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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를 통한 학습

정보 담고 소식 전하고 소통하고 함축적 漢詩, 선현들의 SNS

김인호 | 181호 (2015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정보력이 빈약했던 전통사회에서 시()는 유용한 정보를 담는 학습도구였다. 표의문자인 한자를 활용한 덕택에 함축적 의미를 담아내면서도 산문보다 전파력이 좋고, 간결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시는 또한 자신의 감성과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귀족들끼리 좋은 시를 서로 베껴 쓰거나 외워서 서로에게 들려주는 게 일상적 관행이었다. 특히 선현들은 나중에 자신이 쓴 시를 모아 문집으로 출판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시를 써서 줄 때에도 사본을 따로 만들어 보관하곤 했다. 이 밖에도 시는 여론을 조성하고 반영하는 도구로서의 기능도 톡톡히 담당했다. 지금처럼 SNS가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선 시가 지배층과 백성 사이를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담당했다.

  

 

()는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개발한 글쓰기다. 어느 문명이든 일찍부터 춤과 노래를 발달시켜 왔다. 이를 글로 표현할 때 자연히 리듬이 들어갔다. 일종의 노래였다. 시는 그렇게 탄생했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詩經)>은 고대 중국의 시가, 즉 노래를 채록한 모음집이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대중가요를 모아놓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래였지만 글로 옮겨질 때에는 형식을 갖추게 됐다. 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중국의 통일제국을 이룬 한()대부터였다. 이때에도 노래에 가까운 형태이기에 엄격한 형식은 없었다. 그러다가 5개나 7개의 한자로 이뤄진 형식의 시가 생겼다.

 

동아시아 공통의 커뮤니케이션 도구, 한시(漢詩)

 

한시(漢詩)의 형식과 내용은 글로벌 제국인 당()에 이르러 최고조로 발전했다. 당은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이었다. 국토의 통일과 안정, 남북 지역을 잇는 대운하 개통, 비단길을 통한 국제 교역의 활성화는 부의 축적과 그에 따른 귀족문화의 발전을 낳았다. 이백(이태백), 두보, 왕유 등과 같은 시인이 이 시기 문학가들이었다. 그들의 시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시의 고전이 돼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 됐다. 한국 고전에 인용된이태백의 경우는 현재 검색 가능한 범주에서도 거의 1000건이나 되며 두보는 4800여 건이나 된다. 그것도 민족문화추진위원회가 보유한 고전만 헤아린 것이어서 실제로는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당의 수도인 국제도시 장안(長安, 현재 西安)에는 많은 국가들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에는 통일신라인들도 많았다. 주로 승려와 유학생들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상(義湘)대사는 10년간이나 유학하면서 당시 최고의 유학생으로 칭송받았다. 어릴 때 유학 갔던 최치원(崔致遠)은 당의 과거 시험에 합격했을 정도였다. 의상대사와 최치원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당과 신라를 오갔다. 당의 한자문화는 자연스레 신라로 전해졌고, 한시는 귀족의 문화적 교양이 돼 갔다.

 

이런 전통은 고려와 조선으로까지 이어져 갔다. 우리 선현들은 <시경>과 그 외 수많은 중국의 시들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지금의 영어처럼 한자는 동아시아의 공통 문자였다. 비록 말은 달랐지만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삼국의 귀족들은 한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특히 중국에 사신으로 간 고려와 조선인들은 공식적 업무는 통역의 도움을 받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격조 있게 한시를 적어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표현했다. 시를 모르고서는 귀족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한시는 동아시아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갔다.

 

시는 교훈으로 학습하게 한다

 

원래 시는 은유적 표현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언어로 메시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시가 특별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 우리는 시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고 배울 수 있다. 고려 후기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기에 세계화를 틈타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조인규(趙仁規)는 그중에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평양 출신인데 청소년기에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당시 고려에는 몽골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똑똑한 청소년을 선발한 것이다. 조인규는 몽골어 실력이 잘 늘지 않자 3년 동안 문을 닫아걸고 몽골어 학습에 몰두했다. 이런 노력 탓에 그는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 앞에서 재치 있는 통역을 할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실력을 바탕으로 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런 그가 사망하면서 여러 아들들에게 남긴 시다. 일종의 유언이다.

 

 

 

임금을 섬기는 덴 마땅히 충성을 다할 것이니

事君當盡忠

사물을 대하여선 마땅히 지성스러워야 한다

遇物當至誠

바라노니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願言勤夙夜

낳아 준 아비를 욕되지 않게 하라 無忝爾所生

 

자기 집안이 성장하게 된 것에 대한 이유가 먼저 나오고, 자식들의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강조했다. 자기 수양의 내용은 실력과 도덕성 함양이 될 것이다. 이 시는 조인규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았는데 자기 수양이야말로 다가올 조선왕조의 선비들이 가장 강조한 삶의 주제였다. 이 때문이었을까. 그의 증손자는 조선왕조 행정 체계의 기틀을 세운 조준(趙浚)이다. 조인규의 시가 실제로 후손들의 학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만큼 짧은 메시지를 통해 후대에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요즘의 경영에서도 고려해봐야 할 요소다.

 

 

시는 정보를 담고 있는 학습도구

 

시는 때로 정보가 담긴 학습도구일 수 있었다. 정보력이 빈약했던 전통사회에서 시가 이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글이 긴 산문이 시보다 자세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파력이 좋고, 부담 없이 수시로 지을 수 있는 시도 그런 역할을 일부 담당했다. 정약용(丁若鏞)이 직접 채소밭을 경작한 후에 지은 시를 살펴보자. 갖가지 채소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쑥갓은 꽃이 국화 모양이고 茼蒿花似

가지는 열매가 쥐참외 같아 落蘇

해바라기는 폐를 활기차게 하고 魯葵工潤肺

겨자는 구토를 멈추게 하지 蜀芥能止嘔

상추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萵苣雖多眠

먹는 채소로 빼놓을 수는 없어 食譜斯有取

특히 토란을 많이 심은 것은 蹲鴟特連畦

토란죽이 입맛에 맞아서라네 玉糝頗可口

빈터에도 잡초만 제거해버리면 地剔榛荒

저절로 나서 자라는 나물도 많아 旅生多野

곁채에다는 명아주, 비름 기르고 廊廡畜藜

울타리에다는 구기자나무 세우며 藩屛列杞枸

고사리 캐다가 국 끓여 먹고 薇充羹滑

쑥은 뒀다가 뜸 뜨는 데 쓰지 留艾備

 

이처럼 조선시대 양반들은 채소밭 경작과 활용에 대한 정보를 이런 시로 알 수 있었다. 이를 응용하면 채소밭에 어떤 작물을 더 심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상품화폐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자급자족의 시대에 필요했던 위와 같은 정보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당시 양반 중에서 경작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였을까? 일찍이 공자께서도 농사에 관해서는 자신보다 늙은 농부에게 물어보라고 하셨다. 그 말은 전문지식은 자신보다 전문가가 낫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기본적 정보는 이해하고 있어야 물어볼 것도 생긴다. 정약용의 시는 바로 이런 면에서 매우 유용했다. 간결하게 핵심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농사라는 생소한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양반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해줬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정보도 시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여행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신이 아니면 외국에 나갈 일이 많지 않았다. 고려 말 유학자였던 이색(李穡)은 중국 요동(遼東)의 파사부(婆娑府)를 지나면서 이렇게 지었다.

 

내 지금 길게 시를 읊으며 요동 벌판 지나니

我今長吟過遼野

구불구불 산길이 그 몇 리나 되려나

山路縈紆知幾舍

갑자기 두어 집에선 닭과 개 소리 들려오고

忽此數家鷄犬聲

길에서 검문한 자는 다 늙은 병사들일세

當道誰何皆老兵

압록강 동쪽 언덕부턴 바로 우리 땅으로

鴨江東岸是吾土

푸른 산 흰 물결이 서로 교태를 부리는데

靑嶂白波相媚

동쪽 한국은 어짐과 장수의 군자 나라로

東韓仁壽君子國

요임금 무진년에 처음 시조가 탄생하였네

唐堯戊辰稱始祖

 

중국 요동의 상황이 그려진다. 그가 요동을 오갈 때,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당시는 글로벌 시대였다. 많은 사람들이 두 나라 사이를 왕래했다. 이색은 원나라 수도 베이징의 태학(太學)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2대에 걸쳐 부자(父子)가 연속으로 중국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덕택이다. 아버지 이곡(李穀)은 중국에 있으면서 아들을 유학시켰다. 충청도 서천 출신인 두 사람은 개경 귀족이 아니기에 문장 실력으로 출세해야만 했다. 이색은 아버지에게 이끌려 중국 학교를 다녔고, 중국어회화 실력 때문에 고생도 했다. 그렇지만 중국 한시 공부에는 큰 도움이 됐을 터다. 그가 고국을 왕래하면서 지은 시들은 중국을 가보지 못한 이들에게 때때로 상상력과 정보를 줬다.

 

 

시는 감성과 의사 전달 수단

 

경영에서 숫자와 합리적 지표가 중요하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물질적 보상에만 달려 있지 않다. 자발적인 동기 부여는 사실 인간의 감성과 설득에 달린 문제다. 시는 전통사회에서 자신의 감성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었다. 왜냐하면 시는 산문보다 짧으면서 은연중에 자신의 메시지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표의문자였던 한시는 단어에 담긴 의미가 적지 않았다.

 

고려 중기 천재 시인 이규보의 시는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준다. 그는 과거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40대가 되도록 관료가 못돼 궁핍했다. 그런 이규보가 먹을 것이 떨어져 옷을 전당잡혔다.

 

삼월 십일일에 季春十一日

아침거리 없어 廚竈無晨炊

아내가 갖옷 잡히려 하기에 妻將典衣裘

처음엔 내 나무라며 말렸네 我初訶止之

추위가 아주 갔다면 若言寒已退

누가 이것 잡겠으며 人亦奚此爲

추위가 다시 온다면 若言寒復至

난 오는 겨울 어찌 하라느냐고 來冬我何資

아내 대뜸 볼멘 소리로 妻却恚而言

당신은 왜 그리 미련하오 子何一至癡

그리 좋은 가죽옷 아니지만 裘雖未鮮麗

제 손수 지은 것으로 是妾手中絲

당신보다 더 아낀다오 愛惜固倍子

하지만 배고픔이 더 급한 걸요 口腹急於斯

하루에 두 끼니를 먹지 않으면 一日不再食

옛사람도 허기진다고 말했지요 古人謂之飢

(중략)…

젊었을 때 회고하니 反思少壯日

세상 물정 전혀 모르고 世事百不知

수천 권의 책만 읽으면 讀書數千卷

급제(及第)는 수염 떼기보다 쉽다고 科第若摘髭

그대로 거들먹거리며 居然常自負

좋은 벼슬 저절로 될 줄 알았더니 好爵謂易縻

운명이 왜 이다지도 기구하나 胡爲賦命薄

이렇게 앞길이 꽉 막혔을까 抱此窮途悲

가만히 앉아 반성해 보니 端心反省已

어찌 나의 잘못 아닐까 亦豈無瑕疵

 

음력 삼월이면 현재의 4월이다. 봄이 왔지만 춘궁기라서 먹을 것이 떨어졌다. 그래서 자신의 겨울 외투인 가죽옷을 전당 잡혀야 했던 이규보다. 그런데 하인은 가죽옷을 잡혀 겨우 좁쌀 한 말을 얻어왔고, 분통이 터진 이규보는 자신을 반성한다. 젊은 시절 책만 보고 과거 급제만 하면 출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련한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운명을 탓해도 소용이 없다. 그의 처지는 어렵게 대학가서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요즘 청년들과 비슷하다.

 

시는 자신의 심정을 요즘 SNS처럼 알릴 수 있는 홍보수단이었다. 정도전의 시는 개경에 있던 친구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경영에서도 짧은 광고는 상품선전의 좋은 수단이듯이 과거 시는 자신을 알리는 효과적 홍보 수단이었다.

 

이규보의 시는 당시 지식인의 고민과 무력감을 보여준다. 그는 구직을 위해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 이야기를 <동명왕편>에 담았고, 수많은 시를 지어 고위당국자들에게도 보냈다. 한마디로 무수히 많은취업원서를 쓴 셈인데, 이런 시들은 시 짓기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이런 시가 당시 좁았던 고려의 수도 개경 내 지식인 사회에서 쉽게 유포됐다. 그의 시가 좋다고 베껴 쓰거나 이를 외워서 서로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그의 처지를 구해주려는 사람들도 당연히 생긴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이규보를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고위층에서는 그와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관직 발령장을 중간에 감추어 버려 관직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물론 나중에 최고권력자가 그를 발탁해 크게 출세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규보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 시는 감성과 의사전달의 수단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어려운 처지의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음은 물론이다. 조선 건국에서 큰 역할을 한 정도전(鄭道傳)이사라는 제목의 시를 보도록 하자.

 

5년에 3번이나 집을 옮겼는데 五年三卜宅

금년에 또 이사를 하게 되다니 今歲又移居

들은 넓고 띠로 지은 집은 작고 團茅小

산은 기다란데 고목은 드문드문 있네 山長古木疎

밭 가는 사람 서로 성씨를 묻지만 耕人相問姓

옛 친구는 편지조차 끊어 버렸네 故友絶來書

하늘과 땅이 나를 용납해 주니 天地能容我

표표히 가는 대로 맡겨 두려무나 飄飄任所如

 

한동안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자주 이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정도전이 이사한 배경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다. 10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풀린 정도전이 자리 잡은 곳은 지금의 북한산이다. 그는 그곳에 삼봉재(三峯齋)라는 조그만 학교를 열었다. 그런데 삼각산 근처가 고향인 재상은 그를 미워해 이 조그만 학교를 헐어버린다. 그는 할 수 없이 경기도 부평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곳에서도 다른 재상이 별장을 만든다고 또 집을 헐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김포로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조선왕조가 세워지기 10년 전의 일이다. 정계에서 제대로 찍혀 띠로 지은 가난한 집에 살게 된 정도전에게 친구들은 편지조차 끊어 버렸다. 사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겪었던 현실과 감성이 이 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밭가는 사람들은 인사해도 오히려 친구들은 그와 발길을 끊어 더욱 서럽다. 어쩌면 그의 혁명 의지는 이런 고난 가운데 생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시는 자신의 심정을 요즘 SNS처럼 알릴 수 있는 홍보수단이었다. 정도전의 시는 개경에 있던 친구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경영에서도 짧은 광고는 상품선전의 좋은 수단이듯이 과거 시는 자신을 알리는 효과적 홍보 수단이었다. 이와 같은 홍보는 시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가능했다. 그래서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시를 써서 타인에게 줄 때면 사본을 만들어 이를 보관했다. 시를 받은 사람 역시 화답하는 내용을 적어주면서 사본을 만들곤 했다.

 

자신의 시를 보관하는 이유는 나중에 책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집이라고 부르는 선현들의 책에는 대개 70% 이상이 시로 이뤄져 있다. 사실 문집의 출판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문집은 상업적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서 이 비용은 온전히 문집을 내려는 사람의 몫이었다. 그렇지만 문집을 낸다는 것은 당사자의 평생 학습결과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집 출간은 사회적으로 명예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자신이 말하려는 메시지와 생각, 감성을 많은 지식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한편 타인들이 자신의 시를 보게 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정자에 거는 현판(懸板)이다. 정자에서는 피서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잔치를 여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잔치의 여흥은 시 짓기로 이어졌고, 잘 지은 시는 현판으로 만들어 정자에 게시했다. 그러면 이후에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배우거나 평가했다. 또한 사람들이 여행 중에 쉬어가는 곳인 역()이나 객사(客舍) 등에도 어김없이 시를 써놓았다. 이것은 일종의 낙서인데, 때로는 세상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공개적인 시는 작자의 이름을 써놓은 경우도 있지만 무명의 작가도 있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이런 시들은 구전, 즉 입소문이나 베껴 쓰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홍보됐다. 지금도 자연스러운 홍보는 비즈니스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기업이 광고 이외에도 자연스러운 홍보에 힘쓰던 것처럼 과거 전통시대 시는 이를 대행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시는 여론을 조성하고 반영하는 도구

 

하정상달(下情上達)이란 말은 요즘에도 쓰인다. 아랫사람의 심정이 윗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과거 군대에선애로사항을 위로 전달하는 것을 가리켰다. 요즘에는 이를 양자 간의소통이란 단어로 바꾸어 쓴다. 소통은 조직 관리에서 중요하다. 조직원들의 생각과 그들이 느끼는 문제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알 것인가?

 

전통사회라고 이런 소통이 필요 없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와 다르지만 조선왕조는 민본(民本)을 내세웠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주장은 유교의 오래된 관념이다. 이런 관념에는 이유가 있다. 중국 고대사회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가 간의 전쟁과 경쟁을 계속해야 했다. 리더인 국왕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전사 집단인 사()가 경쟁의 열쇠였다. ()가 국왕에게 불만을 가지면 그 국가는 경쟁에서 패할 가능성이 커졌다. 국가경영론이 중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가경영론은경세(經世)’라고 불렀다.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줄인 말로, 여기에는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유지가 핵심 논의였다.

 

()는 국가의 기틀이면서백성(百姓)’이다. 백성은 100가지 성씨를 지닌 각 가문이란 뜻이고, 100이란 숫자는 많다는 뜻의 상징이다. 이들의 충성심 유도는 국가 유지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심정과 여론 파악은 국왕의 중요한 일이었다. 특히 조선왕조에 들어와 언론기관이라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이 발전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 중앙집권화된 왕조에서 군주의 권력이 전제화(專制化)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 권력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와 이를 뒷받침할 이념이 필요했다. 유교는 민본(民本)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실현했다.

 

 

백성의 여론은 민심의 반영이고, 민심은 정치가 잘되고 있는지의 척도가 된다. 이 민심을 보여주는 것 중에 시가 있었고, 다른 하나로 요언(妖言)이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시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TV나 신문 콘텐츠고, 요언은 SNS나 시중에서 떠도는 소문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중에서 요언은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해서 조선시대에는 요언을 퍼트리는 사람을 색출해 사형에 처했다. 사형은 너무 과도한 대응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당시 통치자들은 사회적 공포가 전염이 될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이런 극단적 조치를 취했다. 반면 주로 지배층이 지은 시는 여론과 심정을 전달하는 수단이기에 막지 않았다. 정약용의 유명한 시애절양(哀絶陽·양근을 잘라버린 서러움)’은 당시 민심을 대변하는 사례일 것이다.

 

노전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소리

蘆田少婦哭聲長

현문(지방관청의 현관)을 향해 가며 하늘에 울부짖길 哭向縣門號穹蒼

전쟁터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夫征不復尙可有

남자가 그걸 자른 건 들어본 일이 없다네

自古未聞男絶陽

시아버지 상을 당하고 애는 아직 물도 안 말랐는데 舅喪已縞兒未澡

삼대(할아버지, 아버지, 손자)를 다 군인 명단에 올리다니 三代名簽在軍保

가서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薄言往愬虎守閽

마을 이장은 으르렁대며 마굿간 소 몰아가고

里正咆哮牛去皁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磨刀入房血滿席

자식 낳아 군액(세금)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自恨生兒遭窘厄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 당했던가

蠶室淫刑豈有辜

(중략)…

부자들은 일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豪家終歲奏管弦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粒米寸帛無所捐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均吾赤子何厚薄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客窓重誦鳩篇

 

 

 

Mini Box

고려말 조선초의 시작법(詩作法) 변화

고려는 귀족사회였다. 귀족들은 당의 시 짓는 방식을 자신의 준거로 삼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화려한 문장으로 시를 지으려 했다. 옛날에 있었던 고사(故事)와 특이한 은유법이 주로 사용됐다. 문장이 어렵고 화려할수록 좋은 문장이라는 평가가 붙었다.

그러나 화려한 시 짓기 방법은 고려 말기로 갈수록 비판의 대상이 됐다. 화려한 시 짓기가 문장 능력의 과시에만 초점을 뒀다는 비판이 그 요점이었다. 특히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지식인들은 유교가 실제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관심이 높아졌다. 실용학문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실학(實學)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시를 쓰는 기존 방식에도 혁신이 요구되기 시작됐다. 고려후기 성리학자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에게 건의한 내용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전하께서 학교를 확장해 일으키고 6가지 재주와 5가지 가르침을 밝혀 선왕(先王)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진짜 유학자를 배반하고 승려를 따를 것이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시 구절만 익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자질구레하게 글귀나 다듬는 무리가 유교경전에 밝고 덕과 행동을 닦는 선비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유교경전에 밝고 덕과 행동을 수양하는 새로운 선비 상()을 제시했다. 이전처럼 시 구절을 어렵게 꾸미는 일보다 유교 원칙과 실천력 있는 선비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를 짓는 것이 가치 없는 일이 되지는 않았다. 시를 짓는 일이 생각과 감성을 밝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대신에 시를 짓는 방식이 달라졌다. , 화려한 형식적 문장보다 유교의 핵심 가치인 충효(忠孝)의 도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문장의 쓰임이 이전과 달라졌다. 조선전기에 나온 <동문선> 서문에서는성인이 괘를 긋고 글자를 만들어 인문(人文)이 점차 베풀어졌다. ()의 근본은 제왕이 마음을 하나로 지니도록 하는 것들이며, ·((()은 문의 쓰임입니다라고 했다. 인문학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전통시대 인문학의 본질은 우선 제왕의 마음 수양을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다. 여기에는 지배층도 결국 포함이 된다. 도덕적 완성자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시대에 글은 수양의 기본이었고, 시는 그 활용 중 하나였다. 그래서 <동문선>을 집필한 서거정(徐居正) <주역>이란 책에서인문을 잘 관찰해 천하를 교화한다라고 하면서후대의 글은 먼저 글을 짓는 데 뜻이 있기에 가끔 도()에 순수하지 못하게 된다고 염려했다. 그는 화려한 문장이 아닌 유교 도덕의 가치를 담아야 좋은 문장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조선시대의 시는 가능한 도덕적 교훈을 담아야 했고, 그런 시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시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문장력 과시와 작자의 심정만이 아닌 도덕적 메시지도 포함돼 갔다. 물론 시는 시이기 때문에 작자의 심정을 전하는 것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유용한 시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바뀌어 갔다는 의미다.

 

조선시대 백성들은 16세부터 시작해 60세까지 군역 의무를 졌다. 지방관청은 가난한 집안의 아이인데도 군인 명단에 올려 일 년에 2필의 세금을 걷었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사망했는데 그 명단에서 빼주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관청에는 문지기가 막아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장은 세금 대신에 최후의 재산인 소를 가져간다. 너무도 화난 가장의 선택이 극단적이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돼 있던 시절, 부자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정작 가난한 사람들만 세금을 내는 모순된 현실을 목도한 후 이를 비판하기 위해 시를 지었다. 문란한 군정(軍政)과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을 개혁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한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이다. 민중의 아픔을 통렬하게 읊은 이 시는 이후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하나의 여론이 됐다. 참담한 사회 문제를 폭로해 여론을 조성하려는 시도 있지만 민심(여론)이 반영돼 글로 표현된 시도 있다. 연산군 때 작성된 작자 미상의 풍자시가 대표적 예다.

 

 

작은 소인(小人)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小任崇載大任洪

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千古姦兇是最雄

천도(天道)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天道好還應有報

알리라, 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從知汝骨亦飄風

 

여기서사홍은 대표적 간신으로 꼽히는 임사홍, ‘숭재는 그의 아들 임숭재를 말한다. 특히 임숭재는 연산군에게 여성을 뽑아 바치는 일에 큰 공헌을 했다. 이 시는 당시 사회적 원망을 받던 두 사람이 결국 뼈가 부서져 바람에 날리는 최고의 형벌을 당할 것을 예언한다. 당시 임사홍과 임숭재가 없어져야 국가가 제대로 된다는 보통사람들의 바람이 이 시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는 일반 백성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야 하고, 이를 조직 경영에 응용해야 한다. 물론 리더는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들을 끌어갈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리더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지 못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한시의 가치

 

하느님의 분노가 이 땅에 내렸구나

旻天疾威 敷于下土

잘못된 나쁜 정치 어느 날에나 그치려나

謨猶回 何日斯沮

좋은 일 안 따르고 나쁜 일만 계속하네

謀藏不從 不藏覆用

 

돌아가는 꼴 보니 가슴이 다 터지네

我視謀猶 亦孔之

 

어울렸다 헐뜯었다 서글프기 짝이 없다

潝潝訿訿 亦孔之哀

훌륭한 정책들은 모두들 등 돌리고

謀之其藏 則具是違

잘못된 정책들만 골라가며 시행하네

謨之不藏 則具是依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어찌될지 모르겠네

我視謨猶 伊于胡底

 

거북이도 싫었는지 바른 점괘 안 나오네

我龜旣厭 不我告猶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올라가니

謀夫孔多 是用不集

말들만 무성하고 책임질 이 하나 없네

發言盈庭 誰敢執其咎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如匪行邁謀

제 길 찾아간다는 것 처음부터 무리라네

是用不得于道

 

슬프도다 나라 정치 왜 이렇게 잘못되나

哀哉爲猶

선민들을 안 본받고 큰 길에서 벗어났네

匪先民是程 匪大猶是經

시원찮은 말만 듣고 말다툼만 계속하네

維邇言是聽 維邇言是爭

길손에게 물어가며 집을 짓는 얼간이들

如彼築室于道謀 是用不潰于成

 

나라가 흔들려도 옳고 그른 의견 있고

國雖靡止 或聖或否

백성들이 흩어져도 지혜 있고 슬기 있어

民雖靡膴 或哲或謀

저 흐르는 샘물처럼 신중한 사람 있고

或肅或艾 如彼泉流

다스리는 이 있으니 패망하진 않을 거야

無淪胥以敗

맨손으로 범 못 잡고 맨발론 강 못 건너

不敢暴虎 不敢馮河

하나만 아는 것들 다른 것은 알지 못해

人知其一 莫知其他

전전긍긍 조심하자 절벽 위를 걸어가듯

戰戰兢兢 如臨深淵

살얼음 밟고 가듯

如履薄氷

 

 

 

 

이 시는 <시경>에 실려 있는작은 하늘[小旻]’이라는 시다. 이 시를 읽어보면 학습도구로서 시는 이미 3000년 전에 시작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3000년 전 정치현실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연에서 시인은 정치의 잘못으로 나라 돌아가는 꼴에 속이 터진다. 그의 바람은 간단한다. 잘못된 정치가 끝나는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 시인은 정파 이익을 앞세워 잘못된 정책들만 골라 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상대방 정파에게 비난만 퍼붓는 현실은 오늘의 한국 정치와 다를 바가 없다.

 

오늘날과 똑같은 정치행태가 3000년 전부터 지속됐다는 사실은 인간과 정치의 본질이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교훈을 얻게 된다. 이처럼 <시경>은 한국과 중국이란 공간과 3000년 전의 시간을 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더욱이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간다’ ‘전전긍긍’ ‘박빙(薄氷)’ 등 이 시 구절구절에 등장하는 표현을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이런 표현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작은 교훈으로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는 명백한 학습 도구이며, 우리에게 그 시작은 <시경>으로부터다.

 

혹자 중에 한시는 동아시아의 공용어로 통용됐던 전통시대에나 어울렸지 영어가 국제 통용어로 쓰이는 현대사회에선 그 매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자신의 문명을 다시 과시하려 할 것이다. 이들과의 소통에서 한시를 이용해 보는 건 어떨까. 과거 한시가 한자 문명권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듯이 현재 비즈니스에서 시의 교환은 친화성을 위한 수단이 될 날이 멀지 않을지 모른다.

 

실제로 필자가 작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중국에서 주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목격한 장면도 그러했다. 공식 대회가 끝나고 만찬장에서 양국의 참석자들은 음식을 먹으며 가까워졌다. 양측의 대화는 중간에 통역이 옮겨줬다. 그런데 당시 한국 측 참석자 한 분은 중국 측이 옛 노래를 부르자 여기에 한시로 화답했다. 혹 사대주의라는 시선으로 이를 볼 필요는 없다. 그분이 쓴 한시는 간자체로 교육 받은 요즘 중국인들도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문화를 이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는 표식, 그것이 바로 한시 짓는 능력이다.

 

물론 중국 비즈니스와는 상관없는 경영자들까지 한시 공부에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 시라는 문학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장의 경영실적이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 기업과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이들의 감성을 움직이는 것은 어떤 기업에서나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시가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는 가장 효과적 매개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광화문의 한 빌딩에 글판이 걸린 지 벌써 25년째다. 이 글들은 짧으면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 대개는 현대시에서 나온 것들이다. 기업 경영에서도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때가 아닐까

 

김인호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in1621@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한국사)를 받았다. 일본 히로시마대 객원연구원,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려후기 사대부의 경세론 연구> <조선의 9급 관원들> <미래로 보는 한국의 역사2(공저)> 등이 있다.

  • 김인호 김인호 | - (현)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
    - 일본 히로시마대 객원연구원 역임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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