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탯줄을 댄 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가 홀로 자급자족하며 사는 자연인으로서의 자신을 상상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느릿느릿 걷는 자가 되어 매일 적어도 한두 시간은 야외에서 보내는 것, 일출과 일몰을 관찰하는 것, 바람 속에 들어 있는 소식을 듣고 표현하는 것, 언덕이나 나무 망루에 올라 눈보라와 폭풍우의 관찰자가 되는 것”이 인생의 바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정한 직업이 있을 리 없었다. 소로는 45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10개가 넘는 직업을 가졌다. 가정 교사와 학교 교사였으며, 측량 기사였고, 정원사, 농부, 목수였는가 하면, 연필 제조업자, 작가, 강연자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박물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사회비평가였다. 그리고 죽어서는 ‘19세기에 이미 21세기적 환경 감각을 지닌 선각자’로 평가받기도 했다.
소로는 때때로 몇 가지 직업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든 빼놓지 않았던 일은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그는 자연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야생 자연을 탐구하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옮겨놓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로는 “자연 모두가 나의 신부”라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의 소리들은 내 맥박이 뛰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과 교감했다. 늘 ‘땅에 탯줄을 댄 자’처럼 자연을 그리워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일기에 이렇게 노래했다. “아, 평생 한결 같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평범한 계절에 작은 과일이 무르익듯 내 삶의 과일도 그렇게 무르익을 수 있다면! 항상 자연과 교감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계절마다 꽃피는 자연의 특성에 맞춰 나도 함께 꽃피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이런 바람은 그가 인생을 시작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오랫동안 바랐던 아름다운 꿈은 실제로 소로를 미국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로 불러들였다. 1845년, 28세의 젊은 소로는 이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정착했다. 이 기간 동안 소로는 새로운 삶을 살아볼 기회를 자신에게 선물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인생에 준 가장 훌륭한 선물이었다. 소로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침대 안에서 잠시 머물며 이렇게 기원했다. “나의 몸이 건강하다. 나의 정신은 깨어 있다. 내 일이 즐겁고, 사람들은 나를 믿어주고, 나의 미래는 찬란하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이것이 그가 하루 종일 생의 열정을 유지하는 주술이었다. 주술이 매일의 기원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다. 소로는 자신의 주술의 힘을 믿은 사람이었다. 창조적 자연인이었고 사회와 생태의 경계인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소로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그를 기억한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서의 2년 남짓한 세월을 통해 <월든>이라는 책의 주인공이 되었다.
존 F 케네디의 끊임없는 재창조
삶이야말로 인간이 만든 작품 중 가장 위대하다. 과거의 자신을 진정 바라는 삶을 사는 미래의 자신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존 F 케네디는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다. 연약하고 무력한 사람이라는 타인의 과소평가와 무시가 늘 그를 괴롭혔다.
케네디는 평생 자신을 재창조해 나가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위대한 여정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신체적 약점이 있었음에도 해군에 입대했다. 초계 어뢰정에서 대위로 복무하는 동안, 그의 배가 일본군의 구축함에 받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는 죽음을 초월한 듯 용감하게 행동했다. 자신이 남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 용감한 군인, 이것이 그때 그가 원한 삶이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아버지가 뒤를 봐주는 병약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성공을 발판으로 상원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전쟁터에서 부하를 구하는 영웅이듯, 유권자들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젊은 리더라는 이미지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몇 년 후 그는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검증되지 않은 풋내기’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었다. 케네디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재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여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상원의원들의 이야기를 모아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이라는 책을 공동 집필했고,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이 책 속 인물들의 정신과 행적을 따르는 젊고 용감한 정치적 후계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역사적인 1960년이 되었다. 그는 또 한 번 위대한 변신을 추구했다.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다. 젊은 자유주의 상원의원인 그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침체를 벗어나 미국의 위대한 유산인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한 선각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재창조했다. 그의 활력과 젊음은 대중을 사로잡았고, 그는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병약한 청년에서 전쟁 영웅으로, 전쟁 영웅에서 상원의원으로, 풋내기 정치가에서 젊고 용감한 정치적 후계자로, 이윽고 미국이 가장 사랑한 대통령으로 자신을 재창조했다. 죽을 때까지 그는 미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