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4. 철학으로 해석하는 병맛과 B급 문화

“엄근진 대신 진정성 있는 저급함”
병맛의 ‘병’은 통쾌한 사이다 병?

278호 (2019년 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우리의 삶은 진지하지 않은 무의미와 해명하기 어려운 우발적 사건들, 거짓과 부정의, 혼란과 병균이 마구 뒤섞여 있다. 진지함으로 채워진 예술만으로는 우리의 미감을 충족시킬 수 없다. ‘B급 예술’ ‘병맛 예술’이 시대를 관통하는 이유다. 저급한 B급 문화는 중세시대에도 존재했다. 현실을 풍자하는 우화들이 노래로 만들어져 퍼지곤 했는데 내용은 엄숙함과 거리가 멀었고 당시 중세 교회음악에서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는 장조를 사용했다. 시간이 흘러 ‘병맛’은 대세가 됐다. ‘병신맛’의 약자인 병맛은 하찮고 저급한 맛을 뜻한다. 병맛에는 고상한 것 역시 밑바닥까지 들추면 병맛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가 전제돼 있다. 병맛의 ‘병’은 가식을 통쾌하게 날려버리는 ‘사이다’의 병을 의미할지 모른다.




저급한 B급 문화는 중세에도 존재했다

‘포벨 이야기(Roman de Fauvel)’는 14세기 초 몰락의 길로 들어서던 중세 말기에 등장한 우화다.(그림 1) 우화의 주인공은 당나귀 혹은 말의 모습을 지닌 포벨인데 그의 이름은 아첨(Flatterie), 탐욕(Avarice), 비열함(Vilenie), 변덕(Variété), 질투(Envie), 게으름(Lâcheté)의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포벨은 당연히 집이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친다. 어처구니없게도 어느 날 운명의 여신은 어떤 인간보다 더 엄청난 권력을 그에게 부여한다. 그때부터 재력가, 정치가, 심지어 성직자 등 온갖 사람들이 그에게 아첨을 하며 이윽고 그는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그 결과 세상이 개판, 아니 당나귀판이 돼버린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다. 정의와 진실, 헌신과 희생이 세상을 지배하기는커녕 당시 최고의 권력을 지닌 성직자들마저도 거짓과 아첨을 일삼는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우화는 마치 우리의 양반전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우화가 그러하듯 이 우화 역시 현실에 대한 풍자다.

이 우화는 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물론 이 노래는 중세 사회를 지배하던 교회에서가 아닌 이른바 세속음악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당시 기록을 통해 되살린 ‘포벨 이야기’ 음악은 현재 유튜브를 통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한 곡만 들어보더라도 당시 교회음악인 성가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가음악에서 느끼는 엄숙함과 차분함이 없다. 우화의 내용이 엄숙함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단지 내용이 아닌 음악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이 세속적인 ‘포벨 이야기’가 엄숙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교회음악의 음악적 규칙으로부터 일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음의 급격한 비약이 발견된다. 교회의 성가 음악에서는 음이 급격하게 비약하는 것을 금지한다. 교회는 하나의 음 다음에 4도 이상의 간격으로 비약하는 음을 금지했는데, 이는 음의 급격한 비약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고양되게 하고 흥분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령, ‘도’ 다음에 ‘솔’이 나오거나 심지어 한 옥타브 높은 ‘도’ 음이 나올 경우 흥분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도약을 금지한 중세의 성가는 매우 밋밋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서 ‘포벨 이야기’는 음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조’ 음악이 중세 교회음악에서 금지됐다는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중세의 음악은 오늘날과 달리 선법(mode)이라고 불리는 7개의 음계가 사용됐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장음계(장조)와 단음계(단조)는 7개의 선법 중에서 이오니안 선법과 에올리안 음계에 해당한다. 나머지 5개의 음계(도리안, 프리지안, 리디안, 믹솔리디안, 로크리안)는 20세기 이후 음악가들에게 실험적으로 사용되거나 재즈음악에서 독특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부분적으로 사용될 뿐이다. 장조(major scale)에서 ‘메이저’는 말 그대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음계를 뜻하며 오늘날 음악에서 장조와 단조의 비율을 보면 당연히 장조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런데 이 장조 음악이 중세 교회음악에서 철저하게 금지됐다. 심지어 교회음악에서 장조음악을 금지하는 교황의 칙령이 발표되기도 했다. 밝고 쾌활한 장조음악의 분위기는 진지한 교회의 분위기에 반하는 ‘반진지 문화’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반해서 ‘포벨 이야기’와 같은 세속음악에서는 장조음악이 흔하게 사용됐다.

심지어 ‘포벨 이야기’는 당나귀의 울음소리나 목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음악적으로 소음에 가까운 불협화음마저도 사용했다. 교회가 도약이 심하고 쾌활한 장조의 분위기를 지니며 소음과도 같은 이 세속적 음악을 비난한 이유는 교회라는 ‘진지한’ 장소를 시끌벅적한 세속의 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서는 진지함과 엄숙함 외에 어떤 것도 금지된다. 심지어 웃음마저도 위험한 것이다. 시중잡배들이 설치는 시장처럼 떠들썩하고 냄새나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은 전염병처럼 불결한 것으로 간주됐다.

음악사에서도 이 불결한 ‘B급 음악’은 주목받지 못하며 그 영향력에 대한 온당한 평가도 받지 못했다. 중세의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단성음악인 ‘그레고리안 성가’ 음악이며 이후 오르가눔이라는 다성음악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거의 모든 음악사 책에서 서술되고 있는 중세음악의 역사다. 음악사에서 세속음악이 언급된다면 그것은 B급 음악으로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는 정도의 언급뿐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가상의 공간을 벗어나 현실의 공간에서 당시의 사람들을 매료시킨 것은 교회의 성가가 아닌 ‘포벨 이야기’와 같은 세속음악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는 진지하지 않은 무의미와 해명할 수 없는 우발적 사건들, 거짓과 부정의, 혼란과 병균이 마구 뒤섞여 있다. 한마디로 현실은 진지함과 질서로 채워진 무균의 인큐베이터 공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지함’으로 채워진 예술만이 우리의 미감을 충족시킬 수 없다. ‘B급 예술’이나 ‘병맛 예술’ 혹은 문화는 어느 시대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진지함으로 무장한 중세의 교회에서 웃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으로 간주됐는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의 이러한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중세시대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연속적으로 살해되는 사건을 윌리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인 윌리엄이 해결해나가는 추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여느 추리소설이 그러하듯 극적인 반전이 있다. 소설의 결말에서 수도사들을 죽인 범인은 다름 아닌 수사를 의뢰한 수도원장이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더 흥미로운 사실은 범행 동기다.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 ‘희극론’이 사람들에게 읽혀서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수도원장이 도서관의 은밀한 장소에 보관된 그 책에 독을 묻혀서 그것을 읽는 수도사들을 독살한 것이다. 살인사건의 발단이 이 미스터리한 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수도원장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숭고한’ 결단으로 생각했다. 아직까지도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편 ‘희극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희극론’을 쓴 것은 틀림없지만 완전히 소실돼 발견되지 않았다. 시학 2편이 수도원 도서관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에코의 설정일 따름이다.

도대체 시학 2편이 어떤 내용이길래 독실한 성직자인 수도원장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야만 했을까?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시학 1편의 ‘비극론’이나 여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 속에 나타난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론을 할 수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tragedy)이 슬픔과 비애를 유발하는 것이라면 희극(comedy)은 당연히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웃음은 슬픔과 반대되는 기쁨이나 행복, 쾌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비극이 보통 이상의 잘난 사람들을 모방(미메시스)하는 예술이라면 희극은 보통 이하의 사람들을 모방하는 예술이라고 했다. 비극과 희극을 나누는 그의 기준이 다소 생뚱맞아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충분한 이유가 있다. 대개 보통 이상의 잘난 사람들은 교만함을 갖기 마련이다. 아무리 교양 있고 세련된 척하며 자신보다 못난 사람들을 배려하는 척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한편에는 우월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우월감과 교만은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비극을 초래한다. 반면 못난 사람들은 무엇인가 못 갖춘 사람들이다. 못 갖췄다는 것은 응당 있어야 할 자리나 이치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가령, 똑바로 걸어야 할 걸음이 삐딱하거나 엄중한 무대에 오르다가 계단의 턱에 걸려 넘어지면 웃음을 유발할 것이다. 이는 제대로 걷거나 엄중한 분위기에서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며 링 위에 올라선 프로레슬링 선수가 상대방에게 비난을 퍼붓기 위해서 마이크를 잡은 순간 그의 입에서 가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발산된다면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기대하는 남성다운 남성(?)이 내야 할 남성적인 목소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상황이 웃음을 유발하는 근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이 지닌 위험함은 웃음 자체가 아니다. 그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이 인간의 모자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모자람(결점)은 못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지닌 결점이라는 사실이다. 비극이 슬픔을 유발하고 희극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그 상황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종이가 찢기는 모습을 보고 슬픔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새의 날개가 찢기는 모습을 본다면 비애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비애를 느끼는 것은 새가 종이와 달리 우리와 같은 생명체라는 공감 때문이다. 종이가 바람에 휘날리다 돌에 걸려서 덜렁대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겠지만 타조가 달리다가 돌에 걸려서 넘어진다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타조와 우리는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공감 때문이다.

인간이 처한 엉뚱한 상황이나 행동을 묘사한 희극이 웃음을 유발한다면 암묵적으로 우리들 모두가 그런 상황에 빠질 수 있는 결함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항상 이치에 맞게, 혹은 진지하게 존재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전제된 것이다. 웃음의 근원은 인간의 결함이며 희극은 웃음을 통해서 인간의 결함을 대상화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신을 닮은 가장 완벽한 피조물의 결함을 대상화하고 이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결국 신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왜 그리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마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웃음이 저급함과 반진지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웃음을 선사하는 희극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 웃음은 치유적인 목적에 한정된다. 희극의 목적은 웃음 자체가 아니라 웃음을 통해서 그러한 상황의 어처구니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마치 비극을 통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마음을 정화하듯이 희극에서 얻는 웃음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정신을 고양시킨다. 더군다나 그가 보기에 기승전결의 완벽한 형식을 지니지 못한 비극은 카타르시스를 유발할 수 없듯이 형식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희극 또한 진정한 웃음을 유발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웃음은 교훈적인 것이며 진지함의 산물이다. 진정한 희극의 웃음에는 반드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 어떤 가르침도 없다면 그것은 뜨내기의 난잡한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웃음은 유쾌함을 가장한 선생질의 일종일 따름이다.

웃음은 진지하지 않다. 진지하게 웃는다는 것은 뜨거운 아이스커피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렵다.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깨는 것이 웃음의 특징이다. 웃음은 이성적인 존재라든가, 완벽한 피조물이라든가 하는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정의를 훼손한다. 우스운 것은 하찮고 저급한 것으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예상할 수 없었던 결론에 도달한다.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인간의 결함이고 그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성질의 것이라면 인간은 그 자체가 결함을 지닌 존재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계에 비유해보자. 기계에서 결함은 그 기계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다. 가령, 자전거의 핸들이 느슨해져서 제멋대로 돈다면 핸들은 결함이며 원하는 방향으로 달리는 자전거의 목적(의미)에 부합하지 않는 무의미한 고철일 뿐이다.

인간의 경우 어떨까? 우선 인간의 존재를 자전거처럼 ‘원하는 방향으로 달린다’는 하나의 목적을 상정할 수 없다. 억지로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목적을 부여해보자. 가령, 인간은 완전한 인격체라는 목적을 상정한다 해도 인간의 몸이나 정신에는 느슨한 핸들처럼 그 목적에 반하는 잉여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인간은 무수히 많은 무의미한 결함 덩어리로 이뤄져 있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을 완전한 인격체니, 신의 완벽한 피조물이니 하는 거창한 수식어로 포장하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야말로 웃음을 유발하는 실체일지도 모른다.



가령,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시신 앞에서 웃는다면 그것은 저급한 행동을 넘어서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상주의 상복에 걸친 넥타이가 마치 곰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웃길 수도 있다. 평소에는 넥타이가 바람이 흩날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지만 하필이면 그 심각한 상황에서 넥타이의 날름대는 모습이 더 웃음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영화 ‘베티 블루’의 주인공 베티와 조르그는 지인 에디의 모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모친의 시신을 보고 오열하는 에디 옆에서 갑자기 베티는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 웃음은 심각한 상황 자체가 유발한 것이다. 조르그 역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웃는다. 심지어 에디 또한 웃음을 참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사람인 엄마의 시신 앞에서 터무니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이 심각한 상황에 웃음이 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이 비정상적인 인간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저급한 사람만이 이러한 상황에서 웃는 것일까? 망자에 대한 배려, 슬픔에 처한 유족에 대한 예의, 사회적 규범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어느 순간 이것이 터무니없는 허상이자 가식이라는 ‘허무함’이 밀려올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인간은 원래 결함투성이며 저급하다. 인간이 사는 현실 세계 또한 저급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겉으로 무질서해 보이는 현실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질서와 체계가 있다고 믿었다. 예술이란 현실의 겉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바로 이렇게 감춰진 아름다운 질서의 세계를 모방(미메시스)하는 것이라 봤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매체로 간주됐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믿음을 상실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세계의 배후를 아무리 파헤쳐봐도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움이 감춰져 있으리라는 믿음은 어리석은 가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20세기 이후 예술은 아름다운 가상 대신 현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세상에는 깔끔한 의복과 정돈된 상점, 세련된 가구와 질서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온갖 구토물과 배설물, 욕정과 이유 없는 살인, 폭력이 존재한다. 그것은 저급한 것이지만 결코 완전히 감추거나 추방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체계와 질서, 세련됨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어떤 이유도 없이 ‘순삭(순간 삭제)’시키는 ‘빌어먹을 병신 같은 곳’이기도 하다. 저급함과 병맛은 단순히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반항이 아니다. 저급함과 병맛 자체가 현실의 민낯이다.


병맛을 위한 변론, 병맛은 ‘저급한 유물론’이다

병맛 문화를 접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저급한 유물론(base materialism, 밑바닥 유물론)’이다. 이 개념은 프랑스의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 Bataille, 1897∼1962)가 사용한 용어다. 여기서 ‘저급한(base)’이라는 수식어는 양가적이다. 말 그대로 고급의 반대로서 저급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밑바닥’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밑바닥은 근저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기도 하다. ‘병맛’ 역시 다르지 않다. ‘병신맛’의 약자인 병맛은 말 그대로 병신 같은 하찮고 저급한 맛을 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병맛에는 고상한 것들 역시 밑바닥까지 들추면 병맛에 지나지 않는다는 냉소가 전제돼 있다.



바타이유는 저급한 것이야말로 세상의 기저(밑바닥)로 봤는데, 그 실상은 어떤 것으로 정형화할 수 없는 ‘무정형(informe)’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예술은 아름다움의 가상을 만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용인을 받는 행위에 불과하다. 마네가 그린 ‘풀밭 위의 식사’는 외설로 지탄의 대상이 됐지만 그 그림의 모티브가 됐던 조르지오네의 ‘전원의 합주’는 예술 작품으로 찬양받았다. 여성의 누드를 대담하게 그린 두 그림의 차이는 그 여성이 신화 속의 여신인가 혹은 일상인인가에 불과하다. 외설과 예술을 가르는 기준은 그것이 용납될 수 있는 알리바이를 지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에 불과하다. 그 밑바닥에는 똑같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타이유의 저급한 유물론은 예술작품을 배설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설물에는 우리가 고상하게 생각하는 특정한 형태라든지 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바타이유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미술이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의 조각 작품을 저급한 유물론의 한 사례로 꼽는다. 그중에서도 폰타나의 ‘공간 도자기(Ceramica speziale, 1949)’는 폰타나의 저급한 유물론을 대표한다.(그림 2)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는 얼핏 직육면체의 사각형 모양이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아무렇게나 반죽을 한 것처럼 표면이 불규칙하며 울퉁불퉁하고 휘감긴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어떤 서사(의미)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크라우스의 말대로라면 이 작품은 서사의 마지막 흔적까지 제거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서구의 공간 개념을 지탱하던 기하학마저 마치 똥 덩어리 마냥 뭉개진 입방체의 모양으로 짓눌려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반죽된 이 조각물은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퇴행적인 모습을 띤다.

이러한 퇴행성은 크라우스가 저급한 예술을 추구하는 다른 예술가와 달리 폰타나를 높이 취급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예술을 처음부터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로 나누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았다. 가령, 앤디 워홀과 같은 팝 아티스트들은 애초에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대중예술)을 구분하고 저급 예술을 고급 예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팝아트의 대표적인 전략이다. 그렇기 때문에 팝아티스트들은 항상 자신들의 예술이 대중적인 이미지나 소재를 사용하지만 결코 저급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아티스트라고 자부한다. 팝아티스트들은 대중예술가들과 고급 예술가들로 나누는 것을 거부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엔터테이너와 같은 대중예술가로 취급하는 데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게 반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 그들은 대중예술가인 척하지만 항상 스스로가 아티스트임을 내세운다. 폰타나의 작업은 이러한 자가당착적인 이분법에 빠지지 않으며 순수하게 저급한 취향에 몰두할 따름
이다.

사실 팝아티스트는 태생 자체가 이중적이다. 앤디 워홀뿐만 아니라 조영남이건, 낸시랭이건 팝아티스트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엔터테이너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말한다. 그러나 팝아티스트들에게서 결코 찾을 수 없는 퇴행성, 즉 말로만 외치는 퇴행성이 아닌 ‘진정한 퇴행성’이 폰타나에게 발견된다. 팝아티스트들은 결코 저급하지 않다. 그들은 앤디 워홀이 그러하였듯 지나칠 정도로 계산적이다.



병맛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인 조석에게서도 폰타나와 같은 퇴행성이 분명하게 발견된다. 병맛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가 존재하겠지만 조석의 ‘마음의 소리’에서 병맛을 이루는 부정할 수 없는 요소 중의 하나가 병맛 그림체다.(그림 3) 그가 주인공의 얼굴을 사각형 혹은 입방체의 기하학 형태로 그리는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이 그림체가 폰타나의 조각만큼이나 퇴행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과장된 크기를 지닌 기하학적인 얼굴은 폰타나의 작품처럼 똥 덩어리 같지는 않지만 시루판에 눌린 한 덩어리의 떡과 같다. 그런 점에서 폰타나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듯한 기하학적 공간, 즉 완벽한 데생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만화의 공간은 짓눌린다. 억지로 아마추어 흉내를 내거나 저급해 보이려고 애쓴 것이 아닌 순수한 퇴행의 흔적이 조석의 만화에 나타나는 것이다. 병맛의 원천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순수한 퇴행성이다.

물론 이러한 퇴행성이 반드시 아마추어에게서만 나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조석과 더불어 병맛의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이말년의 경우 만화가 건성체로 그려졌지만 잘 들여다보면 선이나 형태가 매우 정교하고 힘이 있다. 가령 ‘불타는 버스’만 하더라도 얼핏 보면 매우 성의 없이 그린 그림 같지만 힘 있는 선은 간결하지만 명확한 실루엣을 나타내며 구도 역시 자질구레한 요소가 생략됐을 뿐 치밀하다. 그렇다고 이말년의 그림체가 퇴행적이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그림은 힘이 있지만 아카데믹한 제도권 만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의 만화는 기교적으로 완성된 기성작가의 그림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습작의 단계에 들어선 만화지망생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구성이 아닌 그림체에 있어서만큼은 병맛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저급함은 병맛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다. 여기서 저급함은 가식적인 저급함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 있는 저급함이다. 사람들이 병맛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치장과 격식에 대한 실증과 그것이 주는 피로함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다. 병맛 또한 치장과 격식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면 금방 실증과 피로를 느끼게 될 것이다. 저급한 유물론의 핵심도 이것이다. 바타이유가 말하는 저급함의 유물론은 삶의 밑바닥이 있는 진정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진정성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다. 이 바닥의 모습은 마치 오물이나 배설물처럼 일정한 형태로 그려낼 수 없는 ‘무정형’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고급스러운 예술작품들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가상들이 진정한 바닥의 형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병맛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일수록 혹은 더 고상한 것일수록 그것의 가상적이고 허위적인 모습이 드러날 때 병맛의 가치가 높아진다. 어쩌면 병맛의 병은 가식을 통쾌하게 날려버리는 ‘사이다’ 병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병맛의 기승전병 구조, 꼰대를 넘다

‘원펀맨(One Punch Man)’은 일본의 슈퍼히어로 만화이자 애니메이션이다.(그림 4) 이 만화는 고전적인 슈퍼히어로 물과는 내용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주인공 사이마타는 원래 취업준비생이었지만 우연히 거리에서 괴수를 만나 어릴 때부터 자신의 꿈이 슈퍼히어로임을 깨닫고 대머리가 될 정도의 엄청난 노력 끝에 초인적인 힘을 지닌 슈퍼히어로가 된다. ‘원펀(치)맨’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엄청난 힘은 우주의 어떤 괴수도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다. 사이마타는 그의 꿈을 이뤘지만 결코 만족스럽지 않다. 아무리 막강한 괴수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한 방에 공중분해 돼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존중이니, 세상을 구할 사명이니 하는 따위의 도덕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슈퍼히어로라고 하는 원펀맨의 생김새는 더 가관이다. 대머리에 밋밋한 눈, 내복을 걸친 듯한 그의 모습은 슈퍼히어로의 전형이라기보다는 키치스럽고 병신맛이 난다. 게다가 그는 단지 취미로 슈퍼히어로를 할 뿐이다. 한마디로 재미 삼아 슈퍼히어로를 한다. 그런데 실상 사이마타는 슈퍼히어로라는 자신의 취미생활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자신이 워낙 강해서 적들이 단 한 방에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취미로서는 너무 시시하며 놀이가 응당 주어야 할 긴장감이 전혀 없다. 그가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괴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긴장시키고 쫄깃한 스릴을 느끼게 만드는 엄청난 괴수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바람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어떤 괴수도 허무하게 한 방에 날아간다.



이 작품은 이른바 기승전병의 병맛 구조를 전형적으로 띠고 있다. 매 편에 괴수가 출현하는 과정이나 이야기의 전개는 그럴싸하며 나름 매우 치밀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괴수들의 행위가 주인공보다 더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가령 어느 한 괴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못된 부자와 권력가를 혐오하며 그들의 부가 축적된 엄청난 규모의 빌딩만을 골라 단숨에 파괴해버린다. 어처구니없게 실수로 다른 빌딩을 착각해 그것을 날려버리기도 한다. 괴수는 그러한 실수가 오류를 통해 자신이 더 조심할 수 있는 교훈을 주는 과정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가난한 자를 위한다면서 단숨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엄청난 클래스를 보여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의식주가 해결될 수 있는 날까지 깽판을 치겠다고 선언하며 파괴를 일삼는다. 괴수의 말에는 묘하게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원펀맨을 만나 단 한 순간 펀치 한 방으로 종식된다. 항상 그렇듯이 병신 같은 결말이 독자를 내리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썰렁한 병맛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기승전병’의 위력은 ‘결’(론)이 빠졌다는 것에 있다. 결론은 기승전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며 그 목적지의 대부분은 참된 세상이니, 올바른 행위니 하는 도덕적인 교훈이다. 한마디로 기승전결은 ‘선생질’의 전형적인 구조다. 학생들에게 선생님의 폭력보다 더 싫은 것이 있다면 선생님이 쏟아붓는 교훈과 덕담일 것이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존재한다. 사회화가 미리 정해진 제도와 관습을 우리의 몸에 익히는 과정이라면 문화와 놀이는 그것을 강제가 아닌 자율적인 형식으로 체화하는 과정이다. 인간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인간에게는 꼰대가 따라붙는다. 심지어 자유를 추구하는 예술 역시 선생질을 멈추지 않는다. 하다못해 혼란스러워 보이는 추상화나 어린아이 장난과 같은 그림 속에도 서사가 숨겨져 있고 기승전결이 있다.

예술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버크, 앤서니 샤프츠베리 같은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취미(taste)’라고 불렀는데, 이 취미라는 것도 학습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물론 예술을 판별할 수 있는 자질은 누구나 타고 난다. 그러나 그 자질은 학습을 통해서 발휘된다. 이는 동물과 달리 인간이면 ‘101+101=202’라는 수학적 계산을 할 수 있는 자질을 타고 나지만 그 자질이 교사의 학습을 통해서 발현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치 난잡한 선과 형상, 색이 혼란스럽게 뒤덮인 것처럼 보이는 칸딘스키의 추상화도 의미가 숨겨진 퍼즐이다. 그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서 퍼즐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때 비로소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고상한 ‘취미’가 발휘될 수 있다.

그러나 기승전병의 병맛 구조는 이야기나 작품을 이루는 조각들이 퍼즐처럼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병맛 작품 중에는 ‘기승전병’이 아닌 ‘병병병병’의 구조를 띠는 작품도 있다. 그러니 병맛 작품에서 퍼즐을 완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혹시라도 우연히 조각이 맞아떨어져서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하더라도 맞춰진 퍼즐에는 숨겨진 의미가 없다. 무의미와 우발성만이 발견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병맛 작품은 애초에 선생질이 불가능하다. 전달해야 할 결론이 없으므로 가르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병맛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하는 작품들이 발견되는데 이런 작품들은 여지없이 나쁜 선생질의 사례로서 지탄의 대상이 된다. 대표적인 병맛 작가들조차도 간혹 초심을 잃고 작가가 되려는 양태를 보이자 바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병맛 구조의 원조를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t)’로 소급하는 것이 완전한 억지는 아니다. 이 연극에서 주인공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며 쓸데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의 대사와 행위는 모두 고도를 기다리는 과정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오지 않는다. 우발적으로 못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오지 않는 것으로 전제돼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연극은 고도의 도래라는 결론을 향하지만 그러한 결론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허무하게 끝난다. 베케트는 이 연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꼰대문화에 익숙한 대부분의 사람은 이 연극 속에 어떤 심층적이고도 고상한 의미가 숨겨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으려 한다. 작품의 결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뿐더러 비싼 돈을 주고 객석에 앉아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고도의 존재가 더 중요해지지만 그럴수록 연극의 결말은 더 허무하다. 사람들이 이 병신 같은 허무한 결말 속에서 무엇인가 심각한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병신 같은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병맛을 제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현실 자체가 부조리한 병맛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병맛은 현실을 뒤틀고 서사를 왜곡한 작품에서 만들어진 인위적 효과가 아닌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현실의 맛이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현실을 과장하거나 서사를 왜곡한 것이 아닌 부조리한 현실 자체, 즉 현실의 원래 맛인 병맛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터넷 허무주의가 만든 병맛 문화

병맛 문화는 인터넷 환경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병맛의 발생지인 웹툰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병맛 광고나 선전도 인터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병맛 광고의 경우 ‘짤방(짤림 방지의 줄임말, 아무런 상관없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올리는 것)’이나 ‘급식체(급식을 먹는 세대인 10대들이 자주 사용하는 문체)’가 주로 사용되며 밑도 끝도 없이 제품을 강조하거나 기승전결이 무시된다. 짤방, 급식체, 기승전결을 무시한 단편적인 글들의 나열은 모두 인터넷이나 SNS 문화가 만들어낸 문화적 특성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병맛과 인터넷의 개연적 연관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만 보더라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다만 인터넷의 어떠한 특성이 병맛 문화와 관련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달리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연관성은 인터넷의 소비층이 유년층까지 포함하는 등 어려지면서 깊이보다는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임팩트가 강한 내용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정보 전달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신속성을 위해 약자를 자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인터넷 매체가 가져온 또 근본적인 특징이 있다. 인터넷은 과거의 매체와 달리 엄청난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여기서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 있다. 데이터와 정보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데이터는 말 그대로 데이터이며 그 자체가 정보는 아니다. 가령 내 키와 몸무게, 소유한 옷의 개수와 색상은 데이터일 뿐 그 자체로서는 정보가 아니다. 이 모든 데이터는 의류판매자가 옷과 관련지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 정보가 된다. 이 데이터들은 내게 어떤 사이즈의, 어떤 색상의 옷을 추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되는 것이다.

정보는 데이터 자체가 아니라 어떤 맥락에 따라 다른 데이터와 연결 짓거나 의미를 부여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터넷은 과거의 어떤 매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데이터가 축적된 매체다. 빅데이터 기술 덕택에 인터넷의 데이터 크기는 더 방대해졌다. 그러나 데이터가 많아졌다고 해서 정보가 많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인터넷의 특징이다.

여기서 데이터가 많아지는데 어떻게 정보가 줄어들 수 있느냐는 반문이 생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회화의 사례를 통해 우회적으로 답할 수 있다. 미국의 미술사가 스베틀라나 앨퍼스(Svetlana Alpers)는 『묘사의 예술(The Art of Describing: Dutch Art in the Seventeenth Century)』이라는 책에서 17세기 회화의 특징을 ‘묘사’로 정의한다. 이때 ‘묘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특성을 나타내는 ‘서사(narration)’와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된다. ‘서사’란 말 그대로 화면을 이야기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화면의 중심이 돼야 한다. 나머지 인물은 주인공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며, 이야기와 상관없는 자질구레한 배경이나 사물들은 모두 제거돼야 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은 원근법 장치를 통해서 주인공의 얼굴 혹은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으로써 관객은 화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림은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에 반해 네덜란드의 회화는 어느 한 특정 지점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으며 이야기를 위해서 불필요한 부분을 생략하지 않는다. 앨퍼스 말에 따르면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는 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중산층 가정을 묘사한 피테르 데 호흐(Pieter de Hooch, 1629∼1684)의 작품만 보더라도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그림 5)

이 그림은 당시 네덜란드 가정의 실내를 잘 드러낸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안주인의 모습과 거실의 세세한 장식들, 그리고 중간 복도와 저 멀리서 청소하고 있는 하인의 모습까지 화가는 어느 하나 생략하지 않고 꼼꼼하게 현실을 묘사한다. 한마디로 화가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이 그림에서 화가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그림이 피아노를 치는 여성을 그리고자 한 것인지, 멀리 있는 하녀를 그리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단란한 가정을 묘사하고자 한 것인지 알기 힘들다. 그림에 채워진 데이터의 과잉이 정보를 실종시켜버린 것이다.

설혹 화가가 연주하는 안주인이 이 그림의 메시지이자 정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데이터의 과잉 탓이다. 정보란 난수표에서 필요한 숫자만 걸러내듯이 불필요한 데이터(숫자)를 제거해야만 가능하지만 인터넷은 데이터의 과잉 상태에 있으므로 쉽게 걸러낼 수 없다. 인터넷의 엄청난 데이터들은 알고리즘에 의해서 걸러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 공간에서는 알고리즘에 의해 걸러진 의미 있는 정보 외에도 정보화되지 않은 온갖 데이터(쓰레기)들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독일의 미술가 슈비터스(Kurt Schwitters, 1987∼1948)는 일상에서 추방된, 이른바 쓰레기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었다. ‘정크아트(Junk Art)’로 불리는 저급 예술이다. 그러나 이 예술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일상의 현실세계란 원래 과잉의 상태, 즉 쓰레기의 상태이며 예술은 그런 쓰레기를 쌓아 올린 허구적인 서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예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튼튼한 서사가 구축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데이터의 제거가 필수적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란 규칙적인 배음만 남기고 불필요한 배음들을 제거한 악기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악기는 현실에 존재하는 소리와는 전혀 딴판의 인위적인 소리다. 아름다운 소리는 현실의 복잡한 음들, 즉 무수한 음들의 데이터가 제거된 인위적인 서사의 산물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현실의 소리들은 화음이나 선율이라는 음악적 서사를 결여한 소음들이다. 이렇게 화음과 멜로디라는 서사가 결여된 소리야말로 현실의 소리이자 일상의 소리다. 현실 세계에서 소리는 항상 과잉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음악적 서사를 이루지 못할뿐더러 우리에게 음악적 정보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음악적 서사란 하나의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충실하게 담으면 담을수록 서사는 붕괴한다. 인터넷의 엄청난 데이터양은 항상 과잉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는 현실 자체가 아니라 서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에 불과하다.

서사와 진지함, 세련된 고급문화를 비웃는 병맛의 허무주의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하나의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동시에 쓰레기 과잉상태인 인터넷 환경의 충실한 반영물이기도 하다. 동시에 병맛은 지금까지 서사와 세련된 형식, 아름다운 가상으로 치장된 현실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병맛에 대한 열광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 환경에 대한 열광이기도 하다. 그러나 병맛 또한 반복되면 매너리즘으로 전락해 사람들이 싫증을 내게 될 것이다.


병맛과 B급 문화

배우 김영철은 광고에서 햄버거 프랜차이즈 가게에 들어와 불쑥 ‘4달라’를 외쳤다. 그는 이 병맛 연기로 단번에 유명해졌다. ‘기승전 4달라’라는 병맛 구조, 웹툰을 연상시키는 자막, 급식체의 사용은 병맛을 배가한다. 이는 병맛 문화가 ‘인싸(인사이드) 문화’ 혹은 소수의 컬트문화를 넘어 메이저 문화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례다. 동시에 이 광고는 병맛이 흔히 말하는 ‘B급 문화’의 한 형태로서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문화를 넘어 보편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미 병맛은 주류문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올해 최대의 관객 수를 기록한 ‘극한직업’만 하더라도 병맛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인 ‘기생충’에서도 병맛 코드가 지배적으로 영화를 이끈다. 병맛 문화는 알게 모르게 보편화됐다.

B급 문화는 B급 영화에서 유래했다. B급 영화는 미국 메이저 영화사들이 매출을 위해 동시 상영 영화를 만들면서 시작했다. 동시 상영을 위해 많은 편수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제작사는 저예산의 B급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B급 영화가 질이 떨어지는 저급한 영화를 의미하는 상징어가 된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B급 영화 감독 중 일부는 비록 저예산이기는 했지만 치밀한 구성이나 영화적 완성도, 대중적 취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B급 영화만의 장점을 살려서 실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물론 열악한 자본 탓에 완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열악하지만 자유로운 이 역설적인 상황이 B급 영화만의 독특한 문법 구조, 저급하지만 실험적이며, 엉뚱하지만 흥미로우며, 기괴하지만 그럴싸한 구조가 형성됐다. 이는 탄탄한 서사나 치밀한 완성도에 염증난 일부 관객을 열광시키는 컬트문화로 발전되기도 했으며, 이른바 그들만의 인싸 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제 B급이라는 수식어는 영화만이 아니라 B급 문화라는 용어처럼 문화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B급 문화가 단순히 비주류의 저급한 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 이미 보편적으로 공인된 제도권 문화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박찬욱의 영화는 영화제에서 수상을 받고 전 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지만 B급 문화의 요소가 다분하다. 그가 스스로 항상 B급 영화에 흥미를 느꼈으며 그것을 지향했다는 것은 과거 인터뷰에서도 알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기생충’은 계층의 갈등과 보이지 않는 벽을 치밀하고도 암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는 계급 갈등이라는 거대 담론보다는 그 자체를 비웃는 허무한 병맛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개연성이 떨어지는 사건들이 연속될 뿐만 아니라 부잣집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부자가 돼 그 집을 사겠다는 아들의 결심 역시 병맛 같은 결론이다.

영화는 병맛 웹툰 못지않게 기승전병이 아닌 병병병병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생충’의 최종심급이 계급장벽이라는 거대 담론인지, 병맛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어쩌면 이런 모호함, 즉 A도 아닌, B도 아닌 경계선에 걸친 독특함이 심사자들을 매료시켰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기생충’이 B급 영화는 아니지만 이미 B급 문화의 요소가 지배적인 영화라는 점이다.

병맛은 치밀한 서사나 완성도를 거부하는 B급 문화의 일종이다. B급 문화가 앞서 언급한 중세시대의 ‘포벨 이야기’처럼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면 병맛은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B급 문화다. 포벨 이야기가 다소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기존의 서사를 비틀고 왜곡함으로써 현실을 풍자했다면 병맛은 그러한 서사 자체를 희화화하고 있다.

데이터 과잉의 매체 환경에 처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서사에 부딪치며 그것을 강요당한다. 병맛은 서사 자체를 불신한다. 그것은 꼰대의 문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병맛은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매우 독특한 B급 문화다. 그러나 병맛의 이러한 독특함은 그것이 B급 문화 일반에 포섭됨으로써 하나의 독특한 스타일로 희석될 가능성이 크다. ‘4달라 광고’나 봉준호 영화의 성공은 이미 그러한 가능성을 어느 정도 암시하는 듯하다. 영화 ‘극한직업’ 역시 병맛이 보편적인 개그코드로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자본은 새로운 대중의 취향을 끊임없이 저격할 것이다. 병맛 문화 역시 그러한 자본의 전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필자소개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1호 Local Creator 2019년 9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