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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것은 유연하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생각하라

한근태 |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자기계발

 

 노자는 시대적 맞수, 공자가 본질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관계를 중시한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유지할 때 오히려 폭발력이 터져나온다. 이게 진정한 진실의 힘이다.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생각하는 힘을 복원하는 길이 열릴 수 있다. 생각하는 힘을 회복하려면 기존 신념이나 이념에서 벗어나경계에 있는 사람을 지향해야 한다.

 

‘악으로 이르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은 뜻에서 한 일이지만 결과는 좋지 못함을 넘어 최악이 된다는 말이다. 히틀러도 그랬고 김일성도 그랬다. 왜 그럴까? 한 가지 생각에 너무 사로잡히면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너무 강한 신념, 사상, 종교는 위험하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는 능력을 없애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자의 도덕경을 새롭게 해석했다. 자기 생각을 확신하지 말고 대신 경계에 서라고 주장한다.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저자 최진석, 위즈덤하우스, 2015

 

 

노자는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라 했다. 도라고 하는 순간 이미 도가 아니고, 명이라 하는 순간 이미 명이 아니란 말이다. 뭔가를 규정하는 순간 처음 만들어질 때의 명과 실제의 명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명과 실의 불일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무언가를 규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공자는 본질을 강조하고 노자는 관계를 중시한다. 공자의 사상은 인()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 본질인 인을 잘 보존하고 확장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노자는 다르다. 그는 기준점을 부인한다. 기준을 만드는 순간 나머지 것들을 배제하고 억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갈등의 출발점이란 것이다. 기준이 있으면 차별하게 된다. 경직되고 자율성을 잃는다. 기준의 본질은 출발점이다. 그래서 본질 자체를 부인한다. 본질 대신 관계성을 본다. 그가 주장하는 유무상생(有無相生)이 그렇다. 유와 무가 서로 살게 해준다는 뜻이다. 유는 무를 살려주고, 무는 유를 살려준다. 유는 무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무 역시 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유와 무는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같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유가 있어야 무가 있고 무가 있기 때문에 유가 있을 수 있다. 무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기능하게 해주는 영역이다. 무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하다. 기능하기 위해서도 공간이 필요하다. 시작이나 출발처럼 자신의 존재성은 없으면서 구체적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상태가 바로 무다. 무는 텅 비어 없는 것이지만 유가 존재하고 쓰임새가 있도록 하는 위대한 기능을 갖고 있다.

 

사는 것이 힘든 이유는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진짜로 착각한다. 거기서 집착이 생기고 집착 때문에 힘이 든다. 그림자를 좇는다는 것은 허무한 일이다.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든다. 불교에서는 가짜가 아닌 실상을 아는 경지를 각()이라 한다. 깨달음이다. 젊어서는 애인과 헤어지면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 달라진다.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상을 알면 집착하지 않고 집착에서 벗어나면 힘들지 않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소유란 무엇일까? 무소유는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게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가버린 버스를 두고아이고, 저건 내가 탈 버스였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소유적 태도다. 대신 저 버스는 내가 탈 버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버스가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를 두고 떠난 것은 아니다. 그저 시간표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기 생각의 틀에 자신을 가두는 것도 위험하다. 자기 생각과 실상은 대부분 다르다. 거기서 세상의 고통은 시작된다. 실상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 버스는 내가 탈 버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뿐하다. 저 돈은 내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내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잠시 맡아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 된다.

 

대장경은 한마디로 관계의 정의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없어지므로 저것이 없어진다. 인연이다. 관계다. 이 세계는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로 존재한다.

 

 

()이란 글자가 있다. 글자 안에어지럽히다는 의미와정리하다라는 의미가 함께 있다. 어지럽혀야 정리를 할 수 있다. 나쁜 사람이 있어야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추함이 있어야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있고 볼록이 있어야 오목도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사물을 볼 때 양쪽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잠에서 깬다고 한다. 잠을 자야 깰 수 있는 것이다. 한 글자 안에깨다자다라는 대립되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다.

 

노자사상은 자연의 질서를 인간 질서에 응용하려 했다. 텍스트란 말은 섬유를 뜻하는 텍스처와 어원이 같다. 이 세상은 직물이 짜여 있듯 교직돼 있다는 뜻이다. 있음과 없음의 교직, 이질적인 것들의 교직이 이 세상이다. 노자는 도를 현이나 새끼줄을 갖고 묘사한다. 현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상호 뒤섞여 있다. 이런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능력 또한 그래야 한다. 도가에서는 지()에서 명()의 단계로 나아가라고 주문한다. 명은 해와 달이 합쳐진 모양이다. 해를 해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다. 해와 달을 한 세트로,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이 바로 명이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볼 게 아니라 달과 해의 관계로 봐야 한다. 분리돼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한다.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 명이다. 관계의 반대는 실체다. 뉴턴물리학에서 양자역학으로 변하고 있다. 실체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의 변화다. 이성, 합리성, 순수성 같은 단어는 실체의 단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자기 의견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지적 토대가 얕다. 자기 의견이 과감할수록 지적 넓이가 좁다. 경계를 품은 사람은 과감하지 않다. 함부로 진리임을 확신하지 못한다. 어느 시대건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 여기서 무식하다 함은 대립면을 함께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은 좋은 감정을 갖고 서로를 위하는 상태를 말한다. 근데 사실 사랑 안에는 이별이 포함돼 있다. 이별과 사랑이 한 세트인 것이다. 강아지가 예쁘다고 난리를 치면 어른들은너무 예뻐 마라. 손 타서 죽는다고 한다. 지나치게 만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대부분 사랑은 사랑하지 않아서 깨지는 게 아니다. 너무 사랑해서 깨진다. 하루에 전화를 수십 번 하고, 문자를 하면 답이 바로 와야 한다.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무엇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 금이 간다. 어떤 것이든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 하지 않으면 깨진다.

 

봄날 얼음 풀리듯 하라는 말이 있다. 얼음이 풀리는 그 경계 지점은 물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아주 모호한 상황이다. 경계가 불분명하다. 근데 사실 그 자체가 실상이다. 검을 현(), 밝을 명()자는 아주 높은 정신적 경지를 표현한다. 두 글자 모두 경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가물가물하거나 어둑어둑한 상태를 묘사한다. 분명한 구분 없이 대립면들의 관계로 돼 있는 상태 혹은 정신적 경지를 표현한다. 이런 대립면의 긴장상태를 품고 있는 사람은 과감하지 않다. 광신하지도 않는다. 광신은 대개 협소한 믿음에서 온다. 광신하는 사람은 대개 헛똑똑이다. 충혈된 눈으로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 굵은 팔뚝을 휘저으며 주장하는 사람, 깃발을 들고 소리치는 사람, 머리띠를 하고 내달리는 사람, 서둘러 충고하려 덤비는 사람이 대개 헛똑똑이라는 말이다.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거칠고, 갈등이 심하고,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른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다.

 

정호승의거미줄이란 시가 있다. “산 입에 거미줄을 쳐도/ 거미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진실은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고/ 조용히 조용히 말하고 있을 때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때, 그 진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대편의 힘과 함께 작동하지 않으면 그 확신은 광신이기 쉽다. 대립면의 긴장이 주는 탄성을 잃은 모든 일은 광신이 되기 쉽다.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유지할 때 오히려 폭발력이 터져나온다. 이게 진정한 진실의 힘이다. 확신하지 않는 힘이 바로 내공이다.

 

 

 

 

산 것은 부드럽고 죽은 것은 뻣뻣하다. 살아 있는 나무는 바람에 흔들린다. 죽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살아 있어야 흔들리고, 살아 있는 것만이 흔들린다. 마음속에 하나의 기준을 갖는 것, 전체 사회가 하나의 이념으로 묶이는 것은 뻣뻣해지는 것이다. 이념을 가지면 뻣뻣해진다. 유가사상은 여기 있는 내가 이상적인 곳을 향해 부단하게 전진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내가 우리로 바뀌는 과정이고, 개별성이 집단성으로 변하는 과정이고, 개별성이 보편성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유가는 구분을 긍정한다. 본질을 기반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하는 성질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동일성과 배타성이 함축돼 있다. 노자는 다르다. 구분을 싫어한다.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는데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면 미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하기 싫을 일을 한다면 어떨까?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인생이 고달프다. 삶에 재미가 없다. 큰 성취를 이루기 어렵다. 그는 바람직한 것을 없애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해야 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다. 바람직한 일, 해야 할 일, 좋은 일을 구분하는 것을 좋지 않게 봤다. 사냥을 하듯 이런 목표물을 향해 내달리도록 구조화된 사회는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이아몬드와 고구마의 가치는 때에 따라 달라진다.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조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주인의식 같은 것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들 주인의식을 강조한다. 과연 그게 진리일까? 주인의식이 좋기만 할까? 모두 주인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노자는 성공 대신 공성(功成)을 쓴다. 공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지만 공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혼탁과 맑음, 가만히 있음과 생기는 함께 공존을 이룬다. 맑아진 물은 혼탁함이 고요함이란 절차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이치를 지키는 자는 꽉 채우려 들지 않는다. 오직 채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흐리멍덩하게 하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하지 않는다. 자신을 흐리멍덩하게 한다? 대립면의 경계를 품은 사람은 자신을 특정한 모습으로 확정 짓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특정한 신념이나 이념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유무상생의 원칙을 체득한 사람이다.

 

 

다들 주인의식을 강조한다.

과연 그게 진리일까?

주인의식이 좋기만 할까?

모두 주인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노자는 성공 대신 공성(功成)을 쓴다.

공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지만

공성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41장에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을 한다.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통은 대기만성으로 읽는다. 저자는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해석한다. 앞 뒤 문장을 보면 그렇다. 이 말 앞에는 대방무우(大方無隅), 즉 큰 사각형에는 모서리가 없다는 말이 있다. 뒤에는 대음희성 대상무형(大音希聲 大象無形)이란 말이 있다. 큰 음에는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대기만성보다는 대기면성이 더 그럴 듯하다.

 

72장에서는 도상무위 이무불위(道常無爲 而無不爲)라고 했다. 도란늘 무위하지만 이뤄지지 않음이 없다란 뜻이다. 여기서 무위는 어떤 이념이나 기준을 근거로 하여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유위는 특정 기준이나 신념 혹은 가치관의 지배하에 하는 행위를 말한다. 유위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기 기준에 따라 본다. 무위적인 사람은 그런 기준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대로 본다. 훨씬 유연하다. 보이는 대로 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 사심 없이 사물을 본다는 것은 일정 경지에 올라야 가능하다.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이란 말도 했다. 배움이란 보태는 것이고, 도란 덜어내는 것이란 말이다. 논어의 첫 글자는 학()이다. 도덕경의 첫 글자는 도()이다. 공자의 철학은 학()과 반복훈련을 뜻하는 습()으로 이뤄져 있다. 학습이 사명 완수에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된다. 유학은 기본적으로 쌓아가는 것이다. 성인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바꾸어 간다. 하루하루 더해 간다. 노자 생각은 다르다. 덜어내는 것이다. 빼기 더하기의 빼기가 아니다. 이미 있는 지식, 이념, 신념을 약화시키면서 지배력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내면을 드러낸다. 덜고 또 덜어내다 보면 무위의 지경에 이른다. 도를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했다. 무위를 실천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무위에서 멈추지 않고 무위를 지나 무불위에 가서 멈춘다. 노자는 무불위를 지향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나 자신을 도외시하는 태도는 전형적인 무위의 태도다. 자기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않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앞서게 되는 것이다.

 

유학은 필연적으로 가치론에 빠진다. 세상 변화보다는 기준을 따르려는 의지가 확고하다. 노자는 반대다. 어떤 가치론이나 체계를 무력화시키고자 한다. 무위의 반대는 유위다. 유위란 이념이나 신념과 같은 가치론적 근거를 갖고 세상과 관계한다. 그 기준에 따라 세계를 본다. 어떤 프리즘을 갖고 세상을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대로 보는 사람 중 누가 세상을 정확하게 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과 두루두루 다 보는 사람이 경쟁하면 누가 이길까?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은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이다. 경험과 지식의 축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경험과 지식에 지배되지 않는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이다.

 

과거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관객이 느낄 부분까지 감독이 다 정해줬기 때문이다. 감독이 관객의 수준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간 갈등은 왜 생길까? 부모가 자식을 불신하기 때문이다. 왜 효를 강조하는가? 강조하지 않으면 효도하지 않을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부모 자식 간에는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기다려주면 된다. 부모님 말씀 잘 들으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했더니 성공했다는 말은 어딘가 이상하다. 나이 마흔 된 사람이 부모 말을 그대로 순종한다는 건 어딘가 이상하다. 좋은 정치 역시 무위를 실천해야 한다. 정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 자식을 내 틀 안에 가두지 말라는 것이 무위의 실천이다. 무위의 실천은 이 세상이 특정한 본질 위에 서 있지 않고 대립면의 공존으로 돼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장 높은 단계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성실하게 실천한다. 중간 단계는 반신반의 한다. 낮은 단계는 도를 듣고 비웃는다. 그런 부류가 비웃지 않으면 도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 입으로 스스로의 선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진실되다, 나는 선하다, 선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스스로의 틀과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재단하고 사회를 평가한다. 그 일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양쪽을 다 보는 사람은 특정 방향으로 내달리지 않는다. 역설을 내재화해야 한다. 스스로 착하다고 하면서 착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착함이 기준이 되고 권력이 된다. 그 착함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왜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가? 혁명을 하는 혁명가들이 스스로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혁명되지 않은 채 사회의 혁명만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작고 구체적인 것이 어렵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일상이다. 뇌물 문제를 제도로 해결할 수 없다. 한계가 있다. 개인 스스로가 뇌물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근데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 자신에 대한 존중심에서 나온다. 자기 삶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윤리적 규정이 많다고 윤리적 사회가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자발성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시선이 늘 외부를 향한다. 역설을 내면화해야 한다. 이쪽저쪽을 구분하는 대신 경계에 서야 한다. 선악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무소유의 철학이 있다. 무소유는 소유를 한 후 일어나는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버릴 것도 없다. 혼란이 있어야 안정이 있을 수 있고, 안정이 길어지면 혼란이 생긴다.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상호보완이 있다. 그런 점에는 필자는 공자 철학과 노자 철학은 퍼즐같이 딱 맞는다는 생각이다. 공자는 기준점을 제시했고, 노자는 기준점을 부인하면서 관계를 중시했다. 기준점이 없다면 구분할 수 없다. 일단 구분해야 구분을 없앨 수 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한근태 한스컨설팅 대표 kthan@assist.ac.kr

필자는 서울대 섬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크론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핀란드 헬싱키경제경영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대우자동차 이사, IBS컨설팅그룹 상무,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등을 지냈고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겸임 교수를 맡고 있다.

  • 한근태 한근태 | - (현) 한스컨설팅 대표
    -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 교수
    - 대우자동차 이사 IBS 컨설팅 그룹 상무
    - 한국리더십센터 소장
    kthan@ass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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