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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ble Management

묻고 의심하라, 그래야 틀을 바꾼다

박영규 | 272호 (2019년 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거대한 변화를 이끄는 힘의 원천은 인간의 의구심이다. 관습과 기성적 틀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하는 의문이야말로 발전과 진전의 원동력이다. 장자 역시 책의 가장 처음에 대붕이라는 큰 새를 등장시켜 기존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한 아마존이나 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예견한 앨빈 토플러 사례에서도 마찬가지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편집자주
몇 세대를 거치며 꾸준히 읽혀 온 고전에는 강렬한 통찰과 풍성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삶에 적용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인문학자 박영규 교수가 고전에서 길어 올린 옹골진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4차 산업혁명은 패러다임 혁명이다. 4는 단순한 아라비아 숫자 하나에 불과하지만 거기에는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는 엄청난 변화가 내포돼 있다.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 블록체인과 같은 새로운 기술들이 산업화시대와 정보화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정치, 경제, 금융, 유통 등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 변화도 잰걸음을 하고 있다.

가장 첨예한 기술적 변화는 컴퓨터의 혁명적인 변신에서 감지된다. 정보처리 속도와 연산능력에서 디지털 시대의 슈퍼컴퓨터를 수천 배 능가하는 양자컴퓨터의 탄생이 점점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세기를 달리하는 역사시대에는 호모 사피엔스의 단독 플레이가 아니라 특이점(Singularity)을 통과한 양자컴퓨터 알고리즘과 인간의 협업체계에 의한 문명이 창조, 파괴, 재건될 것임을 예고하는 과학자들의 거시적 전망이 줄을 잇고 있다. 거대한 변화를 이끄는 힘의 원천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인간의 의구심이다. 신본(神本)주의에 대한 의심이 근대 과학혁명과 인본(人本)주의를 탄생시켰듯 인간의 영혼과 뇌, 의식과 감정에 대한 생물학적 의심이 나노과학과 생명공학, 인공지능을 탄생시켰다. 양자컴퓨터의 탄생도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반도체의 크기와 용량의 한계에 대한 의문이 그 시발점이었고, 이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재촉하는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관습과 기성적 틀, 표준에 자신을 맡긴 채 가만히 있으면 편안하다. 하지만 발전이 없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 네트워크, 인간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변화, 발전, 도약의 발판을 만들 수 있다. 뉴턴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왜?’라는 의문부호를 붙이지 않았더라면 『프린키피아』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근대 과학혁명의 탄생도 늦어졌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제도에서 발견한 핀치라는 새의 부리 모양을 보고 ‘왜 핀치의 부리는 다른 새들의 부리와 다를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며 생물학과 자연사학에서의 패러다임 시프트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뢴트겐의 X선 발견, 패러데이의 전기장 발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닐스 보어의 양자도약도 모두 의심에서 비롯됐다.

익숙함에 의문부호를 붙이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근육 속에 내재된 관성적인 DNA 때문이기도 하고,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말하는 문화적 아비투스(Habitus)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만히 있으면 본전은 하는데 괜히 의문을 제기했다가 왕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기요, 질문 있는데요” 하고 손을 번쩍 드는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러나 질문이 없으면 답도 없다. 조직이 정체되는 것은 익숙한 제도와 정책, 의사결정 방식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구 중심의 천문학 체계가 태양 중심의 천문학 체계로 바뀌는 데 천 년의 세월이 걸렸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가 의문을 봉쇄하고 침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교황청의 권위에 의문을 던지면서 비로소 새로운 세계관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편으로 구성된 두꺼운 『장자』 책을 펼칠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우화가 대붕(大鵬) 이야기다.


北冥有魚(북명유어) 其名爲鯤(기명위곤)
鯤之大(곤지대) 不知其幾千里也(부지기기천리야)
化而爲鳥(화이위조) 其名爲鵬(기명위붕)
鵬之背(붕지배) 不知其幾千里也(부지기기천리야)
鵬之徙於南冥也(붕지사어남명야) 水擊三千里(수격삼천리)
去以六月息者也(거이육월식자야)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워낙 커서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짝도 워낙 넓어 그것이 몇천 리에 이르는지 알 수가 없다. 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무려 삼천 리에 달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구만 리나 올라가며 육 개월을 날아가서야 비로소 쉰다. - 『장자』 ‘소요유’ 편


책 들머리에서 대붕이라는 새를 등장하게 한 장자의 의도는 무엇일까? 덩치가 크고 멀리 나는 새의 웅장함에 빗대서 ‘꿈을 크게 갖고 멀리 내다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일까? 그렇게 해석해 볼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자』는 단순한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장자가 대붕을 등장시킨 의도는 세계관의 혁명적 변화를 역설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새롭게 보고 그를 통해 절대적인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푹 젖어 있는 시공간적 환경과 기성적 사고의 틀을 종합적으로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뒤집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편견, 좁은 시야에 갇힌 상태에서는 그러한 인식의 전복(顚覆)이 불가능하다. 장자는 가장 먼저 대붕이라는 큰 새를 등장시켜 공간적 한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대붕은 우주의 넓은 공간으로 가서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해주는 수단이다. 우주선을 타고 멀리 날아가 지구를 바라볼 때 지구의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할 수 있듯이 대붕을 타고 구만 리 창공으로 날아가면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대붕은 말하자면 현대의 우주선인 셈이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을 보면 장자의 이러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天之蒼蒼(천지창창) 其正色邪(기정색야)
其遠而無所至極邪(기원이무소지극야)
其視下也(기시하야) 亦若是則已矣(역약시칙이의)

하늘빛이 푸른 것은 하늘의 색깔이 원래 푸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대붕을 타고 구만리 창공으로 날아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똑같이 푸르게 보일 것이다. - 『장자』 ‘소요유’ 편


하늘이 푸르게 보이는 것은 인간의 시야가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며 대붕을 타고 날아가 넓은 우주 공간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비로소 그러한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설명이다. 『장자』 ‘추수’ 편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도 공간적 한계에 갇힌 인간의 편협한 시야를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井蛙(정와) 不可以語於海(불가이어어해)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패러다임 시프트를 위해서는 공간적 한계뿐만 아니라 시간적 한계도 극복해야 한다. 대붕 이야기에 이어지는 다음 우화를 통해 장자의 가르침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무엇으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조균(朝菌)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가을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짧은 수명의 예이다. 옛날 상고시대에 대춘(大椿)이라는 나무가 있었으니 8000년을 봄으로 하고 8000년을 가을로 삼았다. 팽조(彭祖)는 지금 장수(長壽)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며 세상 사람들은 팽조처럼 오래 살려고 기를 쓴다. 8000년을 사는 대춘도 있는데, 기껏 몇백 년을 살려고 발버둥을 치다니 참으로 어리석지 아니한가? - 『장자』 ‘소요유’ 편


하루라는 시간적 한계에 갇힌 조균(朝菌)은 한 달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알지 못하며 여름 한 철을 살다 가는 쓰르라미는 봄가을이라는 또 다른 계절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팽조라는 사람이 오래 산다고 자랑하지만 8000년을 사는 대춘(大椿) 나무에는 견줄 수가 없다. 장자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하루나 한 달, 일 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장자가 볼 때 시간은 분절적이지 않으며 통시적으로 존재한다. 세상 만물은 시간이라는 함수에서 볼 때 상대적이다. 대춘이 8000년을 산다고 하지만 그 또한 수십억 년이라는 우주의 역사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1년이라는 시간을 10년으로 늘릴 수도 있고, 100년으로 늘릴 수도 있다. 기업을 혁신적이고 스마트한 조직으로 업그레이드하면 그 시간을 더욱더 길게 늘일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 체인지를 위한 마지막 과제는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지식은 자기중심적 사고, 편견, 기성적 가르침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장자는 ‘추수’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曲士不可以語於道者(곡사불가이어어도자) 束於敎也(속어교야) 시각이 비뚤어진 편협한 사람에게는 도에 대해 말할 수 없으니 이는 그가 기성적 가르침에 속박돼 있기 때문이다.”

‘변무’ 편에서 장자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小惑易方(소혹역방) 大惑易性(대혹역성) 작게 의심하면 방향을 바꾸지만 크게 의심하면 성질을 바꾼다.” 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방향 전환이 아니라 산업의 성격, 세상의 존재방식, 문명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패러다임 시프트다. 『장자』에 등장하는 대붕과 창공, 우물 속 개구리, 넓은 바다 등은 패러다임 시프트를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들이다.

장자가 살던 시대의 패러다임은 유교적 패러다임이었다. 유교는 세상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권력과 복종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나눠서 사람과 사회를 그 틀 속에 가뒀다. 장자는 이 틀을 거부했다. 창의적 사고와 혁신적 통찰이 가능하려면 이러한 차별적 시각을 버리고 인간과 사물, 세상을 통합적, 우주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었다. 정상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절름발이와 꼽추가 『장자』 곳곳에 등장하는 것도 사회적 통념을 뒤집기 위한 장자만의 독특한 전략이었다.

앨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라는 책에서 미래에는 부의 심층 기반(deep fundamentals)과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며 기업과 사람들이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 지식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앨빈 토플러는 ‘9 to 5’로 상징되는 산업시대 표준시의 파괴, GPS 주도로 이뤄지는 공간의 통합, 쓰레기 같은 무용한 지식(obsolete knowledge)의 축적 속도가 빨라지는 현상 등을 사례로 들면서 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면밀하게 관찰한다. 앨빈 토플러가 『장자』를 읽고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패러다임 시프트에 대한 분석틀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실리콘밸리의 창조적 기업들 가운데 특히 아마존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끌고 있는 대표주자다. 아마존을 설립한 제프 베이조스는 장자와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시간과 공간, 지식의 한계를 뛰어넘었으며 이를 통해 혁신적인 플랫폼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제프 베이조스는 물건을 사고파는 기존의 상품 판매 사이트뿐만 아니라 게임 사이트, 음악 사이트와 같은 비(非)판매 사이트들도 모두 매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마존에 별도의 장터를 만들어 개별 판매자들이 자기 상품을 24시간 내내 판매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극복했다. 아마존 고(Amazon Go)라는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쇼핑한 물건을 계산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가져나갈 수 있게 함으로써 기존의 상식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마존 고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카트에 실은 채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센서가 고객의 가방과 앱을 스캐닝해서 자동으로 계산을 해주기 때문이다.

기존 권위에 의문을 던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은 패러다임 시프트의 모멘텀을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 장자와 제프 베이조스의 공통점은 그들이 삐걱거리는 전통적 권위와 질서에 큰 의문부호를 붙이고 새로운 것으로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도전했다. 장자가 대붕에서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다면 평생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을 것이며 제프 베이조스가 실험정신을 중도에 버렸더라면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제치고 세계 1위의 부호로 등극하지 못했을 것이다. 의심하고 도전하는 자만이 4차 산업혁명 시대 패러다임 시프트의 주역이 될 수 있다.


필자소개 박영규 인문학자 chamnet21@hanmail.net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 교수, 중부대 초빙 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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