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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中有訓

바둑 두는 노인들, 황제를 바로잡다

고연희 | 162호 (2014년 10월 Issue 1)

자기계발, 인문학

편집자주

미술사와 문학, 두 분야의 전문가인 고연희 박사가 옛 그림이 주는 지혜를 설명하는 코너畵中有訓(그림 속 교훈)’을 연재합니다. 옛 그림의 내면을 문학적으로 풍부하게 해설해주는 글을 통해 현인들의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노인들의 기상

그림 속에 네 명의 하얀 노인이 등장한다. ‘사호(四皓)’는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얗게 센 노인 네 명을 칭한다. ‘()’는 희고 맑음을 뜻한다. 사호가 함께 상산(商山)에 은거 중이라 이들을 일러상산사호라 부른다.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 선생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네 노인을 그림에서 일일이 분간하기는 힘들다. 상산사호는 모두 현명한 노인으로 그들의 이미지는 이렇게 산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이다. 일러사호위기라 한다. ‘위기(圍碁)’란 바둑알을 둘렀다는 뜻으로, 곧 바둑 두기를 말한다. ‘상산사호위기하던 시절은 한()나라가 세워진 무렵이다. 황제는 고조(高祖) 유방이었다. 한 고조 유방은 네 명의 노인을 황실로 초청했다. 좋은 음식과 높은 벼슬이 기대되는 초청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이를 거절하고 노래를 불렀다.

 

높은 산 아득아득, 깊은 계곡 구불구불.

붉은 영지 반짝이니, 배고픔을 다스릴 만하다오.

요순시절이 멀리 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가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높은 덮개에는 근심이 매우 크다.

부귀하여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느니,

빈천하여도 내 뜻을 멋대로 하는 것이 낫도다.

- 사호

 

양기성(梁箕星) ‘사호위기(四皓圍碁, 네 명의 하얀 노인이 바둑을 두다)’,

조선시대 18세기 전반, 종이에 채색, 33.5 x 29.4, 일본 야마토분가칸

 

‘사호위기’는 조선 후기 영조대에 왕실에서 제작한 고전학습용 그림책 <예원합진>에 실린 한 페이지다. 그림이 있는 면의 왼쪽 옆에는 위에 인용한 사호의 노래가 가지런히 적혀 있다. 당시 최고 명필가로 꼽혔던 백하선생 윤순(尹淳)의 서체다. 이들은 한 고조의 정치가 저 요순시대의 정치만 못하다고 비난을 서슴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황제의 부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섯이나 뜯어먹으며 속 편하게 살겠노라 한다. 노래에서 솟구치는 노인들의 묵직한 사유와 강인한 기상이 만만치 않다. 사호가 부른 이 노래는채지가(採芝歌, 버섯을 뜯는 노래)’라고 불리며 훗날 곡조가 얹혀져 노래로도 불렸다. ‘채지가의 노랫말 중부귀함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느니 빈천하여도 내 뜻을 멋대로 하는 게 낫다(富貴之累人, 不若貧賤之肆志)”라는 구절이 가장 유명한데,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세속명리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표현할 때나 다른 어떤 선비의 초탈한 모습을 형용할 때 활용하는 문구가 됐다.

 

장량의 SOS

‘장량(張良)이 없으면 한 고조 유방도 없다고 할 만큼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고 안정을 취하기까지 뛰어난 책략으로 유방을 보좌한 인물이 장량이다. 그런데 장량이 상산사호를 황실로 불러내야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한 고조 유방의 사사로운 인정에서 비롯됐다. 한 고조는 측실인 척 부인을 사랑했는데 이 때문에 적실 여후의 아들을 세자에서 밀어내고 척 부인의 아들을 황제 계승자로 바꾸려 마음을 먹었다.

 

세자를 함부로 갈아 치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황실의 질서가 서지 않는 위험한 일이다. 장량은 황제의 경박스러운 결정이 임박해진 상황을 상산사호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상산사호는 산에서 내려왔다. 그들은 원래의 태자인 여후의 아들을 찾아가 극진히 예우했다. 한 고조 유방은 사호가 세자를 찾아가 극진히 예우하는 모습을 보면서 머쓱해졌고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황제의 포기

한 고조 유방은 마음을 고쳤다. 네 노인이 세자에게 문안하는 모습을 보고 세자를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 것이다. 유방은 척 부인을 위로했다.

 

커다란 고니가 높이 날면 대번에 천리를 날지.

날개를 이미 넓게 펼쳤으니 세상을 가로지르리.

세상을 가로지르면 어찌해야 하나.

아무리 주살이 있다 한들 쓸모가 없으니.

 

크고 흰 백조가 우아하게 하늘을 날 듯 상산사호가 상산에서 내려왔다. 팔순 넘은 노인들이 하얀 수염을 휘날리고 도포를 펄럭이며 등장한 모습이 그러했을 것이다. 황제의 초청은 거절했지만 황실의 기울어진 질서를 바로 붙들어 세워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는 가차 없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들이 한 일은 원래의 세자를 알현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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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연희

    고연희lotus126@daum.net

    - (현) 서울대 연구교수
    -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
    - 시카고대 동아시아미술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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