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간은 오전 8시. 평소 같으면 당연히 회사에 있거나 적어도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에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여전히 집이다. 어제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했기 때문에 오늘은 일찍 나가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지난주 유 대리님이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로 인해 내 문제를 알게 됐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유 대리님은 신상품 프로젝트에서 미끄러지고 난 뒤 공공연하게 ‘태업’을 벌이더니 꾀병 사건까지 들통 나면서 코너에 몰리게 됐다. 그러다 갑자기 사표를 냈고, 회사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표를 수리했다.
우리 팀은 부랴부랴 환송회를 준비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등 떠밀리다시피 회사를 그만두는 유 대리님은 오히려 담담해 보였으나, 정작 떠나보내는 우리는 마음이 꽤 심란했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샐러리맨의 운명인가. Y 전자에 입사한지 벌써 6년째. 내 젊음을 Y전자에 모두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과연 이 회사는 나를 언제까지 지켜줄 수 있을까. 과장·팀장·임원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이 회사에 남아있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였다. 인수인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급하게 그만둔 유 대리님의 업무 뒤처리까지 도맡은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또 신제품 기획안을 작성할 때에는 그저 내 손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들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는데, 실질적인 제품개발 단계에 오게 되니 그동안 없던 걱정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 특수조명 기기가 정말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일까?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회사에 무리가 되는 건 아닐까? 김 팀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이 내 기획에 기대하고 있는데 만약에, 만약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회사는? 그보다 나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고, 그럴수록 제품 보완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말 그대로 월화수목금금금, 심지어 주말에까지 회사에 나와 고생했는데 이런 노력과는 반대로 일은 자꾸만 꼬여 갔다. 디자인 문제가 풀리면 연구소에서 불평이 나왔고,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니 재무팀에서 태클인 식이다. 서로 다투는 부서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낮에는 부서별로 돌아다니면서 제품 보완을 위해 격론을 벌이고, 밤에는 이들과 좀 더 친해지기 위해 야식 제공에 술자리 참석까지 했다. 상품 기획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게 됐다고나 할까.
그러다 결국 문제가 터져 나온 곳은 바로 연구소. ‘어제의 동지들’이 더 이상 나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난 그저 내가 기획한 제품이 좀 더 잘 만들어지길 바랐을 뿐이고, 그러기 위해 연구소와의 협력을 좀 더 강화하고자 했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요구 사항이 조금씩 늘어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연구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연구소 출신이 회사 기술력에 대해서는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지 않았냐”, “기획팀으로 가더니 기고만장해졌다”, “왜 사사건건 트집만 잡냐”, “좀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담당을 바꿔 달라”….
내가 하는 일에 자꾸 문제만 생기고, ‘친정’인 연구소에서도 왕창 깨지고 나니 더욱 불안해지고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더니 결국 어제는 오전부터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서 병가를 내기에 이르렀다. 두통약으로도 해결이 안돼 병원 진찰을 받았는데, 정말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됐다. 의사가 대뜸 정신과 상담을 받아 보라는 것이 아닌가. 신체 기능에는 이상이 없는데 심리적 원인이 큰 것 같다면서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우울증이라니!
내가 그토록 원하던 미래상품 기획팀으로 와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 왔는데 우울증이라니,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아∼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기 싫고, 그저 쉬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