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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Philosophy

디지털 세상의 모든 건 변형된 것들 악덕이 아닌 ‘다른 형태’로 인식해야

박영욱 | 229호 (2017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디지털 환경에서 어떤 것이 원본이고, 다른 것이 원본을 모방했는가 하는 인과적 선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형된 것들이기 때문. 원본은 단지 ‘원형(prototype)’, 즉 변형을 위한 일종의 플랫폼 형태에 불과할 뿐 우위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선 인공지능, 로봇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을 모방한 ‘복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하고 있는가. 아니,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관계도 ‘상사성(서로 비슷함, similarity)’을 띤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로봇은 분명 인간과는 비슷하지만 다른 형태의 독립된 존재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니다.



라차리니는 왜 디지털 작업을 했는가?

정육면체 모양의 방에 들어서면 사방의 벽은 물론 천장과 바다까지도 온통 흰색뿐이다. 다만 사방의 각 벽면에는 중앙에 하얀 해골이 하나씩 걸려 있다. 이 작품은 로버트 라차리니(Robert Razzarini)가 2001년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서 주최한 ‘비트스트림(Bitstream)’이라는 전시회에서 설치된 것으로, 작품명은 말 그대로 ‘스컬(해골·Skull)’이다. 레진으로 만들어진 이 해골이 사람의 두개골임은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이 해골은 어딘가 모르게 기이하게 변형된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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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해골의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홀바인(Hans Holbein)의 ‘대사들’(1533)을 떠올릴 것이다. 홀바인의 그림 ‘대사들’ 하단 중앙에는 그 유명한 왜상(anamorphosis)이 존재한다. 얼핏 보면 이 왜상은 말 그대로 ‘왜곡된 상’(distorted image)처럼 기이하게 보인다. 이 왜상의 정체는 정면이 아닌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고개를 숙이고 바라볼 때 비로소 드러난다.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된 이 그림을 관람하는 관객들도 다른 그림을 볼 때와 달리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몸을 이동해 하단의 중앙에 있는 이 왜상의 정체를 확인하려 든다. 이윽고 이들은 온전한 형태의 해골을 발견하고는 만족감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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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바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라차리니의 해골을 보면서 자연스레 이 그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변형된 형태의 해골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이 유사한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홀바인의 해골이 2차원의 평면에 그려진 회화의 이미지라면 라차리니의 해골은 3차원의 조각 작품이라는 점이라는 정도가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두 작품의 차이는 2차원적 이미지와 3차원적 이미지라는 시각적 차원의 문제에 불과할까?

홀바인의 그림은 정면에서 보면 왜곡된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오른쪽에서 보면 멀쩡한 해골의 모습이 나타난다. 원래 ‘왜상(歪像·anamorphosis)’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기이한 형태를 띠지만 특정한 관점이나 광학적 장치를 이용할 경우 지극히 정상적인 사물의 모습으로 복원되는 이미지이다.

<그림 1>에서 보듯이 바닥에 펼쳐진 이미지는 매우 기이하고 혼란스럽지만 그림의 상단 중앙부에 원통형의 거울을 올려놓으면 그 거울에는 멀쩡한 건물의 모습이 드러난다. 왜상은 항상 복원력을 전제로 하며, 특정한 원형의 이미지를 전제로 한다. 홀바인의 그림에서 해골이 왜상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원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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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서 라차리니의 ‘해골’은 복원의 시점 따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전시를 보러 온 적잖은 관객들이 몸을 비틀거나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어 올려다보는 등 이곳저곳 옮겨 다니면서 해골을 관찰한다. 홀바인의 해골을 떠올리고 정상적인 해골의 이미지가 보이는 특정한 시점을 찾으려는 행위다. 그러나 관객의 그러한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라차리니의 해골은 어느 곳에서 봐도 관객들이 생각하는 원형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복원의 시점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라차리니의 해골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지닌다. 미술에서 왜상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르네상스 시기의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물을 과학적이고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원근법’이다. 원근법은 눈에 보이는 대상의 원근감을 기하학적 원칙에 따라서 정밀하게 나타내는 회화의 기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근법이 ‘소실점’이라는 기준, 즉 하나의 특정한 시점을 전제할 경우에 성립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특정한 시점을 살짝 바꾸어 놓으면 일상적인 눈에는 왜곡된 형태로 보이지만, 또 그 특정한 시점만 찾아낸다면 복원이 가능한 왜상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왜상을 뒤집어진 원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라차리니의 해골은 뒤집어진 원근법도 아닐뿐더러 우리가 정상적인 해골이라고 부르는 원형적 이미지로 복원할 수 있는 어떤 시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바인의 해골을 떠올리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객의 시도는 실망감을 남길 수밖에 없다. 라차리니의 작품은 전통적인 왜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차리니의 독특한 작업방식도 새로운 세계를 암시한다. 이미 말했듯이 라차리니의 작품은 레진으로 만들어져 있다. 독특한 점은 그가 이 해골의 이미지를 손으로 빚지 않고 디지털 작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상적인 해골의 이미지를 3차원의 그래픽 이미지로 샘플링한 다음 이 이미지를 디지털 프로그램을 통해서 변형시킨다. 원근법에서 사용하는 복잡한 기하학적 계산을 하지 않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미지를 변형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래밍으로 변형시킨 디지털 이미지를 선택, 현실의 이미지로 제작한다.

라차리니의 작품에서는 변형된 이미지의 ‘존재론적 지위’가 바뀐다. 전통적으로 왜상은 변형된 상으로서 그 자체로는 정당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원래의 이미지에 대한 복원을 전제한다. 이에 반해 라차리니의 이미지는 복원돼야 할 이미지가 아니며 그 자체가 독립된 지위를 지닌다. 물론 라차리니의 이미지 또한 실물의 해골 이미지를 변형시킨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디지털 변형을 통한 이미지는 유전자 변이에 의한 왜상이나 이물질이 아니며 정상적인 이미지로부터 일탈한 비정상적 형태도 아니다. 그 자체가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으며 비교돼야 할 필요도 없는 자립적인 존재다. 이런 점에서 라차리니의 작품은 과거와 전적으로 다른 디지털 시대에 ‘변형’이 지닌 새로운 의미를 함축한다.



다빈치가 디지털 작업을 했다면?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의 내부 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애초에 소수의 수도승들을 위해 그들의 식당 벽에 그려진 이 작품은 더 이상 소수 엘리트 성직자들을 위한 호사품이 아닌 인류 전체를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애석하게도 다빈치의 이 위대한 벽화의 생명은 무한하지 않으며 현 상태로 최대한 노력해 보존해도 그 수명이 몇백 년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에는 훌륭한 복구전문가들이 많이 존재하므로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복구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무리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더라도 완벽히 복구하기란 불가능하다. 복구하기 위해서 손을 댄 순간 이미 작품은 파괴되므로 최선의 복구는 복구하지 않고 변형을 늦추는 일이다.

만약 다빈치가 붓으로 벽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전자 스크린에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작업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현재와 같은 복구의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작품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설령 원래의 파일이 분실돼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복원 가능할 것이다. 어차피 스크린에 비친 디지털 이미지는 정보화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벽에 칠해진 물감은 아무리 분석해도 완벽하게 정보화할 수 없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은 정보화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신비함을 지닌다. 따라서 어떤 유사품도 유사품일뿐더러 원작의 변형이란 곧 복구될 수 없는 훼손을 의미할 뿐이다. 작가 외에 작품을 변형하거나 덧칠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변형이란 미덕이 아닌 악덕인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어떠할까? 변형은 결코 악덕이 아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혹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이미지를 변형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만약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싶다면 클릭 한 번으로 저장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자유로운 변형을 통해 애초에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도 있으며, 원래의 상태를 훨씬 능가하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최초의 상태라고 믿어지는 원형은 그저 여러 개의 버전 중 하나일 뿐이지 반드시 되돌아가야 할 복원의 지점이 아니다.

설사 복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기술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폴트’ 버튼 하나면 다 해결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에서 디폴트의 상태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경제적인 폐허, 채무불이행 상태인 ‘디폴트’ 상태와는 다르다. 이에 반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디폴트란 애초에 정해놓은 값으로 복원하는 것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사용하던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 ‘Cake Walk’의 화면 상단 우측 작업 줄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미지를 담은 아이콘이 있었다.

필자는 이 아이콘의 이미지가 뭉크의 ‘절규’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는 못했다. 그 비밀은 아이콘을 클릭하고 나서야 밝혀졌다.

아이콘의 의미는 다름 아닌 원래의 상태, 즉 디폴트 값을 의미했다. 작업을 하다보면 원래의 상태보다도 훨씬 더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뭉크의 작품 ‘절규’ 속 인물처럼 ‘멘붕(멘탈 붕괴)’에 빠질 것이다. 멘붕에 빠졌을 때 이 아이콘 한 번만 클릭하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는 달리 보면 얼마든지 과감하고 자유롭게 현재의 상태를 변형시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약 없이 무한히 변형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되돌리면 된다.

물론 이때 되돌아온 상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원본의 상태가 아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원본이란 반드시 되돌아와야 하는 기준점이며 변형은 임시적인 일탈이다. 이에 반해서 디지털 환경에서 디폴트 값은 무한한 변형을 위한 그저 가장 기본적인 플랫폼의 상태에 불과하다. 거꾸로 디폴트 상태보다는 변형된 상태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디지털 환경에서는 변형이라는 것의 지위가 완전히 달라진다. 원본은 더 이상 변경 불가능한 원래적인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 역시 무수히 많은 변형된 것들과 동등한 지위를 지닌 하나의 버전에 불과하다.



디지털 세계는 ‘유사성’(닮음)이 아닌 ‘상사성’(비슷함)의 세계

무한한 변형과 복제의 가능성은 디지털 환경에 대한 우려를 낳는 요인 중 하나다. 보수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 모두에게 마찬가지다. 진보주의자들마저 디지털 환경의 고유한 변형 가능성을 두려워한다는 주장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이 믿는 진보란 무조건적인 변화가 아니라 원래 사물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나 취지에 적합해지는 변화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들 역시 원본의 상태를 전제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원본과 전혀 무관한 변형을 위한 변형이란 진보가 아닌 혼란으로 여긴다.

예를 들면 디지털 사진의 경우를 살펴보자. 디지털 사진이 일반화된 오늘날 변형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의 이름을 따서 ‘뽀샵’이라고도 부르는 리터치(retouch)의 변형 과정은 사진을 찍는 행위보다 변형하는 일이 더 중요함을 보여준다. 과거 아날로그 사진의 경우에 사진은 찍는 행위가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디지털 환경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디지털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찍는 행위가 아닌 리터치, 즉 변형의 행위다. 좋은 증명사진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는 잘 찍는 사진관을 찾았다면 오늘날에는 이른바 ‘뽀샵’을 잘하는 사진관을 찾는다. 이러한 변화에 거부감을 갖는다면 보수주의자일 테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일 것이다.

단, 진보주의자들 역시 변화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변형, 즉 리터치 작업이란 어디까지나 원본을 완전히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훨씬 더 좋아 보이게 만드는 일에 제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는 경건한 진보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울타리를 넘어서기 마련이다. 이는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대부분의 대학과 마찬가지로 필자가 재직하는 대학 역시 온라인 출석부에 해당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사진출석부가 있다. 사진출석부의 목적은 출석한 학생과 실제 등록한 학생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얼굴을 익히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진출석부는 이러한 목적에 유용하기는커녕 방해가 될 뿐이다. 사진출석부에 있는 학생들의 사진과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진보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도 이러한 현상마저도 쉽게 수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긍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디지털 환경은 현실을 바꿀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가치판단을 떠나서 변형 가능성이 사진의 존재가치를 훼손한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가치를 바꾸었다고 보는 편이 현실적일 듯하다. 디지털 사진의 출현은 사진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것이 아니라 사진이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매체라는 관념을 바꾸어놓았다. 어쩌면 회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누렸던 자유, 현실의 재현이라는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사진이 뒤늦게 얻은 것일지 모른다. 예를 들면 사진은 이제 더 이상 증명사진의 역할을 할 수가 없게 될지도 모른다. 증명사진이 실재 인물을 증명하기 위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변형이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로 제한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까지의 변형이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디지털 환경에서 어떤 것이 원본이고 다른 것이 원본을 모방했는가 하는 인과적 선후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디지털 환경에서 원본은 존재론적 우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원본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지 ‘원형(prototype)’의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원형이란 그 자체가 완결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는 변수를 첨가해 변형하기 위한 일종의 ‘플랫폼’에 불과하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어떤 이미지들이 동질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뭔가 서로 공통의 패턴, 즉 같은 플랫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변형된 모조품인지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며 불가능한 것이다. 원형이란 변형체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는 그저 공통된 기반에 불과하다.

이는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하는 ‘상사성(서로 비슷함·similarity)’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작품을 분석한 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상사성’의 개념을 ‘유사성(닮음·resemblance)’의 개념과 대비해 설명한다. ‘유사성’이란 닮음의 관계로서 어떤 것이 어떤 다른 것을 닮았다고 말할 때 성립한다. 가령 이 아이는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할 때 이 아이의 외모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아버지의 유전자와 닮았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때 아버지의 유전자는 원본 유전자이며 아이의 유전자는 변형된 유전자다. 푸코는 이렇게 비슷한 두 개의 항에서 선후관계를 따지는 것을 전통적으로 계승된 고정관념으로 이해했다. 서로 비슷한 무엇이 있다면 그들 간에 원본과 복제가 존재한다는 것이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푸코에 따르면 글자와 이미지의 관계 또한 이러한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이미지를 글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복제물로 간주하든지, 혹은 거꾸로 글을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한 복제물로 간주하든지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선택했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이러한 관행을 비틀고 있다고 봤다. 누가 보기에도 분명히 파이프로 보이는 이미지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장을 적어둠으로써 이미지와 글 사이에 일치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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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은 이미지의 설명이 아니며 이미지 역시 문장의 의미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이미지와 문장 간에 어떤 선행적 인과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항목 사이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연관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가 아닌 두 항목 사이에 어떤 공통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연관성을 상사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상사성의 논리가 디지털 세계를 대변하는 논리가 될 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원형과 (매개변수에 의한) 변형의 관계는 원본과 복제의 관계, 즉 유사성의 관계가 아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변형된 것들이며 변형된 것들 사이에 원본과 복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비슷한 공통요소를 지닐 뿐이다. 이 공통요소가 원형이므로, 원형은 원본이 아닌 다양한 변형들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플랫폼일 뿐이다.

물론 이러한 상사성의 세계가 바람직한 세계인지, 아닌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분명한 사실은 디지털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가 상사성의 논리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화두가 되는 4차 산업혁명을 떠올리면 더욱 분명해진다. 아직까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의는 엇갈리지만 이 혁명의 중심이 인공지능과 로봇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항상 인간을 닮은 인공지능이나 로봇의 존재가 가능한지에 대해서 떠올린다. 이때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을 인간이라는 원본을 닮은 복제본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복제본이 원본에 가하는 위협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심지어 인간과 유사한 신체적 조건을 지니고 유사한 감정을 지닌 안드로이드 인간이 출현한다고 해도 이들을 복제물로 취급할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같은 논리로 인간은 원숭이의 변형에 불과하며, 비록 진화된 형태라 하더라도 원숭이라는 원본의 복제물에 불과하지 않을 이유도 뚜렷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와 인간은 서로 비슷함을 지닌 관계일 뿐 어느 존재가 원본이고, 어느 존재가 변형된 복제물이라는 닮음의 전후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인간과 로봇의 관계도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아닌 서로 비슷함을 지닌 상사성을 띤 관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로봇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분명 다른 존재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며, 인공지능 역시 인간의 뇌를 그대로 복제한 형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하는데 정작 인간의 고루한 관념은 디지털 환경을 수용하지 못하는 듯하다.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뇌를 복제하는 것, 인간의 복제본이라는 고루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도리어 인간이 인공지능에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 박영욱 박영욱 | - (현)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저서
    -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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