畵中有訓

바이칼호 칼바람도 못 꺾은 恩愛

196호 (2016년 3월 lssue 1)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양 치는 소무(蘇武)

 

한 남자와 양 두 마리가 산기슭에 있는 그림이다. 산기슭 아래로 펼쳐진 시퍼런 물은 북해(北海), 즉 러시아의 바이칼호다. 지금은 멋지고 너른 호수로 유명해 누구라고 구경을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지만 그림 속 시절은 한나라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 시기라 지금과 상황이 사뭇 다르다. 천한(天漢) 원년, 즉 기원전 100년에 한나라의 중랑장(中郞將, 무관직-역주)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나라 간 충돌이 일면서 그만 흉노에게 억류됐다. 그리고 그림과 같이 바이칼호 부근의 적막한 땅에 내몰려졌다. 양들은 모두 숫양이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單于)는 소무를 흉노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회유도 해보고 모진 협박도 했지만 소무는 거절했다. 이에 소무를 이러한 황량한 땅으로 내쫓고 숫양을 주어 키우도록 했다. 선우는 소무에게 숫양에게 젖이 나면 소무를 한나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했다. <한서(漢書)>소무전(蘇武傳)’에 기록된 이야기다. 소무는 오갈 데 없는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버려진 것이다. 목가적으로 보이는 이 그림의 사연은 이처럼 참담하다. 제목은소무간양蘇武看羊, 소무가 양을 보다이다.

 

양기성(梁箕星), ‘소무간양(蘇武看羊, 소무가 양을 보다)’, 18세기, 종이에 설색, 38.0 x 30.3, <만고기관(萬古奇觀)>, 삼성리움미술관.

 

 

이릉(李陵)과 헤어지다

 

당시 한나라와 흉노의 충돌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한나라 장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이릉이다. 이릉은 5000의 군대로 8만의 흉노족을 대적해 8일 동안 밤낮없이 싸워 승리를 이끄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지친 병사들은 흉노족의 재공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릉은 결국 항복했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는 이릉을 잘 대우했다. 또 이릉을 소무에게 보내 항복을 설득하도록 했다. 이릉과 소무는 원래 벗이었는데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재회하게 된 셈이다. 북방오랑캐에 항복해 연명하다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고생하다 죽을 것인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기는 어려운 상황, 소무는 이릉의 손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치마까지 다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서로 손을 잡고 강의 다리에 오르니 나그네들 저문 날 어디로 갈 것인가(携手上河梁, 遊子暮何之).”

 

그들이 나눈 시구는 이후 문인들에게 수없이 인용됐다. 소무와 이릉은 헤어지며 갈라섰다. 이릉은 흉노족의 사회로 돌아갔고, 소무는 바이칼호에 남았다.

 

19년 후

 

소무는 허허벌판에서 죽지 않고 버텼다. 목이 마르면 눈을 쪼개 먹고, 배가 고프면 가죽옷을 씹거나 풀뿌리를 씹으면서 혹한(酷寒)의 바람을 견뎌냈다. 19년이 지난 후 한나라 무제의 아들 소제(昭帝)가 황제로 즉위했고 그는 흉노와 화친(和親)을 맺었다. 소제는 사신을 보내 소무를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흉노의 왕은 소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한나라의 사신이 대응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우리 황제께서 상림원(황제의 동산)에서 사냥을 하시다가 활로 기러기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기러기 발목에 비단 헝겊이 감겨 있었지요. 그 비단에는소무가 대택(大澤, 큰 연못) 근처에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소무가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닙니까?”

 

이 말에 선우는 몹시 당황해 소무를 데려오도록 했다. 소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항복해 흉노에 살고 있던 한나라 사람이 사신에게 몰래 알려줬기에 사신은 자신 있게 기지를 발휘해서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소무는 몰골 노인이 돼 나타났다. 그러나 그 손에는 한나라 사신의 증표인 부절(符節)이 들려 있었다. 그림을 보면 양을 치는 소무가 손에 들고 있는 붉은 깃발이 다시 보일 것이다.

 

무엇으로 버텼나

 

소무는 그 세월을 시베리아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돼 벌판에 버려졌으니 억울하고 애통해 화병으로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중국의 시문집으로 진(() 이후 제(()대의 대표적인 시문을 모아 엮은 책

<문선(文選)>에는 소무의 시와 이릉의 시가 모두 실려 있다.

 

“피곤한 군사들과 거듭 싸우며 한 사람이 천 명의 적군을 당해냈지[疲兵再戰 一以當千]”라는 이릉의 글은 커다란 공을 세우고도 결국 항복해 즐거움도 모르는 채 살다간 그 사연이 몹시 애절하다. 그러나머리를 올리고 부부인연 맺은 뒤로 둘 사이에 은애를 의심하지 않았노라[結髮爲夫妻 恩愛兩不疑]”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소무의 시구는 읽는 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은애란 고마워 베풀고 사랑함이다. 부절을 붙들고 벗 이릉을 돌려보내는 소무의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사신으로 그 자리를 버텼다. 그 손의 깃발은 그 마음의 상징이었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그의 단편소설에서 제시한 답은사랑이었다. 그것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현실과 부조리한 상황까지 버티고 나가는 굳센 마음의 비결은 믿음과 헌신에서 나온다. 세상살이 온갖 처세의 방법과 구구한 전략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소무와 이릉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어린 학동도 다 아는 이야기였고, 중국과 한국에서소무목양도혹은소무지절도(蘇武持節圖), 소무가 부절을 붙들다라는 제목의 그림이 거듭 그려졌다. 얼굴색이 먹빛이 되고 몸이 다 야위어져서 나타난 소무를 기억하노라면완악한 사람의 마음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람은 꿋꿋해진다고 했다.

 

소무의 이야기로 인해 사람들은편지안백(雁帛, 기러기의 비단)’ 혹은안서(雁書, 기러기 글)’라 불렀고, 목판에 멋진 기러기를 새겨서 종이에 찍어 편지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기러기의 편지 전달 이야기가 한나라 사신이 그 자리에서 꾸며낸 이야기였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깃발을 잡고 있었다

 

여기 펼친 이 그림은 삼성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만고기관>에 실려 있다. 펼치면 왼편에 글이, 오른편에 그림이 있는 책으로 총 29건의 그림과 글이 함께 수록돼 있는 서화첩이다. 영조대 왕실에서 제작한 왕실용 그림책으로 알려져 있다. ‘소무간양은 그중에 25번째 그림이며,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이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의 왼편에는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1741)이 정갈한 필치로 시() 한 수를 적어 놓았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 701-762)이 소무의 수고와 눈물을 애절하게 표현한 시로, 조선시대 문인들의 학습교재인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린 유명한 작품이다.

 

소무가 흉노에 있으면서 십년 동안 한나라 깃발을 잡고 있었다.

흰 기러기 상림에 날아와 공중에서 서찰 하나 전하였다네

양 치는 변방 땅 괴롭고 떨어지는 해에 돌아갈 마음이 끊어지네

목 마르면 월굴의 물을 마시고 천상의 눈을 먹었네

동으로 돌아가려니 사막의 변방 멀고

북으로는 하수 다리의 작별에 슬퍼,

울면서 이릉의 옷깃을 잡고 서로 볼 때 눈물이 피를 이루었었지.

 

蘇武在匈奴 十年持漢節 白雁上林飛 空傳一書札

牧羊邊地苦 落日歸心絶 渴飮月窟水 飢餐天上雪

東還沙塞遠 北愴河梁別 泣把李陵衣 相看淚成血

 

 

고연희 서울대 연구교수 lotus126@daum.net

 

필자는 한국한문학과 한국미술사로 각각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연구 교수로,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시대 회화문화에 대한 문화사상적 접근으로 옛 시각문화의 풍부한 내면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조선시대 산수화, 필묵의 정신사> <꽃과 새, 선비의 마음> <그림, 문학에 취하다> <선비의 생각, 산수로 만나다> 등의 저자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0호 Pet Humanization 2021년 05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