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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 있는 돈의 사회학

여가의 사회학, 욜로에서 갓생까지
거대한 계획보다 사소한 실천이 뜬다

김수경 | 352호 (2022년 09월 Issue 1)
편집자주

김수경 한신대 교수가 ‘알아 두면 쓸모 있는 돈의 사회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비즈니스와 돈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레트로, 페미니즘, 채식주의 등 요즘 사람들이 주목하는 사회적 현상은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을까요. 비즈니스 리더에게 필요한 사회학적 지식을 전합니다. 당연시 여겼던 우리의 일상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Article at a Glance

산업혁명 이후 일터와 가정이 분리됐고, 여가 또한 노동으로부터 분리됐다. 임금 수준이 오르고 노동시간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여가와 소비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특히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상위 계급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낸다. 소셜미디어에도 ‘험블브래그(humblebrag)’, 즉 ‘겸손한 척하지만 자랑하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그러나 남들에게 보이는 이상적 자아와 실제 자아의 격차가 클수록 생활 만족도는 줄어든다. 최근에는 1인 가구가 증가하며 사람들이 여가 시간의 ‘소확행’을 통해 자신의 취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욜로’에서 ‘갓생’으로 여가의 트렌드가 변한 현상 역시 사소한 실천으로 자기 삶에 통제권을 갖겠다는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얼마 전 가족과 휴가를 다녀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3년간 억눌러온 여행의 충동을 더는 이기지 못해 해외로 떠났다. 10대인 딸은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모든 일정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도시 풍경은 물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슈퍼마켓에서, 식당에서, 기차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영상에 담으려고 애썼다. 숙소에서는 밤마다 영상을 편집해 소셜미디어에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 손에 늘 휴대전화를 들고 있으니 다른 물건들을 잘 흘리기도 했다. 잔소리가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모처럼의 가족여행을 망치기 싫어 꿀꺽 집어삼켰다.

그러다 문득 깨달음이 왔다. 10대의 딸과 40대의 나에게 여행이 갖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소셜미디어가 모든 것을 증명하는 10대들에게 여행은 자신의 정체성을 전시하고 증명하는 중요한 소재이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즉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것’이 아니라면 여행은 아무 의미가 없다. 40대인 내게 여행은 사회적 자아를 잠시 내려 두고 본래의 자아로 돌아가는 시간이라면 10대인 딸에게 여행은 성적이 증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사회적 자아를 증명하는 수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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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는 이처럼 사람마다 세대마다 부여하는 의미가 다르다. 여가의 트렌드가 꾸준히 변화해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산업화 세대는 노동시간이 길고 여가 시간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주로 TV 시청 등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활동이 여가의 전부였다. 그러나 경제 발전으로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여행을 떠나거나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 여가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면서 여행 수요가 폭발했다. 한국관광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해외여행자 수는 1989년 121만 명에서 코로나 직전인 2019년 2871만 명으로 증가했다. 30년 만에 약 24배가 증가한 셈이다.

노동 없이 여가도 없다,
자본주의와 여가의 의미

여가(餘暇). 한자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남는 시간’이다. 여가는 일이나 생활 필수 시간을 제외한 자유 시간으로 정의될 수 있다. 통계청이 5년마다 실시하는 ‘생활시간조사’는 하루 24시간을 크게 △잠, 식사 등 개인 유지를 위해 필요한 ‘필수 시간’ △일, 학습, 가사노동, 이동 등 해야 하는 의무가 부여된 ‘의무 시간’ △개인이 자유롭게 사용이 가능한 ‘여가 시간’으로 분류한다. 즉, 여가 시간은 24시간 중 필수 시간과 의무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인 셈이다. 2019년 조사에서 한국인은 하루 중 11시간34분을 필수 시간에, 7시간38분을 의무 시간에, 4시간47분을 여가 시간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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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는 여행, 스포츠, 독서, 콘서트 관람 등 자유 시간에 자신의 즐거움과 안위를 위해 수행하는 자발적 활동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여가 학자 조프르 듀마즈디에르(Joffre Dumazedier)는 『여가의 문명을 향하여(vers une civilisation du loisir)』에서 여가를 ‘개인이 노동, 가족, 그리고 사회적 의무에서 벗어나 휴식, 기분 전환, 지식의 확대, 자발적 사회 참여, 자유로운 창조력 발휘를 위해 이용하는 활동의 총체’로 정의했다. 여가를 ‘시간’이 아닌 ‘활동’으로 정의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적극성을 강조하지만 레크리에이션과의 구분이 모호하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는 시간을 여가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지금은 여가라는 개념이 우리 삶에 매우 당연하고도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지만 인간에게 원래부터 여가가 주어졌던 것은 아니다. 여가는 노동과 상호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여가의 의미를 분석하려면 노동의 의미 변화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를 떠올려보자. 그 시절엔 일과 여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농번기에는 하루 종일 일했고 농한기에는 일이 없었다. 일터와 가정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집에 돌아와 밥을 지어 먹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다 가도 밭에 나가 일을 했다. 시간이란 자연적 주기를 따라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일 뿐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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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일터와 가정은 분리됐다. 사람들은 아침이면 공장으로 출근하고 밤이면 가정으로 퇴근했다. 일은 정해진 시각에 시작되고 정해진 시각에 끝났다. 시간이라는 것이 비로소 통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여가가 곧바로 허락되진 않았다. 자본주의는 노동에 대한 엄격한 종교적 규율을 기반으로 번성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근원을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발견했다. 신으로부터 택함받았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뿐이며 게으름과 쾌락(여가)은 곧 신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에 대한 강박은 엄청난 생산성으로 연결돼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고 그 결과 자본주의가 번성하게 됐다.

사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전적으로 노예가 수행하는 것이었다. 노예는 가축이나 짐승처럼 인격이 부인된 존재였던 점을 고려하면 노동은 본래 ‘인간’의 몫이 아니었던 셈이다. ‘일’을 의미하는 독일어 ‘아르바이트(Arbeit)’의 어원이 본래 ‘고통’ ‘역경’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장 칼뱅(Jean Calvin)의 ‘직업소명설’로 대표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노동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꿔놓았다. 베버가 보기에 노동은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적 금욕주의에서 출발한 자본주의는 쾌락적 소비주의로 이어졌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컨베이어벨트를 생산 라인에 도입해 대량 생산의 시대를 열었다. 과거 자동차 한 대를 조립하는 데 소요되던 시간이 평균 750분에서 93분으로 단축됐다. 1914년 ‘모델T’ 자동차는 24초에 한 대씩 생산됐다. 문제는 대량 생산은 대량 소비에 의해서만 지탱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생산된 제품이 소비되지 않으면 재고가 쌓이고 불황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하다. 이런 경우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여 생산 단가를 낮춤으로써 제품을 더 많이 팔리게 하는 방안을 고민하겠지만 포드의 생각은 달랐다. 노동자들을 자동차의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2배 이상 늘려줬고 근무시간도 주 6일 근무에서 주 5일 근무로 줄여줬다. 노동자들에게 소비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을 보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소비와 여가에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노동이 아니라 소비와 여가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게 됐다.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Daniel Bell)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에서 자본주의가 금욕주의에서 쾌락주의로 이행하게 된 경로를 분석한다. 오늘날의 기업들은 개인이 성실한 근로자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쾌락과 즐거움을 좇아 물건을 구매하길 원한다. 낮에는 성실하게 일하고 밤에는 쾌락에 탐닉하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와도 같은 삶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원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벨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종교적 금욕주의를 기반으로 태동했지만 인간의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태생적으로 모순적이다. 종교적 영향력이 소멸한 세상에서 자본주의는 결국 욕망만을 동력으로 삼게 된다.

여가는 근본적으로 노동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여가는 노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 노동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바로 여가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고되다. 노동의 현장은 자본과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다. 노동은 곧 계급이기도 하다. 내가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는가는 곧 계급의 사다리를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유한계급론』에서 노동하지 않고 여가만을 즐기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에 대해 논했다. 기존의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 가정했다. 그러나 베블런이 보기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남들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별 필요 없는 고가의 사치품을 소비한다.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을 ‘베블런 효과’라 한다. 가격이 비싸지면 수요가 사라지는 게 당연한 기존의 경제학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다. 베블런이 활동한 19세기 말∼20세기 초는 급속한 산업화로 신흥 부호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철강왕 카네기, 석유 재벌 록펠러 등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이 중세시대의 귀족과도 같은 삶을 영위했다. 과시적 소비와 여가 활동은 노동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는 상위 계급의 징표가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노동뿐 아니라 여가 또한 자본주의 번성에 복무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가는 단순히 자유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가의 욕구는 결국 관광산업이나 문화산업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상품화한다. 이 지점에서 노동과 여가는 다시 만난다. 인간은 호모파베르(Homo Faber, 만드는 인간)이자 동시에 호모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이다. 이 모순된 정체성은 자본주의라는 우산 속에서 하나가 된다.

겸손인가 자랑인가,
소셜미디어가 낳은 ‘험블브래그’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모처럼 얻은 휴가에 하루 종일 잠이나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여행길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순도 100%의 내 욕망일까, 아니면 자본주의가 주입한 욕망일까? 만약 순도 100%의 내 욕망이라면 우리는 왜 기를 쓰고 여가의 기록을 남기고 타인에게 전시하는 것일까? 오늘도 소셜미디어에는 친구와 동료들이 관광지에서 찍은 근사한 사진들로 넘쳐난다. 나도 어딘가로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방에 콕 박혀 지내는 ‘방콕 휴가’는 내 삶을 졸지에 비루하게 만든다.

소셜미디어의 확산은 소비가 존재를 증명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과 호흡을 같이한다. 데이터 분석 기업 데이터리포털(Datareportal)이 최근 발표한 ‘디지털 2022: 글로벌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소셜미디어 사용자는 47억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무려 전체 인구의 59%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들은 매일 평균 2시간29분을 소셜미디어에 사용한다. 소셜미디어를 이용하는 다양한 이유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소비에 대한 대목이다. 사야 할 물건에 대한 영감 얻기(27.9%), 구매할 물건 검색하기(26.5%), 좋아하는 브랜드의 소식 보기(23.0%) 등 소셜미디어는 현대인의 소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셜미디어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상에서 우리가 소비의 유혹을 당하는 경우는 TV 광고나 신문지면 정도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순간이면 언제든 광고에 노출될 수 있다.

소셜미디어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우리 삶을 전시하는 기능이다. ‘일상을 공유한다’는 가치중립적 이유 뒤편엔 내가 얼마나 노동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수 있는지를 과시하는 기능이 숨겨져 있다. 미국의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해리스 위틀스(Harris Wittels)은 『거짓 겸손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험블브래그(humblebrag)’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겸손’을 의미하는 humble과 ‘자랑’을 의미하는 brag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겸손한 척하지만 사실은 자랑하기’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전시되는 일상은 많은 경우 ‘험블브래그’의 형태를 띤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찌는 듯한 더위에 대한 불평의 글이 5성급 호텔 수영장에서 비키니를 입고 찍은 사진과 함께 공유된다. 이것은 일상의 공유인가, 자랑인가. 험블브래그는 부와 성공을 대놓고 자랑하는 천박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

소셜미디어에 투영되는 자아는 대개 과장된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가공해 전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소셜미디어라는 전시장에 스스로를 어떻게 멋지게 전시할지 고민하는 일종의 큐레이터다. 이러한 과시의 행위는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몰라도 실제 현실과 지나치게 괴리될 경우에는 우울감을 증대시킨다. 미국 컬럼비아대 비즈니스스쿨 연구팀이 2020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만 명 이상의 페이스북 사용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실시한 결과 소셜미디어에 투영된 이상적 자아(self-idealization)와 실제 자아(authentic self-expression)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생활만족도는 감소했다. ‘너 자신이 돼라(Be yourself)’라는 조언은 온라인 공간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확행과 1인 가구,
여가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것

험블브래그는 하는 사람에게도, 보는 사람에게도 피로도를 증가시킨다. 사람들은 점차 여가 생활에서 외적인 화려함보다 내면의 평화를 좇기 시작했다. ‘소확행’ 문화의 확산이 대표적이다. 소확행(小確幸)은 본래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 그의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다.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등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소확행은 남에게 보이는 대단한 행복보단 나에게만 확실하면 그만인 소소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가의 내용을 이상적 자아보다 실제적 자아에 더 충실하게 맞추게 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21년 국민여가활동조사’에서도 이러한 소확행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여가 활동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마음의 안정과 휴식을 위해’ 등 개인적 목적을 응답한 사람이 ‘가족과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 ‘대인 관계 교제를 위해’ 등 관계 유지 목적을 응답한 사람보다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여가 활동을 함께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는 ‘혼자서’(63.6%)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가족과 함께’(28.8%) 또는 ‘친구ㆍ연인과 함께’(6.5%)라고 응답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특히 ‘혼자서’라는 응답은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12년 44.8% → 2021년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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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 문화의 확산은 인구구조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의 32%나 된다. 혼자 사는 것이 가장 흔한 가구 형태가 된 것이다. 1인 가구는 연령, 교육 수준, 소득 수준 등이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균질한 집단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동거인이 없기 때문에 온전히 자신의 취향에 집중할 수 있다.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밥(혼자 밥 먹기),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여(혼자 여행하기), 혼쇼(혼자 쇼핑하기), 혼코노(혼자 코인노래방 가기) 등 1인 소비가 자연스러운 사회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1인 가구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혼자서도 잘 지낸다는 건 결국 타인의 강제 없이도 자신의 삶에 충실하다는 또 하나의 징표이다.

이들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함께 여가를 보낼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라서, 또는 타인에게 맞추는 게 싫다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를 보여주는 현상이 ‘혼놀로그’다. 혼자 보내는 일상을 동영상으로 기록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것이다. 이들은 혼자 놀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타인에게 인증하고 댓글을 통해 격려를 주고받는다.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면서도 타인과의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

‘욜로’에서 ‘갓생’으로
여가도 노동도 지속가능해야

요즘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갓생’ 문화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갓생’은 ‘신(God)’과 ‘인생(人生)’이 합쳐진 신조어로 ‘모범이 되는 훌륭한 인생’을 의미한다. 이들은 매일 아침 30분간 조깅하기, 매일 자기 전 30분간 독서하기 등 소소한 일상을 보람차게 만들어주는 개인의 작은 성취들을 소셜미디어에 인증한다. 그중엔 ‘밥 먹고 바로 눕지 않기’ ‘일기 세 줄 쓰기’ 등 기성세대의 시선에선 “이런 것도 목표냐”고 할 만큼 사소한 것들도 많다. 바로 그 사소함이 갓생의 핵심이다. 갓생은 미래의 성공과 부를 거머쥐고자 노력하는 거창한 자기 계발과는 다르다. 오늘 하루 자신을 사랑하고 칭찬해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표와 성취면 충분하다. 갓생은 자본과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치열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 하루도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켜냈다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탕진하며 살겠다던 ‘욜로족(YOLO族)’이 유행한 게 불과 몇 년 전인데 청년들은 이제 갓생을 실천하며 삶의 소소한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부의 불평등은 이미 겉잡을 수 없이 심화되고 그 어느 정부 정책으로도 백약이 무효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흐름은 봉건사회보다 더 가파른 계급의 피라미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폭발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방법은 결국 두 가지다. 욕망을 좇거나 욕망을 줄이거나. 욜로가 전자라면 갓생은 후자의 방식이다. 어쩌면 갓생은 소비로 욕망을 잠재울 수 없다는 깨달음 뒤에 찾아오는 일종의 해탈 같은 것이다. 욜로는 지속가능성이 낮다. 갈증에 소금물을 들이켜봐야 더 큰 갈증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나마 평등한 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들을 어떻게 작은 행복들로 채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 갓생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여가는 결국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브리지드 슐트(Brigid Schulte)는 그의 책 『타임푸어』에서 해도 해도 할 일이 줄지 않고 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의 삶을 탐구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유능한 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슐트는 늘 마감에 쫓기고 육아에 허덕이는 삶에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며 백기를 들고 직접 문제해결에 나선다. 그는 ‘이상적 노동자’가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시간 강박을 조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현대인은 일상을 전쟁처럼 살지 않으면 패배한다는 지독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기 때문에 바쁘지 않으면 쉬이 불안하거나 죄책감을 느낀다.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잃고 도리어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됐을 때 인간의 뇌는 수축하고 기능이 저하된다.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여유롭게 사는 나라라고 알려진 덴마크를 찾아가 시간 빈곤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덴마크 사람들은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보낸다. ‘저녁이 있는 삶’을 신성불가침으로 만들고 이에 대한 공동체적 합의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이 아무리 빠르게 돌아가도 자신의 리듬에 맞게 시간을 운영하고 하루 일정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이들은 소박한 삶을 영위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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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dex)’에 따르면 덴마크인의 생활만족도(life satisfaction)는 10점 만점에 8.8점(3위), 워라밸은 8.6점(2위)을 기록했다. 한국의 경우 생활만족도는 3.1점(35위), 워라밸은 3.8점(35위)에 불과하다. 덴마크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1363시간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짧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76달러나 된다. 반면 한국은 1915시간이나 일하지만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1달러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치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노동 효율을 높여 개인에게 더 많은 시간 통제권을 돌려주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많이 갖는 것과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시간이 적더라도 아무런 강제나 압박 없이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여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간이 많더라도 아무런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은 여가라고 할 수 없다.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게임은 여가인가, 중독인가에 대한 입장은 분분하다. 만약 일과 후 시간을 정해 놓고 게임을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면 이는 여가라고 할 수 있지만 게임에 중독돼 하루 종일 게임만 붙들고 있다면 이를 여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관건은 통제력이다. 여가는 내 삶의 주체가 나 자신임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여가의 트렌드가 욜로에서 갓생으로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은 더 팍팍해지고 우리가 일상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실천은 사소한 것들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질보다 삶의 질이며, 내 삶을 아무렇게나 휘둘리지 않겠다는 작지만 울림 있는 저항이 필요하다. 하루 한 스푼의 행복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당신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김수경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sookim@hs.ac.kr
필자는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스탠퍼드대(Stanfo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연구교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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