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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4. CPU 시장에서 인텔 독주를 막은 ‘AMD’

범용성 대신 다양성으로 승부
설계 혁신으로 반도체 산업 룰 바꿔

조명현 | 287호 (2019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인텔의 독주를 막고 CPU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AMD의 성공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규모와 범용성 중심에서 효율과 다양성 중심으로 변화하는 큰 흐름 가운데 진정한 팹리스로의 전환을 통해 공정 규모의 한계를 극복했다.
2. 시장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춰 칩렛 기술 기반의 R&D 전략을 추진해 핵심 제품군의 설계 효율을 높이고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 신제품의 출시 주기를 단축시킴으로써 점유율을 확대해나갔다.

필자 주
이 원고의 작성에는 키스 위텍(Keith Witek) AMD 전(前) 부사장(Corporate Vice President)이 도움을 줬기에 감사를 표합니다.



2015년만 해도 PC와 서버 시장에서 인텔 CPU의 독주는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서버 CPU 시장에서 인텔의 점유율은 99%에 육박했다. 반면 경쟁자 AMD(Advanced Micro Devices)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매출은 전년 대비 28% 감소했고, 6억6000만 달러의 손실을 기록했다. 무디스는 AMD를 투자부적격 기업으로까지 분류했다. 하지만 4년 후인 2019년, AMD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주가는 20배 이상 뛰었으며 제품 성능은 인텔을 추월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바이두 등 영향력 있는 데이터센터 업체들이 AMD 제품으로 빠르게 선회하고 있다. 수년 전만 해도 도산할 것 같았던 회사가 이젠 인텔이 수십 년간 지켜온 왕좌를 위협하고 있다.



AMD의 이 같은 약진은 너무나 극적이어서 많은 사람이 그 비결을 궁금해 한다. 2014년부터 조직을 이끌어 온 CEO 리사 수의 리더십을 비결로 꼽는 이도 있고, AMD 회생의 결정적 기술인 Zen 아키텍처와 이를 개발한 짐 켈러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게임 콘솔용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키고 리사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준 전임 CEO 로리 리드의 역할도 컸다. 또 제품 개발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고 알려진 마크 페이퍼마스터 CTO의 공헌도 높이 평가돼야 마땅하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포진해 있던 AMD였지만, 절대적 약세를 극복하고 최강 인텔에 도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걸출한 영웅은 변화하는 시대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기회를 찾고 남다른 업적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AMD 역시 30여 년 만에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 나타난 변화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규모에서 효율로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변화: 규모와 범용성에서 효율과 다양성으로

기술과 산업의 변곡점에서 필승의 전략을 이끌어내는 것은 이 시대 모든 경영인의 숙제다. AMD의 성공 비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본질과 그 변화의 큰 흐름을 이해해야 한다.

오랫동안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본질은 ‘규모’였다. 개발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는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천억 원이 넘는 비용이 투입되고, 시제품을 확보하는 데 보통 1년이 넘는 기간이 소요된다. 신제품의 사업성 확보를 위해 수백만 개, 때로는 수천만 개에 이르는 판매량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 같은 규모의 실현에는 ‘범용성’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제품이 다양한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판매량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객마다 원하는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범용성을 확보하려면 되도록 다수의 기능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최적화시켜야 한다.

다양한 기능의 구현은 결국 반도체 성능의 극대화로 귀결된다. 같은 조건에서 성능을 극대화해야 기존 기능에 영향을 주지 않고 더 많은 기능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반도체의 성능은 흔히 동작 속도(Performance), 전력 효율(Power), 크기(Area), 소위 PPA로 이야기한다. 즉, 규모와 범용성이 중요한 시스템 반도체는 ‘PPA의 극대화’가 경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PPA 극대화를 통해 범용성을 확보하는 낡은 게임의 법칙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먼저, 모바일, 자동차, IoT 등 신규 응용 기술의 등장으로 고객의 요구 조건이 더욱 다양해졌다. 이는 다양한 고객에게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범용성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더불어 반도체 공정 기술이 갈수록 고도화되면서 신규 공정을 사용해 반도체를 개발하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범용성의 확보에는 신규 공정의 막강한 성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반도체 업체들은 요구되는 범용성의 범위가 커진데다 신규 공정의 적용까지 어려워지는 이중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일부 회사들은 규모가 아닌 ‘효율’에서 활로를 찾았다. 규모를 바탕으로 모두가 만족하는 최고의 기성품을 만드는 것이 기존 전략이었다면 타깃 고객을 위한 맞춤형 설계로 제품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2017년 인텔이 17조5000억 원에 인수한 ‘모빌아이’가 대표적인 사례다. 모빌아이는 지능형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을 위한 반도체와 시스템 개발에 집중했다. 모빌아이의 반도체는 오로지 자사의 ADAS 기술에 최적화돼 설계됐기 때문에 기존의 범용 자동차 반도체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같은 성능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작은 스타트업 모빌아이는 ADAS 반도체 시장을 개척함으로써 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반도체 개발의 초점은 범용성에서 ‘다양성’으로 이동했다. 다양한 반도체가 개발될수록 개별 제품의 판매 규모는 줄어들기 때문에 개발 비용을 상승시키는 극단적인 PPA 극대화보다는 타깃 고객의 요구 조건에 초점을 둔 빠른 개발이 더욱 중요해졌다. 즉, 효율과 다양성이 중시됨에 따라 반도체 산업에서 PPA보다 ‘Time to Market(TTM)’이 가장 핵심적인 경쟁력 지표로 떠오르고 있다.

규모와 범용성의 시대에서 효율과 다양성의 시대로의 전환은 이제 막 시작됐다. 여전히 반도체 개발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판매량 확보를 위한 제품 전략과 PPA 극대화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 또한 필수적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이 가속화될 것은 자명하다.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산업의 역사에서 수요의 다변화와 개발 리스크 증대는 규모와 범용성 중심 전략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한 변혁의 흐름 가운데 AMD는 어떻게 투자 부적격 기업에서 인텔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그 첫 번째 비밀은 사업 모델의 진화에 있다. AMD는 진정한 팹리스로의 전환을 통해 인텔의 규모에 맞설 수 있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시스템 반도체 사업 모델과 그 특성을 알아야 한다.


IDM의 강자 인텔: 수직 통합 기반의 규모와 PPA 극대화

시스템 반도체 사업 모델은 크게 ‘IDM’과 ‘팹리스’로 구분된다. 이 둘을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반도체 제조 공장을 가리키는 ‘팹(fab)’이 있으면 IDM, 없으면 팹리스이다. 팹리스는 이름 그대로 팹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도체 상품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역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팹리스는 반도체 설계를 마친 뒤, 그 제조를 다른 업체에 위탁하는데 이런 반도체 전문 제조 업체를 ‘파운드리’라고 한다. 다시 말해, 시스템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를 수직 통합한 사업 모델이 IDM, 영역별로 전문화한 것이 팹리스-파운드리 사업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인텔은 대표적인 IDM 업체다. 인텔의 막강한 반도체 제조 공정 기술은 인텔 CPU 경쟁력의 기반이 됐다. 반도체의 크기가 2년마다 2배로 작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을 창시한 고든 무어가 바로 인텔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이다. 그만큼 인텔이 공정 기술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사 제품의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는 이야기다. 설계와 공정을 서로에 맞춰 최적화하면서 인텔 CPU는 언제나 압도적인 PPA 경쟁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반도체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고 팹을 건축하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팹을 건설하는 데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지만 사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IDM 사업 모델이 가지는 리스크가 과대해진 것이다.



팹리스의 출현: 설계와 공정의 분리

팹 건축 비용의 증가로 IDM 사업 모델의 리스크가 커지고, 이로 인해 많은 반도체 기업이 팹리스로 전향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1987년 모리스 창은 세계 최초의 전문 파운드리 업체인 TSMC를 설립하고, 이후 UMC, 차타드, 타워 같은 업체들이 뒤를 이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팹을 제공하는 파운드리의 등장에 힘입어 많은 반도체 업체는 새로운 공정 개발을 포기하고 설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업 모델의 전문화는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각각 설계와 공정이라는 전문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팹리스는 공정에 대한 막대한 투자 부담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술 로드맵을 유연하게 펼쳐가면서 연구 개발 투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갈수록 응용 기술이 다변화되면서 팹리스의 경쟁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래픽, 모바일 같은 신규 시장에서 새롭고 다양한 제품으로 경쟁하기에 IDM의 거대한 수직 통합 구조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면이 많았다. 이로 인해 그래픽 프로세서 시장은 엔비디아(NVIDIA),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은 퀄컴과 같은 팹리스 업체들이 인텔을 제치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팹리스로의 전환, 규모의 인텔 공정을 꺾다

AMD 역시 처음에는 반도체를 직접 제조하는 IDM이었다. 하지만 2008년 아부다비 정부의 국부 펀드인 무바달라가 AMD의 팹을 인수해 ‘글로벌파운드리’를 설립하게 된다. 즉, AMD는 자사의 팹을 매각하면서 팹리스 업체가 된 것인데, 이때만 해도 AMD를 진정한 팹리스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팹 매각 시 글로벌파운드리와 체결한 계약 때문에 향후 물량 대부분을 글로벌파운드리에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AMD는 팹리스이면서도 글로벌파운드리의 공정 개발 리스크에 그대로 노출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흘러 2016년 무렵, 반도체 공정 기술은 14/16㎚(나노미터, 1㎚=10억분의 1㎚)를 넘어 10㎚와 7㎚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텔의 공정 경쟁력은 막강했다. 특히 인텔과 같은 CPU 시장에서 경쟁하는 AMD에, 인텔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공정 경쟁력은 가장 넘기 힘든 산이었다. AMD가 의존하는 글로벌파운드리가 인텔 이상의 공정을 개발하지 못하는 이상 AMD가 인텔을 뛰어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2016년 말, 상황은 급변한다. AMD의 새 사령탑을 맡은 리사 수가 글로벌파운드리와 역사적인 재협상을 단행한 것이다. 이 재협상으로 AMD는 글로벌파운드리에 미화 1억 달러를 지급하고, 무바달라에 AMD 지분 9.1%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도 넘겨야 했지만 그 대신 다른 파운드리 업체들에도 자유롭게 생산을 맡길 수 있게 됐다. 이렇게 AMD는 팹 매각 8년 만에 진정한 팹리스로 사업 모델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절묘하게도 이와 동시에 인텔의 공정 개발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인텔은 당초 10㎚ 기반의 캐넌 레이크 CPU를 2016년에 양산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수차례에 걸쳐 지연돼 2019년 말인 지금조차도 인텔 10㎚ CPU의 본격적인 양산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텔이 공정 개발 계획에 차질을 겪는 동안 경쟁력 있는 파운드리 업체들은 차례차례 기술을 혁신해 나갔다. TSMC는 2018년 인텔 14㎚ 대비 집적도가 38% 향상된 7㎚ 공정 개발에 성공했고, 이듬해 삼성파운드리는 EUV 기술 적용을 확대해 TSMC 7㎚보다도 집적도가 13%나 향상된 7㎚ 공정을 가동했다.

이로 인해 AMD는 보다 유연하고 효과적인 공정 전략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개발 로드맵을 고려해 TSMC 7㎚ 공정을 선택한 AMD는 2019년 여름 아직 14㎚에 머물러 있는 인텔을 제치고 최초의 7㎚x86 CPU 출시에 성공했다. 이 같은 공정상의 우위는 AMD가 인텔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결정적 전기가 됐다.

인텔 10㎚ 공정의 지연은 우연일 수도 있다. 향후 공정에서 인텔이 다시 승기를 잡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신규 공정 개발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지금, 자사 제품만을 위해 설계와 공정을 통합해 PPA를 극대화하는 IDM 전략의 막대한 리스크는 이미 증명된 셈이다. AMD의 진정한 팹리스 사업 모델로의 전환은 공정 리스크를 뛰어넘고 인텔의 규모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하지만 막강한 인텔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무기가 필요했다. 변혁의 흐름이 요구하는 효율과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AMD의 두 번째 비밀은 설계 방법론의 혁신이다.


효율과 다양성을 중시하는 설계로

AMD의 설계 방법론 혁신의 중심에는 칩렛(Chiplet) 기술이 있다. 이는 여러 개의 작은 단위 반도체, 즉 칩렛을 연결해 더 높은 성능을 얻기 위한 기술이다. 칩렛에 반대되는 개념은 모놀리식 IC다. 하나의 커다란 반도체로 모든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보를 처리하는 개별 단위인 코어가 4개 들어 있는, 쿼드코어 CPU를 설계한다고 해보자. 칩렛 설계에서는 각각의 코어를 하나의 칩렛으로 구현한 뒤 네 개의 칩렛을 하나로 연결해 제품을 개발한다. 반면 모놀리식 설계에서는 코어 4개가 들어 있는 하나의 반도체로 제품을 개발한다.



CPU가 처리하는 정보는 같은 반도체 안에서 이동할 때 가장 빠르고, 전력 소비도 적다. 따라서 모놀리식 IC가 칩렛 기반 CPU보다 PPA 성능 극대화에는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생산 비용을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모든 반도체는 제조 공정의 편차로 인해 불량이 발생하고, 이러한 불량이 발생할 확률은 반도체 면적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4개의 칩렛을 연결하는 제품의 제조원가는 제품 크기와 공정 성숙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모놀리식 IC 대비 20%에서 2배 이상 저렴해진다.

생산 비용뿐 아니라 개발 비용도 마찬가지다. 쿼드코어 CPU뿐 아니라 고성능 옥타코어, 개인용 듀얼코어 CPU도 함께 출시해야 된다면 어떨까? 모놀리식 IC라면 세 개 제품 모두 개별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칩렛 방식이라면 단지 칩렛을 2개 연결하면 듀얼코어, 4개 연결하면 쿼드코어, 8개 연결하면 옥타코어를 개발할 수 있기 때문에 세 개의 제품 개발을 위한 설계 비용을 현저하게 낮출 수 있다.

이처럼 모놀리식 IC는 반도체 개발의 비용과 리스크는 크지만 PPA 극대화에 유리하고, 칩렛은 반도체 개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유리하다.

짐작하겠지만 최근의 인텔 CPU는 모놀리식 방식의 제품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설계 비용과 기간보다 개별 제품의 PPA 극대화를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텔은 서버, PC, 태블릿 등 각 응용을 위한 CPU를 따로따로 개발했다. 각각의 CPU에 많은 공통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버 CPU는 서버에 맞는 크기로, 태블릿 CPU는 태블릿에 맞는 크기로 별도의 설계를 한 것이다. PPA는 극대화됐지만 많은 리소스가 투입될 뿐 아니라 특히 면적 증대에 따라 수율 확보가 어려워 제조 원가가 상승했다.

임직원 수가 인텔의 10분의 1에 불과한 AMD는 모놀리식 IC로 제품을 횡전개할 수 있는 리소스가 없었다. 따라서 AMD는 설계의 효율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적은 리소스로 수요의 다양성을 빠르게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했다. 마침 2010년 이후로 어드밴스드 패키징, 즉 여러 개의 반도체를 하나의 패키지 안에서 수직으로 연결함으로써 성능을 끌어올리는 기술이 발전해 칩렛 기술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흐름에 주목한 AMD는 칩렛 기술 기반의 R&D 전략을 수립, 새로운 Zen 아키텍처에 칩렛 구조를 채택했다. 그 결과 AMD는 핵심 제품군의 설계 효율을 높이고 수율로 인한 제조 원가 상승을 억제함으로써 가격 경쟁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리사 수의 AMD는 7㎚ CPU를 출시할 때 서버와 PC 제품을 거의 동시에 선보였는데 엔지니어의 숫자가 충분히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의 TTM을 크게 단축했다. 특히 지연되고 있는 인텔 10㎚ 제품과 출시 시점의 간격이 늘어나면서 AMD 7㎚ 제품은 빠른 속도로 점유율을 넓히고 있다.

이처럼 AMD는 설계 방법론의 혁신을 통해 효율과 다양성을 확보했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혁신이 기존처럼 개별 제품의 PPA 극대화만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으로 다양성 증대와 빠른 TTM을 위한 설계 방법론의 변화는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 반도체의 미래: 새로운 개척 시대가 열리다

필자는 AMD의 극적인 부활의 비밀을 사업 모델의 진화와 설계 방법론의 혁신에서 찾았다. AMD는 진정한 팹리스로 전환함으로써 인텔의 공정 경쟁력을 극복할 수 있었고, 칩렛으로 대표되는 설계 효율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빠른 제품 전개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정 이 같은 전략이 통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규모에서 효율로, 범용성에서 다양성으로, PPA에서 TTM으로 변화하는 시스템 반도체 산업 내 커다란 변혁의 흐름이었다. 이 같은 변혁의 흐름은 이제 막 시작됐다. 지난 30년간의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바꿀 이 변혁의 흐름은 깊고 강력해 AMD뿐 아니라 더 많은 업체에 더욱 큰 혁신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혁신의 사례는 이미 많은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오픈 소스 CPU 기술인 리스크파이브(RISC-V)는 그동안 특정 기업들의 전유물이었던 CPU를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자유롭게 변형해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다양한 응용을 통해 자신에게 꼭 맞는 최적화된 반도체를 빠르게 설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는 비영리단체인 리스크파이브 파운데이션에는 설립 4년 만에 200개 넘는 업체와 연구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CPU 외에도 오픈 소스 하드웨어를 통한 반도체 개발 효율화를 위해 올해 설립된 CHIPS 얼라이언스에는 구글, 알리바바, 웨스턴디지털이 참여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미래의 시스템 반도체를 효율적으로 설계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기존의 반도체 설계 툴(EDA) 업체들도 사용한 만큼만 비용을 내는 클라우드 사업 모델 등을 도입해 팹리스들이 보다 효율적으로 반도체를 개발하도록 도움으로써 새로운 성장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체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향방을 바꾸고 있는 이런 거시적 흐름을 이해하고 이에 상응하는 세부 전략을 수립, 빈틈없이 실행한 기업이 기존 반도체 강자들을 제치고 새로운 산업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필자소개 조명현 SemiFive CEO brandon@semifive.com
필자는 서울대 전기공학부를 졸업하고 MIT에서 반도체 설계 분야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스턴컨설팅그룹에 입사해 반도체 분야 핵심 멤버로 다수의 글로벌 반도체 기업과의 전략 프로젝트를 주도했으며, 2018년 시스템 반도체 플랫폼 전문 기업 SemiFive를 설립, 현재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SemiFive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RISC-V CPU를 창시한 실리콘밸리 기업 SiFive가 출자한 한국의 독립 법인이다. 오픈 아키텍처인 RISC-V를 기반으로 고비용의 반도체 설계 과정을 효율화하는 기술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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