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교언영색은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다’와 같이 번역되고 후자의 경우 교언영색은 ‘교묘한 말과 보기 좋은 낯빛’과 같이 번역된다.

이 두 가지 번역은 문법적으로는 모두 타당하지만 전달하는 함의는 크게 다르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미다’에서는 말과 낯빛을 ‘꾸미는 행위’ 자체가 핵심인 반면 ‘교묘한 말과 보기 좋은 낯빛’에서는 꾸미는 행위보다는 결과로 나타난 특정한 말과 낯빛이 핵심을 이룬다. 교언영색과 인과의 관계를 논할 때 공자는 꾸미려는 행동 혹은 경향을 싫어한 것일까, 아니면 결과로서 특정한 말과 낯빛을 싫어한 것일까? 문법적으로는 어느 쪽 해석도 다 타당하므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논어』 내의 다른 언명을 검토함으로써 비로소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 관련 구절을 살펴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먹는 일에 있어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별일 없이 있을 때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7

이 문장에 나오는 ‘구(求, 추구하다)’라는 글자에 주목하지 않으면 자칫 공자가 선호하는 군자라는 인간 유형은 늘 배고프거나 불편한 상태에 있는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구’라는 글자에 주목하면 관건은 배부름이나 편안함을 ‘추구하는 행위’이지 배부름이나 편안함의 상태 자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는 군자가 배부르거나 편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애써 추구하는 행위 혹은 경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덕에 대한 생각을 품고, 소인은 땅에 대한 생각을 품는다.(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8

앞서 예문에서 ‘구’라는 글자가 중요했듯이 이 문장에서는 ‘회(懷)’라는 글자가 중요하다. 즉, 공자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상반되는 인간 유형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들이 빚어낸 최종 결과보다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에 중점을 둔다. 마치 앞서 문장에서 군자가 배부르거나 편안한 상태에 있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애써 추구하는 행위 혹은 경향에 대해 반대했던 것처럼.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혹은 義를 밝히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혹은 利를 밝힌다).(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9

앞서 두 예문에서 ‘구(求)’와 ‘회(懷)’라는 글자가 중요했듯이 이 문장에서는 ‘유(喩)’라는 글자가 중요하다. 즉, 공자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상반되는 인간 유형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들이 결과적으로 실현한 의(義)나 이(利)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말은 어눌하고자 하되 행동에는 민첩하고자 해야 한다.(子曰,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10

앞서 세 예문에서 ‘구’와 ‘회’와 ‘유’라는 글자가 중요했듯이 이 문장에서는 ‘욕(欲)’이라는 글자가 중요하다. 즉, 공자는 군자라는 인간 유형을 설명함에 있어서 군자가 결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무조건적 빠름이나 느림, 혹은 말더듬을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둔다. 주희의 『논어집주』가 지적했듯이 여기서 군자라는 인간형은 결과적으로 말이 어눌한 것과 행동이 빠른 것을 추구하는 이가 아니다. 말의 어눌과 행동의 민첩을 ‘추구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적절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함의를 음미하려면 ‘욕’이라는 글자에 유의해야 한다.

이상의 『논어』 문장들은, 공자가 어떤 특정한 결과보다는, 지향점 혹은 ‘하려는 시도’에 주목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교언영색’의 ‘교’와 ‘영’ 역시 ‘언’과 ‘색’을 꾸미는 형용사가 아니라 ‘언’과 ‘색’을 대상으로 한 동사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보고 번역해야 비로소 공자가 ‘교묘한 말, 꾸민 얼굴빛, 과도한 공손’ 등과 같은 특정 결과에 비판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하려는 혹은 꾸미려는 시도나 지향에 비판적이었음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 요컨대, 『논어』에 나오는 ‘교언영색’은 형용사+명사로 번역해서는 안 되고 동사+목적어로 번역해야 한다. 11

그러면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본들은 교언영색을 어떻게 번역해왔는지 살펴보자. 『논어』에는 교언영색이 두 번 나오므로 각기 나눠 살펴보도록 하겠다.

『논어』 학이: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子曰, 巧言令色, 鮮矣仁.)”에 나오는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을 모두 동사+목적어 문형으로 본 경우:

강동석, 『논어역보』, 한국학술정보, 2016, 13쪽; 금장태, 『우리말 사서』, 지식과교양, 2013, 11쪽; 김영호, 『논어: 공자와의 대화』, 산지니, 2012, 62쪽; 김용옥, 『논어한글역주』1, 한길사, 2008, 271쪽; 김원중, 『논어』, 휴머니스트, 2017, 41쪽; 김학주,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112쪽; 김형찬, 『논어』, 홍익출판사, 2016, 31쪽; 동양고전연구회, 『논어』, 민음사, 2016, 25쪽; 박헌순,『논어집주』1, 한길사, 2008, 38쪽; 부남철, 『논어정독』, 푸른역사, 2010, 35쪽; 성백효,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2017, 32쪽; 신창호, 『한글 논어』, 판미동, 2014, 83쪽; 심경호, 『논어』1, 민음사, 2013, 22쪽; 양차오밍, 이윤화 역, 『논어전해』, 학고방, 2016, 8쪽; 유교문화연구소, 『논어』,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 6쪽; 이기동, 『논어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59쪽; 이동희, 『논어』, 계명대학교출판부, 2015, 112쪽; 이상임, 『논어』,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05, 43쪽; 이을호, 『한글논어』, 현암학술문화연구소, 2011, 22쪽; 정약용, 이지형 역, 『역주 논어고금주』1, 사암, 2010, 89쪽; 이한우, 『논어로 논어를 풀다』, 해냄, 2012, 37쪽; 임옥균, 『논어정독』, 삼양미디어, 2015, 53쪽; 장기근, 『개정신석 논어집주』, 명문당, 2009, 27쪽; 정태현·이성민, 『역주논어주소』1, 전통문화연구회, 76쪽; 최근덕, 『한글논어』, 성균관출판부, 1995, 16쪽; 최석기, 『정선 사서』, 창비, 2016, 26쪽; 최영갑, 『논어』1,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3쪽; 한필훈, 『논어』, 안티쿠스, 2012, 36-37쪽.


『논어』 학이: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子曰, 巧言令色, 鮮矣仁.)”에 나오는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을 모두 형용사+명사 문형으로 본 경우:

김도련, 『주주금석 논어』1, 웅진지식하우스, 2015, 31쪽; 김동인 외, 『세주 완역 논어집주대전』1, 한울아카데미, 2015, 52쪽; 류종목, 『논어의 문법적 이해』, 문학과지성사, 2000, 21쪽; 박삼수,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 지혜의바다, 2014, 21쪽; 박유리, 『논어상해』, 문사철, 2013, 21쪽; 박종연, 『논어』, 을유문화사, 2006, 28쪽;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1, 문학동네, 2002, 32쪽; 신정근,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사계절, 2009, 52쪽; 윤재근, 『(사람인가를 묻는) 논어』1, 동학사, 2004, 62쪽; 이강재, 『논어』, 살림, 2006, 102쪽; 이기석·한백우,『논어』, 홍신문화사, 2007, 15쪽; 이우재, 『이우재의 논어 읽기』, 21세기북스, 2013, 53쪽; 임동석, 『논어』1, 동서문화사, 2009, 77쪽; 조명화, 『논어역평』1, 현암사, 2017, 126쪽; 차주환, 『공자의 인생 수업, 논어』, 을유문화사, 2015, 22쪽; 홍승직, 『처음 읽는 논어』, 행성비, 2016, 16쪽; 황희경, 『논어』, 시공사, 2000, 32쪽.




그러면 아래 문장의 경우를 살펴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안면을 치장하고, 과도하게 공손히 하는 것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다. 나 역시 그런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12

『논어』 공야장: 자왈, 교언, 영색, 주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에 나오는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을 모두 동사+목적어 문형으로 본 경우:

강동석, 『논어역보』, 한국학술정보, 2016, 105쪽; 금장태, 『우리말 사서』, 지식과교양, 2013, 32쪽; 김도련, 『주주금석 논어』1, 웅진지식하우스, 2015, 266쪽; 김영호, 『논어: 공자와의 대화』, 산지니, 2012, 118쪽; 김학주,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219쪽; 김형찬, 『논어』, 홍익출판사, 2016, 78쪽; 동양고전연구회, 『논어』, 민음사, 2016, 113쪽; 박삼수,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 지혜의바다, 2014, 145쪽; 성백효,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2017, 152쪽; 신창호, 『한글 논어』, 판미동, 2014, 167쪽; 심경호, 『논어』1, 민음사, 2013, 184쪽; 양차오밍, 이윤화 역, 『논어전해』, 학고방, 2016, 119쪽; 유교문화연구소, 『논어』,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 161쪽; 윤재근, 『(사람인가를 묻는) 논어』1, 동학사, 2004, 379쪽; 이기동, 『논어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235쪽; 이기석·한백우,『논어』, 홍신문화사, 2007, 96쪽; 이동희, 『논어』, 계명대학교출판부, 2015, 109쪽; 이상임, 『논어』,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05, 87쪽; 이을호, 『한글논어』, 현암학술문화연구소, 2011, 71쪽; 정약용, 이지형 역, 『역주 논어고금주』1, 사암, 2010, 593쪽; 임옥균, 『논어정독』, 삼양미디어, 2015, 127쪽; 장기근, 『개정신석 논어집주』, 명문당, 2009, 183쪽; 정태현·이성민, 『역주논어주소』1, 전통문화연구회, 298쪽; 최근덕, 『한글논어』, 성균관출판부, 1995, 123-124쪽; 최석기, 『정선 사서』, 창비, 2016, 63쪽; 최영갑, 『논어』1,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187쪽; 황희경, 『논어』, 시공사, 2000, 103쪽.


『논어』 공야장: 자왈, 교언, 영색, 주공, 좌구명치지, 구역치지(子曰, 巧言, 令色, 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에 나오는 교언(巧言)과 영색(令色)을 모두 형용사+명사 문형으로 본 경우:

김동인 외, 『세주 완역 논어집주대전』1, 한울아카데미, 2015, 589쪽; 김용옥, 『논어한글역주』2, 한길사, 2008, 366쪽; 김원중, 『논어』, 휴머니스트, 2017, 136쪽; 류종목, 『논어의 문법적 이해』, 문학과지성사, 2000, 170쪽; 박유리, 『논어상해』, 문사철, 2013, 201-202쪽; 박종연, 『논어』, 을유문화사, 2006, 151-152쪽; 박헌순,『논어집주』1, 한길사, 2008, 323쪽;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1, 문학동네, 2002, 272쪽; 부남철, 『논어정독』, 푸른역사, 2010, 175쪽; 신정근,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사계절, 2009, 216쪽; 이강재, 『논어』, 살림, 2006, 155쪽; 이우재, 『이우재의 논어 읽기』, 21세기북스, 2013, 231쪽; 임동석, 『논어』1, 동서문화사, 2009, 401쪽; 조명화, 『논어역평』1, 현암사, 2017, 513쪽; 차주환, 『공자의 인생 수업, 논어』, 을유문화사, 2015, 89쪽; 한필훈, 『논어』, 안티쿠스, 2012, 98-99쪽.


이 중 김도련 번역본, 김원중 번역본, 박헌순 번역본, 부남철 번역본, 한필훈 번역본은 학이 편과 공야장 편에 거듭 나오는 똑같은 표현인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대해서 한 번은 동사+목적어 문형을 적용해 번역하고, 다른 한 번은 형용사+목적어 문형을 적용해 번역했다. 같은 표현에 대해 왜 비일관적인 번역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13

『논어』에는 교언영색 중 교언이라는 표현만 다시 한번 출현하는 문장이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자 하는 행위는 덕을 어지럽히고, 작은 일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망친다.(子曰, 巧言亂德, 小不忍則亂大謀.) 14

교언영색에서와 거의 유사한 의미적 맥락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여기 나오는 교언이라는 표현 역시 앞서 나온 용례와 같이 해석될 만하다. 그러면 현행 『논어』 한국어 번역본들은 이 표현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교언(巧言)을 동사+목적어 문형으로 본 경우:

강동석, 『논어역보』, 한국학술정보, 2016, 351쪽; 금장태, 『우리말 사서』, 지식과교양, 2013, 94-95쪽; 김도련, 『주주금석 논어』2, 웅진지식하우스, 2015, 340쪽; 김동인 외, 『세주 완역 논어집주대전』3, 한울아카데미, 2011, 631쪽; 김영호, 『논어: 공자와의 대화』, 산지니, 2012, 268쪽; 김원중, 『논어』, 휴머니스트, 2017, 376쪽; 김학주,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2015, 480쪽; 김형찬, 『논어』, 홍익출판사, 2016, 183쪽; 동양고전연구회, 『논어』, 민음사, 2016, 337쪽; 류종목, 『논어의 문법적 이해』, 문학과지성사, 2000, 516쪽; 박삼수, 『쉽고 바르게 읽는 논어』, 지혜의바다, 2014, 442쪽; 박유리, 『논어상해』, 문사철, 2013, 672쪽; 박종연, 『논어』, 을유문화사, 2006, 475-476쪽; 박헌순,『논어집주』2, 한길사, 2008, 375쪽; 배병삼, 『한글세대가 본 논어』2, 문학동네, 2002, 300쪽; 부남철, 『논어정독』, 푸른역사, 2010, 501쪽; 성백효, 『논어집주』, 전통문화연구회, 2017, 454쪽; 신정근,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사계절, 2009, 626쪽; 신창호, 『한글 논어』, 판미동, 2014, 386쪽; 심경호, 『논어』3, 민음사, 2013, 72쪽; 양차오밍, 이윤화 역, 『논어전해』, 학고방, 2016, 391쪽; 유교문화연구소, 『논어』,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6, 573쪽; 윤재근, 『(사람인가를 묻는) 논어』2, 동학사, 2004, 417쪽; 이강재, 『논어』, 살림, 2006, 296쪽; 이기동, 『논어강설』,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569쪽; 이기석·한백우,『논어』, 홍신문화사, 2007, 376쪽; 이동희, 『논어』, 계명대학교출판부, 2015, 155쪽; 이상임, 『논어』,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05, 37쪽; 이우재, 『이우재의 논어 읽기』, 21세기북스, 2013, 681쪽; 이을호, 『한글논어』, 현암학술문화연구소, 2011, 207쪽; 정약용, 이지형 역, 『역주 논어고금주』4, 사암, 2010, 375쪽; 이한우, 『논어로 논어를 풀다』, 해냄, 2012, 1126쪽; 임동석, 『논어』4, 동서문화사, 2009, 1391쪽; 임옥균, 『논어정독』, 삼양미디어, 2015, 300쪽; 장기근, 『개정신석 논어집주』, 명문당, 2009, 592쪽; 정태현·이성민, 『역주논어주소』3, 전통문화연구회, 46쪽; 조명화, 『논어역평』2, 현암사, 2017, 488쪽; 차주환, 『공자의 인생 수업, 논어』, 을유문화사, 2015, 280쪽; 최근덕, 『한글논어』, 성균관출판부, 1995, 399쪽; 최영갑, 『논어』2,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39쪽; 한필훈, 『논어』, 안티쿠스, 2012, 267쪽; 홍승직, 『처음 읽는 논어』, 행성비, 2016, 295쪽; 황희경, 『논어』, 시공사, 2000, 273쪽. 15


이렇게 볼 때 학이, 공야장, 위령공 편에 공히 출현하는 교언(巧言)에 대해 문법적으로 일관된 번역을 제공하는 번역본은 이을호 번역본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위령공 “자왈, 교언난덕, 소불인즉난대모.(子曰, 巧言亂德, 小不忍則亂大謀.)”에 나오는 ‘교언’에 대해 압도적 다수의 번역본이 동사+목적어 문형을 적용해 번역하는 것은 뒤에 나와서 병렬의 효과를 내고 있는 단어 난덕(亂德)을 형용사+명사로 보기 어렵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위령공 ‘자왈, 교언난덕, 소불인즉난대모’에 나오는 ‘교언’은 동사+목적어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논어』 텍스트 내에 등장하는 표현의 일관성을 염두에 둔다면 위령공 ‘자왈, 교언난덕, 소불인즉난대모’에 나오는 ‘교언’의 용례는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나오는 ‘교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생각한다.

필자소개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kimyoungm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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