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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사심 없는 행동은 없다

김원철 | 81호 (2011년 5월 Issue 2)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DBR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몇 해 전, 자선단체에 거액을 기부한 여배우의 이야기가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씨도 비단결이네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것이 인지상정이기에 기부 행위는 분명 도덕적으로 칭송받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거액을 기부하고도 아무런 칭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금 공제 혜택을 위해 기부한 사업가, 정치적 면죄부를 받기 위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정치인은 칭송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똑같은 일을 했지만 그들의 행위 속에는 사심(私心)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제 욕심을 채우려는 마음이 사심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심없는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사심없는 행위는 없다고 단언한다. 도덕적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도 거기에는 항상 보상에 대한 기대가 들어있다는 주장이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해왔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이 주장에 당장은 모욕감을 느끼겠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사심없는 행위가 환상에 불과하다고 해서 도덕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오히려 부르디외는 자신의 주장이 모든 것을 물질적 이익으로만 환산하려 하는 공리주의를 타파하는 데 일조했다고 자부한다.

부르디외는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동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부르디외만의 독창성은 모든 행동의 동기들을 아비투스와 장의 공모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아비투스란 무엇인가? 먼저 이 단어의 유래부터 살펴보자. 아비투스(habitus)는 라틴어로, 그리스어헥시스(έξις)’를 번역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헥시스는소유’ ‘상태’ ‘탁월함이라는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한 가지 논리가 세 의미 사이에 숨어 있다. 인간의 신체를 예로 들어 보자. 탁월한 신체는 무엇보다 건강한 신체다. 제 아무리 뛰어난 운동선수라도 몸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면 경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지 못할 것이다. 탁월함으로서 건강은 우리 몸의 본성이 아닌 상태를 가리킨다. 양생과 훈육을 게을리 한다면 타고난 역사 아킬레스도 건강을 잃게 된다. 우리는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잃을 수는 없다. 잃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소유했던 것들이다. 물론 다른 소유물들과 달리 건강은 신체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신체에 결합돼 있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복과 신체의 관계를 빌려 이 특별한 의미의 소유 관계를 설명했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은 나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부르디외도 동일한 의미에서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그것은 원래부터 소유하고 있던 능력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획득된 탁월함을 지칭한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능력은 구체적인 행위들을 통해 드러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그가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럼 어떤 일을 수행할 때 우리의 행동방식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테니스를 하는 사람은 테니스의 룰에 따라 공을 네트 너머로 쳐 넘겨야 하며, 골프를 하는 사람은 골프의 룰에 따라 공을 그린 저 멀리 날려 보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할지는 행위의 장에 따라 다르게 결정된다. 이때, (champ)이란 단순히 행위의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장에 들어간다는 말은 미리 지정된 규칙들에 따라 행동함을 의미한다. 장은 가능한 행동들을 규정하는 놀이의 규칙들이며 이 규칙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질서다.

놀이의 규칙을 모른다면 놀이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규칙을 너무 협소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득점의 룰을 안다고 해서 당장 테니스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비투스가 의미하는 능력은 놀이를 직접 즐길 수 있는 능력이다. 능력이 뛰어난 테니스 선수는 공을 쫓아가기보다 공의 낙하지점을 예측해 미리 가서 공을 기다린다. 머리로 생각한 다음에 움직이려 하면 늦게 마련이다. 훌륭한 선수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판단한다.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놀이의 참가자는 놀이하는 장의 구조를 이미 자신의 몸속에 체화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와 장 사이의 공모가 이것이다.

운동경기처럼 사회적 활동들도 나름의 규칙들에 따라 진행되는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각각의 장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규칙에 따라 참여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미리 결정한다. 놀이치고는 조금 복잡한 놀이다. 놀이의 규칙을 단기간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놀이가 언제 시작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때때로 참가자들은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기도 한다. 사회적 놀이는 놀이임이 망각된 놀이다.

사회적 놀이의 목표가 물질적 이익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공리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물질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놀이에 참여한다는 말은 경제-장에 있어서는 타당하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놀이의 목표가 물질적 이득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많은 장들이 경제-장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환원이 가능할까? 경제-장에서는 분명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가 승자다. 하지만 다른 장들에서는 오히려 이득 포기가 종종 승리의 조건이 된다.

정치-장을 예로 들어보자. 전한(前漢) 말엽의 왕망(王莽)은 왕의 외척들이 득세하자 대사마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이 일로 그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게 돼 훗날 전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왕망 자신도 선왕의 외척이었고, 그 덕에 대사마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 지위를 포기함으로써 권력밖에 모르는 다른 외척들과 차별화했다. 한서(漢書)는 왕망을 매우 간악한 정치가로 묘사했다. 대의명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행동들이 실은 계산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해석을 받아들이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공의 낙하지점을 미리 예측하고 달려가는 테니스 선수처럼 그도 사태를 미리 예측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정치-장에 있어 성공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보다 과시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적 놀이의 모든 장들은 고유한 놀이규칙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나름의 고유한 보상체계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들을 경제-장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오류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심없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사심없는 것처럼 보이는행위가 최우선시 되는 장이 있다. 바로 도덕의 장이다. 사심없는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행위자는 높은 점수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를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로 숭배하기 시작한다. 한때는기부왕이라 칭호가 사용되더니 요즘에는기부천사라는 칭호까지 등장했다. 만인 위에 군림하는 왕만으로는 모자라다 싶었던 모양이다. 천사와 같은 초인간적인 존재로 떠받들어진 기부자는 이제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된다. 도덕적 행위에 대해 사회가 되돌려주는 보상인 셈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보상을 바라고 선행을 베푸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 보상은 더욱 확실해진다.

그러나 사심없는 행동은 없다.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이익을 기대하면서 행동한다. 그렇다고 모든 행동의 목적이 경제적 이익에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익을 뜻하는 영어 단어 ‘interest’가 이를 잘 말해준다. 이 단어는 이익을 뜻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는관심흥미. 어떤 놀이에 흥미를 느낀다면 놀이의 목표가 추구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혹시 지금까지 사회적 놀이의 목표를 물질적 이익으로만 좁혀서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랬다면 이득을 포기함이, 즉 행동의 목적을 경제적 이익이 아닌 도덕적 가치나 신념을 따르는 데 두는 것이 때로는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벵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파리 고등사회과학원(E.H.E.S.S)에서 스피노자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특히 윤리학의 역사, 스토아철학, 아우구스티누스에 관심을 갖고 관련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김원철 철학박사 won-chul-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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