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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과학동아 공동기획 Science Review

스티븐 호킹의 일생

우리에게 천재 물리학자로 알려진 스티븐 호킹이 2018년 3월 14일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우주론의 한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인물이었고, 불치병으로 알려진 루게릭병과 50여 년을 싸워 이긴 전사였다. 또, 두 번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외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딱 300년이 되던 날 태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에 생을 마감한, 탄생부터 죽는 순간까지도 특별했던 그의 76년 일생을 조명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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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1월 8일 영국 옥스퍼드 출생
1959 17세에 옥스퍼드대 입학
1962 옥스퍼드대 졸업 뒤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입학해 상대론과 우주론 연구 시작
1965 제인 와일드와 결혼
1966 논문 ‘확장하는 우주의 성질들’로 케임브리지대 박사학위 취득
1970 블랙홀과 빅뱅의 존재를 증명. 우주 팽창의 시작에는 무한대의 밀도를 가진 ‘특이점’이 존재한다고 밝힘
1974 ‘호킹 복사(블랙홀 증발)’ 이론 발표. 블랙홀이 호킹 복사를 통해 질량을 상실한다는 내용. 이론물리학계 스타로 발돋움. 사상 최연소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
1979 케임브리지대 루카스 석좌교수 임명
1983 '무경계 우주론’을 발표. 우주는 공간적인 부피는 있지만 물리적인 경계가 없다는 이론
1988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양 과학서 ‘시간의 역사(Brief History of Time)’ 집필. 세계적으로 1000만 부 이상 판매
2001 ‘호두 껍질 속의 우주’ 집필
2004 자신의 블랙홀 이론 1차 수정.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정보가 다시 나올 수도 있음을 인정. 이 문제를 두고 내기를 했던 존 프레스킬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에게 백과사전 선물
2014 블랙홍 이론 2차 수정
2018 3월 14일 76세로 별세


2018년 3월 14일, 우주론에 한 획을 그은 스티븐 호킹 박사가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비운의 천재’로 불리던 호킹 박사는 21세부터 근육이 점차 힘을 잃어가는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특이점 정리, 호킹 복사 이론 등 우주론의 역사에 굵직한 이론들을 남기고 떠났다. 과학계의 큰 별이었던 호킹 박사를 애도하며 그의 일생을 돌아봤다.

다른 이들보다 늦었던 어린 시절

호킹은 1942년 1월 8일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딱 300년이 되던 날이었다(이는 호킹의 자서전 ‘나, 스티븐 호킹의 역사’에서 본인이 쓴 내용이다). 호킹의 가족은 원래 런던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그때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를 폭격하지 않겠다는 독일의 약속에 잠시 옥스퍼드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생물학자였던 호킹의 부친은 장차 호킹을 영국의 명문대로 손꼽히는 옥스퍼드대에 진학시킬 생각으로, 그가 네 살이 되던 해부터 런던 교외에 있는 사립학교인 바이런 하우스 스쿨에 보냈다. 당대의 기준에서는 매우 진보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욕심과는 다르게 호킹은 학습 능력이 더딘 편이었다. 여덟 살이 돼서야 글을 읽을 줄 알았으니 말이다(오히려 그의 여동생 필리파 호킹은 네 살에 깨우쳤다고 한다).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는 친구들이 사탕 주머니를 걸고 호킹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걸 정도였다. 그의 부모 역시 옥스퍼드대 진학을 단념했다고 한다.

하지만 호킹은 보란듯이 열일곱 살의 나이로 옥스퍼드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비록 대학에서 눈에 띌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조정 경기의 키잡이로 활약하며 많은 여학생들의 눈길을 받는 행복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대학시절이 큰 역할을 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훗날 우주론의 특이점 이론을 함께 연구한 로저 펜로즈 옥스퍼드대 교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의 시작

대학을 졸업할 무렵 호킹은 공무원에 지원했지만, 필기 시험 날짜를 잊어버려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이론물리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내가 공무원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나는 장애인으로서 공무원 생활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962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이때부터 우주론에 관심이 많았다. 저명한 영국의 천문학자였으며 정상우주론의 옹호자였던 프레드 호일을 지도교수로 신청했지만, 안타깝게도 데니스 시아마라는 교수를 지도교수로 배정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호킹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됐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시아마 교수는 호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호킹은 훗날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데 큰 자극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가 흥미를 보인 분야는 우주론과 기본입자물리학이었다. 당시 기본입자물리학은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였던 반면 우주론은 1930년대의 연구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재력 있는 분야라고 판단한 호킹은 과감하게 우주론을 선택했다.

그가 몸의 이상을 느낀 건 바로 이때부터였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하던 해부터 몸놀림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병원에서 그가 들은 말은 “맥주를 끊으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로 이사한 이후 증세가 점점 악화됐고, 어느 저녁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진 후 스스로 일어나지 못했다. 정밀 검사를 받은 그는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게 됐고, 수년 안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한 살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충격에 빠져있던 그가 작게나마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건 훗날 부인이 된 제인 와일드와의 만남이었다. 호킹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직장을 구했다. 케임브리지대의 곤빌 앤 케이어스 칼리지 연구원직이었다. 그리고 그는 1965년 7월 결혼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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