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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아버지를 미워한 환관의 ‘보물’

안동섭 | 284호 (2019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중국에서 환관의 역사는 최소한 기원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를 거세해서 머슴처럼 쓰다가 이후 복건성과 광동성, 광서성 등지에서 외주 형태로 충당했다. 그러다 지원자가 늘어나니 아예 ‘공채’ 형식으로 바꿨다. 이렇게 ‘입사’한 환관들은 그래도 괜찮은 대우에 만족했는지 황실과 체제를 수호하는 데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잘린 ‘보물’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각자의 보물이 있다. 함부로 자르지 말라.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안동섭 인문학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베이징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축구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대지를 가르는 패스가 견고한 수비벽을 뚫고 공격수의 발끝에 택배처럼 배달될 때다. 누가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송곳패스’는 참으로 훌륭한 표현이 아닌가. 송곳 한 번 찔러서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무엇 하러 공성추(파성추 혹은 공성퇴)를 쓰겠는가. 축구 캐스터들이 훌륭한 침투 패스를 볼 때마다 ‘아아! 파성추 같은 패스예요!’라고 외쳤다면 축구의 아름다움이 서 푼은 감소했을 것이다.

축구는 잘 못 하지만 우리 역시 침투하며 산다. 우리는 독보적인 패션 센스로 다수의 안구 속으로 침투하기도 하고, 황천의 요리 솜씨로 미각 테러를 자행하기도 한다. 축구장에서 울려 퍼진 우렁찬 함성은 인근에서 조용하게 산책하던 임마누엘 칸트의 고막을 두드리는 공성퇴다. 사실 고막을 무너뜨리는 데 파성추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옆자리에서 딸깍거리는 샤프 소리와 칸막이 너머에서 똑닥거리는 기계식 키보드 소리는 날카롭게 침투해오는 송곳 패스다.

모든 사회는 구성원의 상호 침투를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지 느슨하게 합의한다. 모든 팀이 공격 축구를 표방하는 리그에서 우리 팀이 전반전에만 침투 패스로 3골을 내어줬다고 해도 호들갑 떨 것 없다. 후반전에 침투 패스로 4골을 넣어서 이기면 될 것 아닌가. 하지만 대부분의 경기가 1-0으로 끝나는 골 가뭄 리그에서는 단 한 차례만 찬스를 허용해도 치명적일 수 있다. 팀들은 이런 상황에선 침투를 시도하기보단 막는 데 주력한다. 합계 출산율이 3이 넘는 사회에선 옆집 아이들 소리가 들려올 때 ‘그렇다면 우린 넷째를 낳아 복수하자’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출산율이 1보다 낮은 사회에선 방음 공사를 하거나 노키즈존을 설치하는 쪽으로 대응하게 된다.

우리가 중국을 여행하면서 겪게 되는 깜찍한 문화 충격들은 마치 수비 축구에 익숙한 선수가 공격 축구의 한복판에 내던져졌을 때 겪는 그것과 비슷하다. 중국에서의 하루하루는 (대부분의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때)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갈래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협공한다. 쉽지 않겠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도 수비를 포기하고 공격 태세로 전환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말없이 합석해오면 당신도 후에 합석으로 응수해주고, 누군가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그리워하면’을 선창하면 당신은 ‘언젠간 만나게 되는’부터 뺏어 부르면 된다. 베이징 아재가 ‘난닝구’를 가슴까지 말아 올리고 접근해도 놀라지 말자. 당신의 안구를 찔러 죽이려고 공명(孔明)이 파놓은 함정은 아니니까. ‘베이징 비키니’ 아재를 향해 당신도 과감히 ‘한궈 비키니’로 반격하라. 복부의 탐스러운 굴곡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국인도 밀릴 게 없다. 그 풍만함에 깜짝 놀란 상대방은 오래도록 공한증(恐韓症)에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민첩한 전술대응은 말처럼 쉽지 않다. 새로 부임한 감독이 ‘자, 우리 내일부터는 침투 패스 위주로 공격 축구를 하자!’라고 선언한대도 지난 30년간 수비 축구를 해온 선수들의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침투 빈도와 타인의 침투에 대한 아량의 정도는 오랜 기간 학습되는 습관과 같은 것이라 단숨에 바뀌지 않는다. 영국인 승객이 기내에 가득 퍼진 컵라면 냄새가 참기 어려워 불만을 제기할 때, 한국인 승객은 같은 냄새가 참기 어려워 “저도 하나 주세요”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가려가며 침투를 용인하거나 거부하곤 한다. 연인과 입을 맞추면서 타액이 섞이는 것과 같은 침투라면 거절할 이유가 어딨겠는가. 하지만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귀가해 취기에 그만 내 뺨을 깨물고 가는 것과 같은 침투는 자제해줬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먼 옛날에 살다 죽었던 호모 사피엔스들도 상대를 가렸다. 중국 제국의 황제가 사는 곳, 타는 것, 앉을 자리를 부르는 말에 번번이 ‘금(禁)’자가 들어가는 것은 용인과 불허 사이에 놓인 계급성을 시사한다. 자금성(紫禁城)은 황제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감촉과 멘탈에 찔러 들어오는 모든 송곳을 통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금지 구역(The Forbidden City)’이다.



그런데 피지배계급의 성원들이 황제의 프라이버시에 침투하는 길이 막혀 있을 때 종종 그 문을 열어젖혔던 것은 다름 아닌 황제 본인들이었다. 황제들은 피지배계급의 여성들과 흔쾌히 몸을 섞었다. 몸을 섞으면 아이가 생기고, 초개(草芥)와 지상(至上)의 피를 정확히 반씩 가지고 태어난 혼혈 왕자들은 간혹 천하에서 가장 금지된 자리를 계승하기도 했다. 금지 구역의 지정석에 ‘머글(보통 인간)’의 피가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밖에서 공성퇴로 때려서가 아니라 안에서 누군가가 송곳만 한 열쇠를 가져와서 자물쇠를 열었기 때문이다.

트로이의 성문이 열리고 나면 그 틈으로 많은 이가 들어온다. 외척(外戚)이라는 명분으로 ‘성의 안쪽 사람(bourgeois)’이 된 이들은 뜻밖의 신분 상승에 기분이 좋지만 이들이 성내를 활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트로이 원주민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황실의 도덕교사들이 황제나 황태자에게 ‘물건’을 함부로 놀리지 말고 지배계층 출신의 정혼자에게 충실하라고 굳이 권했던 것은 꼭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도덕교사들의 권면(勸勉)보다 더 근본적인 대책은 없었을까? 세계 축구사에 영원히 기억될 전설적인 수비전술 카테나치오(Catenaccio)처럼 이 분야에도 이런저런 전술들이 있다. 사생아(bastard, 私生兒)의 법적/도덕적 지위를 승인하지 않는 것이 핵심인데, 근친혼의 경우가 이 방면의 최종 진화형이자 필살기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제국들의 경우는 필살기까지는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종종 비빈(妃嬪)과 외척과 종친들의 목을 자르거나, 독살하거나, 순장시키곤 했는데 근친혼과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인도적인 전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시점을 반대로 돌려보자. 평민의 피가 여성의 몸을 매개로 황가에 침투하는 일은 그래도 자주 일어났으나 반대의 경우, 즉, 남성의 몸을 매개로 금좌에 침투하는 일은 엄중히 금지됐다. 트로이의 성문이 안쪽에서야 쉽게 열렸지 바깥쪽에서는 난공불락이었던 것처럼 사회 하층부의 남성들에게 자금성은 철옹성이었다. 남성의 몸으로 금지구역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재생산포기각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중국에서 환관의 역사는 최소한 기원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전쟁 포로를 거세해서 머슴처럼 썼던 모양인데 중국식 제국 질서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잡아다 쓰기보다는 외주를 주는 쪽으로 진화했다. 당나라 당시 복건성과 광동성, 광서성 등지는 유명한 환관 공급지였는데, 이들 중 많은 수는 국제무역상에게서 사들인 노예이거나 국내에서 발생한 인신매매 피해자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을 때 뺏어 먹기를 멈춘다. 음원 값이 싸지고 또 구매가 편리해지자 ‘불법’ 다운로드가 사라지지 않았나. 시간이 흘러 사회가 복잡해지니 인신매매로 잡아 오는 환관보다 스스로 입사를 원하는 환관 지망생이 늘어났다. 적절한 보수만 약속하면 알아서 원서를 제출하는데 굳이 출처가 의심스럽고 도덕적으로 부담스러운 하청용역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1623년, 명나라의 천계(天啓) 황제는 결원된 환관 3000명의 충원 계획을 세우고 채용공고를 냈는데 무려 2만 명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물(陽物)을 자르고 자금성에 몰려들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선 당초보다 50% 많은 4500명을 채용하기로 했지만 나머지 1만5000여 명을 구제해주지는 못했다. 1



이렇게 자진해 거세하고 환관이 되기를 희망한 자들의 대부분은 물론 사회의 최하층민이었으며 지리적으로는 변두리 출신이었다. 그곳을 자르지 않고도 공직에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던 서울의 부유층 자제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독한 빈곤에 내몰린 시골 가정에선 죽는 것보다는 성기 하나 자르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일부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자신의 의사로 거세했지만 상당수는 어렸을 적에 가부장의 결정에 따라 강제로 거세당하고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 나이도 스펙이라고 채용하는 쪽에서 늙은 고자보다 어린 고자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성기까지 잘려가며 입사한 회사인데 쉽게 사표를 낼 리도 없고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기도 쉽지 않다. 철저하게 부려먹기 위해 회사가 고안한 제도에 의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음에도 일단 취직한 후에는 회사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대체로) 진심으로 노력했다. 청 말의 환관들을 직접 만나보고 연구했던 영국인 죠지 카터 스텐트(George Carter Stent)는 이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을 이 꼴로 만든 아버지를 증오했다고 보고했다. 2 하지만 성기를 자른 아버지를 미워할지언정 아버지로 하여금 그들의 성기를 자르게끔 내몬 전통사회의 구조에 대해선 별 불만이 없었다. 납치범을 사랑하게 된다는 인질들처럼 대개의 환관은 청조가 망한 뒤에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3


청나라의 환관들은 입사할 적에 잘랐던 그것을 특수 처리해 보관했다. 그들은 이 잘린 살덩이를 ‘보물[寶]’이라고 부르며 애지중지했고 죽어서는 반드시 이 보물과 같이 매장되기를 원했다. 저세상에서나마 탈퇴한 멤버와 재결합해 완전체로 컴백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마지막 환관이었던 쑨야오팅(孙耀庭)은 1996년에 94세를 일기로 죽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그의 가족들은 구체제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가 해코지를 당할까 무서워 문제의 보물을 없애버렸다. 그의 전기 작가가 말하기를 쑨야오팅은 인터뷰 도중 단 두 번 울었는데 한 번은 거세 경험을, 다른 한 번은 가족들이 보물을 내다 버린 전말을 이야기할 때였다고 한다. 4 그러니 옆 사람의 지우개가 여러분의 책상으로 넘어온대도 싹둑 자르지 말자. 그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보물일지도 모른다. 오늘 베푼 아량이 언젠간 영화와 같이 되돌아오리라.


필자소개 안동섭 인문학자 dongsob.ahn@univ.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논문으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 다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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