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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품격

인간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

김헌 | 364호 (2023년 03월 Issue 1)

편집자주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명강의로 대중들에게 서양 고전을 알리는 데 힘써 온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서양 고대의 역사와 문학, 철학을 넘나드는 글에서 인문학적 사유의 깊이를 한껏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Article at a Glance


인문학이란 이 세상에 무엇을 새겨 넣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이다. 인문학 중에서 역사(史)가 사실에 입각해 지금까지 인간이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를 밝힌다면 문학(文)은 사실을 넘어서 인간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더 나아가 철학(哲)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정신적인 가치인 지혜보다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 또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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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인문학이 무엇일까부터 단순하게 풀어보자. 이 말은 ‘인문(人文)’과 ‘학(學)’으로 나뉘고, ‘인문’은 다시 ‘인(人)’과 ‘문(文)’으로 나뉜다. 文은 ‘글월 문’인데 ‘글월’이란 ‘글자’, 그리고 글자들이 결합해 이뤄지는 ‘글과 문장’을 가리킨다. 그러면 인문은 ‘사람의 글자’ ‘사람의 문장’이란 뜻으로 풀이되는데 과연 무슨 뜻일까? 잘 잡히질 않는다.

文은 아주 옛날 중국의 갑골문에서는 팔을 벌린 사람의 가슴에 문신을 새겨 넣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러니까 文은 애초엔 ‘사람의 가슴에 문신을 새긴다’는 뜻이었다. 사람마다, 부족마다 취향과 약속에 따라 서로 다른 문신을 새겼기 때문에 위와 같이 다양한 모습으로 文의 원초적 형태가 남아 있다. 그러니까 文은 글자라는 뜻 이전에 ‘무늬’라는 뜻으로 통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 둘의 의미를 구분하면서 文은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고, 대신 무늬를 뜻하는 紋(문) 자가 새롭게 생겨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글자라는 것도 종이 위에 새기는 무늬와 다를 바 없으니 굳이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싶긴 하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人文은 원래 ‘사람의 무늬’라는 뜻이었다. 위 글자들을 보면 ‘사람에게 새겨진 무늬’, 즉 ‘문신(文身)’을 뜻하는 것이었지만 사람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이도 결국 사람이었을 테니 ‘사람이 (사람에게) 새겨 넣은 무늬’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새겨 넣은 무늬, 즉 문신만을 뜻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람이 사람의 몸이 아닌 다른 것에다 새겨 넣은 무늬도 모두 인문이 된다. 돌에 새겨 넣은 그림이나 글, 고운 비단 위에 수놓은 그림, 종이 위에 붓으로 멋지게 쓴 문장들도 모두 인문이다.

그렇다면 인문에 대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주역』의 ‘분괘(賁卦)’에는 이런 말이 있다. “천문(天文)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하고, 인문(人文)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化成)한다.” ‘인문’에 짝을 이루는 말이 ‘천문’이라는 데 주목해보자. 천문은 말 그대로 ‘하늘의 무늬’, 즉 ‘하늘에 새겨진 무늬’라는 뜻이다. 아침에 떠올라 한나절을 밝히다가 서쪽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이 하늘에 새겨진 가장 대표적인 무늬일 것이다. 천문으로서의 태양의 움직임을 잘 살펴보면 하루라는 시간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두둥실 달이 떠오르는데 달은 밤하늘에 새겨진 무늬, 또 하나의 큰 천문이다. 달은 날카로운 손톱처럼 초승달이 떠올라 보름달이 될 때까지 차오르다가 점점 기울어가면서 그믐날에 아예 사라진다. 천문으로서의 달의 움직임과 모양새의 변화를 관찰하면 한 달이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반짝이며 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로운 별자리들의 움직임을 헤아린다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는 곧 “천문을 살펴서 시간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천문의 움직임을 탐구하는 학문이 ‘천문학’이고, 천문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을 ‘천문대’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인문을 살펴서 천하를 화성한다”는 말에서도 인문과 인문학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인문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의 무늬이다. 사람의 몸에 새겨진 문신에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새겨놓은 다양한 인문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름 모를 수많은 풀이 무성한 땅이 있다. 그곳으로 한 농부가 소를 끌고 들어와 풀을 뽑아내고 땅을 간다. 드론이라도 띄워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다면 농부가 밭을 가는 모습은 땅에 선을 그리며 그림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즉, 자연 위에다 농부가 무늬를 새겨 넣는 것으로, 이는 농부의 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넓은 황무지를 개척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며 다른 마을로 통하는 길을 닦는 것도, 강이 범람하지 않도록 강물을 따라 둑을 쌓는 것도 모두 인간들이 땅에 새겨 넣는 무늬, 즉 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문이란 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 죽어갈 인간들이 생존과 행복을 위해 새겨 넣는 흔적의 총칭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어디 그뿐일까?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화폭에 그리는 행위는 화가의 인문일 테고, 삶의 경험과 깨달음을 글로 써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작가의 인문이다. 어떤 사람의 몸에 무늬를 새겨 넣는 것처럼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짓는 표정과 행동,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 사람의 마음에 내가 새겨 넣는 인상 일체가 그 사람에게 새겨 넣는 나의 인문이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지식과 정보, 전통과 가치를 전달하는 교육의 행위는 한 공동체 내의 정체성과 역사를 이어 나갈 중요한 인문의 실천이다. 내가 지금 글을 써서 독자들이 읽고 마음에 새겨 넣는다면, 이 또한 글을 통해 내가 독자들에게 나의 인문을 새겨 넣는 일일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인문이니, 삶의 터 위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어떤 ‘인간의 무늬’, 즉 인문(人文)을 남기느냐가 한 나라, 한 민족의 문화(文化)와 문명(文明)의 실체와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 인문을 살피고 탐구하는 것, 그래서 천하를 화성하는 학문이 바로 인문학이다. 천하를 ‘화성(化成)’한다는 건 그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겨 놓은 온갖 종류의 인문을 살피면서 ‘인간은 무엇이기에 이런 것들을 남겼을까’라며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며 인간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타진하는 것, ‘그런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며 인간의 도덕적ㆍ윤리적 당위성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마지막 질문에 이르면 ‘화성(化成)’은 더 높은 차원의 의미로 올라선다.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덕을 구현하고 세상을 선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무엇을 새겨 넣을 것인가? 어떤 인문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때 생기는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위기는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시작된다. ‘나는 오늘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무늬를 남겼나? 나의 말은 상대를 미소 짓게 만들고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인문으로 남았는가, 아니면 상대의 가슴을 아픈 상처로 얼룩지게 만든 저주와 욕설의 난도질이었는가? 나의 표정과 나의 행동은 상대가 즐거운 꿈을 꾸게 만드는 유쾌한 인문으로 남았는가, 아니면 혹시 불쾌함을 일으키는 지저분한 낙서로 남은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오늘을 깊이 성찰하고, 그 반성의 사유를 바탕으로 내일은 내가 가는 곳에 어떤 무늬, 어떤 인문을 남길 것인가를 숙고하고 준비하는 삶이 인문의 삶, 인문학적 통찰이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나는 내 안에 무엇을 새겨 넣을 것인가’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그림을 보느냐에 따라 내 안에 새겨지는 것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 안에 새겨지는 것들이 하루하루 누적되면서 총체적으로 나의 품격을 이루고, 그것이 나의 말과 행동, 인격으로 나올 것이다. 내가 어떤 인문을 내 안에 새길 것인가, 그리고 어떤 인문을 내 바깥의 사람들과 세상에 새길 것인가, 이런 통찰이 약할 때 세상을 위협하는 인문학의 위기가 개인의 차원에서도, 사회적 차원에서도 찾아온다.

서양 최고의 고전으로 꼽히는 기독교의 성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신이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공간에 신이 자신의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다. 최초로 빛을 만들었다. 텅 빈 공허에 불현듯 빛이 새겨지더니 낮과 밤의 구별이 생겼단다. 그리고 신은 자신이 우주에 새겨 넣은 빛을 보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경에는 그 표현을 “아름답다(kalon)”라고 번역했다. 신은 계속해서 창공과 뭍과 바다를 만들었고,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빛나게 했고, 땅에는 풀과 꽃, 나무를 피워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은 신이 이 세상에 가장 정성껏 새겨 넣은 무늬(文)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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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우주에 새겨 넣은 모든 것이 생겨날 때마다 ‘아름답다’는 자족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런 신이 정말 부럽다. 내가 그런 신을 닮아 이 세상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보기 좋은 무늬, 아름다운 인문을 남길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매일매일 그렇게 노력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하나씩 맺으며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 될 것이다. 하루를 돌아보며 ‘참 아름답다! 보기 좋구나!’ 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다면 말이다.

인문학의 세 분야, 문(文)ㆍ사(史)ㆍ철(哲)

앞에서 인문, 사람들이 이 세상에 남겨 놓은 모든 흔적을 바라보고 깊이 숙고하면서 ‘도대체 인간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런 흔적을 만들었는가’를 물으며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문학을 좀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정의해나갈 수 있다. 흔히 인문학에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줄여 문(文)ㆍ사(史)ㆍ철(哲) 세 분야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역사는 사실에 입각해 실증적인 탐구를 해나간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를 정확하게 밝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오직 사실만을 밝혀내겠다는 의지가 남다르다.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왜 했는지를 최대한 명확하게 밝혀내려고 한다. 실증적인 증거가 없다면 아무것도 단언하려고 하지 않고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증거 자료를 찾아 사실이 아닌 것은 엄격히 제거하고 제한한다. 그렇게 마련된 구체적인 사실과 사건, 유적을 보면서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로 객관적인 기술을 하려고 노력한다. 왜 그랬는지, 그래서 인간은 어떤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적어도 그 시대는 어떤 시대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를 궁극적으로 밝혀내고 싶어 하는 동시에 충분한 근거와 자료가 없다면 섣불리 단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의 법칙을 내세우는 작업이 유행했던 시대도 있지만 그것이 역사를 하는 사람의 본연의 자세는 아니다. 역사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history’는 원래 그리스말 ‘historia’에서 온 것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기록하고 탐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나 실증적인 역사에 충실했던 투키디데스 모두 근거 없는 소문이나 허황된 상상의 이야기는 거부하고 검증할 수 있는 자료나 증언에 충실하려고 했다.

반면 문학은 기본적으로 사실에 충실하고 세상과 인간에 관한 진실을 지향하지만 역사처럼 실증의 덕목에 묶여 있으려 하지 않는다.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를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인간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이러이러한 인간이 어떠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인간의 가능성을 마음껏 상상하는 가운데 인간이 무엇이며, 무엇일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역사와 문학을 비교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인의 작업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즉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가능한 일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따라서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점은 한 사람은 일어났던 일들을 말하는 반면 한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말한다는 데 있다.”

인간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은 분명 인간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역사와 문학이 인문학에 중요한 두 축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들 사이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을 고찰하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 더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며 당위성을 따지는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이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은 그런 윤리적ㆍ도덕적 문제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간과 세상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는 데서 철학이 그 고유한 빛을 찬란하게 발한다. 철학은 ‘인간은 이렇게 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야 도리가 아닌가’라는 당위성의 문제를 다루며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을 환하게 보여준다.

물론 철학도 역사처럼 인간과 세상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무엇을 해야만 하고, 그렇게 했을 때 인간과 세상은 어떤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논리적인 탐구만이 아니라 문학에서와 같은 모종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철학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당위성을 제안하는 가운데 인간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서 최종적인 결실을 맺으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윤리적 문제를 다뤘던 소크라테스를 철학의 본격적인 시작점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많은 철학자가 있었지만 진정 인간의 윤리적인 문제를 다룬 철학자는 소크라테스였기 때문이다. 로마의 철학자인 키케로는 『투스쿨룸 대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옛날의 철학으로부터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인 아르케라우스에게서 강의를 들었던 소크라테스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숫자들과 운동들을 다뤄 왔고, 모든 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별들의 크기, 간격, 궤적과 천체에 관해 아주 진지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도시들과 인간들 안에 불러들여 자리 잡도록 했고 집안으로 끌어들였으며, 삶과 죽음, 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에 관해 탐구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철학사 책에서 고대철학 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를 기점으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이들을 묶어 ‘자연철학자들’이라고 부르곤 한다. 그들의 관심이 인간 바깥의 세상과 물건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은 요즘 학문의 구분으로 본다면 소위 ‘문과’가 아니라 ‘이과’에 속하는 관심이었으며 그들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은 ‘철학’이라기보다는 ‘과학’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바깥으로 향하던 지성의 눈을 인간 안으로 돌렸다.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덕이 필요한가?’ 그야말로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인문학으로서의 철학을 하며 삶의 방식에 관해 진지한 탐구를 한 셈이다. 실제로 그도 그렇게 말했다. 다음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온 말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날마다 덕에 관해서 말하는 것,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주제가 되는 것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검토할 때에 여러분이 듣는 바로 그런 것들에 관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나는 숙고하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인간을 평가하는 참된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탐구하고 검토하며 숙고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값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자연과학이나 테크놀로지와는 구별되는 인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윤리학으로서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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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 시민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았으며 시기 질투와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몇몇 사람이 그를 고발했고, 이에 재판정에 서야 했다. 법정에서 열정적으로 변론을 펼쳤으나 재판관들로 모인 시민들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결과는 극단적이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를 아끼며 존경하고 따르던 친구와 제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죽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해 탈옥을 기획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자신은 평생 동안 죽음을 기다려왔고 일생을 바쳐 죽음을 준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게 고대하던 죽음의 순간이 왔는데 죽음을 피해 탈옥을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탈옥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최후의 순간을 그려낸 플라톤의 『파이돈』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죽게 되었다고 분하다며 화를 내는 걸 자네가 본다면, 그것이 자네에겐 그가 필로소포스(philosophos)가 아니라 필로소마토스(philosomatos)라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않겠나?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은 똑같이 필로크레마토스(philokhrematos)이고 필로티모스(philotimos)임에 틀림없네, 둘 중 하나 건, 둘 다 건!”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준비하고 기다려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죽음은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해방의 사건인데 철학은 몸의 간섭에서 영혼을 떼어내어 순수한 존재와 진리를 추구하는 작업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라는 의미에서 철학은 죽음과 비슷하다. 그러니 평생 철학을 했다는 것은 죽음을 연습하고 기다린다는 뜻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소크라테스는 위 인용문의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 소크라테스를 이해하기 위해 위 인용문에서 굵게 표시한 그리스 단어들에 집중해보자. 네 개의 단어에는 ‘필로’라는 말이 공통으로 들어 있는데 ‘사랑하다, 좋아하다, 친애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필로스(philos)’는 ‘친구’라는 뜻이 되고, ‘필리아(philia)’는 ‘친애, 우정’을 뜻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열정은 그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것이 결핍돼 있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결핍이 고통을 만들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제 ‘필로’ 다음에 쓰인 말들을 풀어보면 ‘소포스(sophos)’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와 연결된다. 그래서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지혜 사랑’인데 보통 ‘철학’으로 번역된다. 그리고 ‘필로소포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철학자’가 된다. 어떤 사람이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일까? 스스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혜의 결핍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 결핍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 무지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지혜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지혜를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의 특징이다. 그는 지혜를 추구하고 얻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끼며 그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려고 애쓰는 교육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정의에 따르면 철학자는 자신의 영혼을 육체적인 욕망과 감각에서 떼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따라서 고결한 죽음을 갈망하며 연습하는 사람이다.

반면 ‘필로소마토스(philosomatos)’에서 ‘소마(soma)’는 ‘육체’를 뜻한다. 그래서 필로소마토스는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몸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잘 가꾸는 운동선수의 모습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육체를 정신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일을 삶의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런 사람은 몸이 생명을 잃고 쓰러져 버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것이다. 영혼을 돌보고 육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 악착같이 육체적인 삶을 연장시키려고 집착하며 정신을 온통 육체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빼앗기고 만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연습하며 기다리면서 영혼을 육체의 간섭으로부터 떼어내며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지혜를 사랑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이다.

육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이 세속의 삶에 집착하는 모든 형태의 사람이 필로소마토스에 속한다. ‘필로크레마토스(philokhrematos)’가 대표적인 사람으로 그는 ‘크테마(ktema)’, 즉 ‘돈과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필로티모스(philotimos)’는 ‘티메(time)’, 즉 사람들 사이의 ‘평판과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또한 정신적인 가치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많은 무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물질적인 가치와 육체적인 욕망에 집착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면서 영혼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육체적ㆍ세속적인 것들은 그 양이 제한돼 있어 사람들 사이에 경쟁을 일으킨다. 욕망을 채우려고 혈안이 돼 있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사이에 이 세상을 맹수들의 생존경쟁 터로 만들고 만다. 이런 가치의 추구가 결국 인간 사회를 피폐하게 만든다. 반면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지혜는 정신적인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속적인, 육체적ㆍ물질적 가치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멀리하며 지혜를 지고의 가치로 존중하며 갈망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사회 대부분의 위기는 결국 인문학적인 위기이며, 사람들이 정신적인 가치인 지혜보다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욕망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며 우리의 공동체를 행복의 터전으로 만드는 출발 지점이 아닐까?
  • 김헌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필자는 서울대 불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및 서양고전학 석사, 서양고전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서양고전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 『천년의 수업』이 있으며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교수로 일하고 있다.
    kimcho@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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