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위기론이 다시 등장했다. 저성장 기조에다 초저금리, 초고령화로 치닫는 한국이 ‘일본식 불황’에 빠져드는 게 아니냐는 우려다. 그나마 일본은 내수 비중이 높고 글로벌 기업과 부품 소재산업 등 기업들의 기초체력이 강하다. 또 엔화는 글로벌 통화 중 하나다. 그만큼 일본 경제는 내성과 회복력을 갖고 있다. 만약 한국이 제로 성장의 함정에 빠진다면 훨씬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다. 한국이 일본처럼 20여 년을 버틸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앞으로 3∼4년이 전환점이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아직 3% 중반을 유지하고 있을 때 해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성장을 주도해 온 대기업들이 다시 투자와 혁신을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 속에서는 재계 판도를 뒤흔들 정도의 ‘판 바꾸기’를 시도해야 한다. 기업사 관점에서 한국 대기업은 1960년대에 창업했다면 50년, 해방 전후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7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현재 많은 기업들은 창업 세대를 지나 오너 2∼3세가 기업 경영을 맡고 있다. 2000년 이후 그룹 순위에 별다른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지키는 경영’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재계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진다. 사실 국내 대기업집단은 삼성과 현대차그룹, 기타 그룹으로 구분될 정도로 쏠림이 심하다. 요즘은 30대 그룹에 진입하는 게 영광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아니다. 대기업 그룹 내부를 들여다보면 부자 형제·자매· 친인척 등이 다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기업 연륜이 쌓이면서 생기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의사결정에서 혼선을 빚는 사례가 잦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한국 사회에서 공조직이든, 사기업이든 성과를 내려면 ‘태양은 하나’여야 한다. 의사결정 체계가 일원화돼야 한다는 뜻이다. ‘제왕적 경영’이 비판의 대상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의사결정의 일관성과 과감한 결단, 신속한 추진력이 한국식 그룹경영의 최대 강점으로 꼽혔다.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오너 일가가 많아지면 이러한 강점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회장 아버지와 사장 아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나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만일 아버지가 후계구도를 시험하기 위해 자녀들끼리 경쟁을 시킨다면 조직의 분열 같은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오너 가족 사이에 끼인 전문경영인의 난처한 입장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기업 내 에너지는 낭비될 수밖에 없다. 전문경영인들이 좌고우면한다고 비난하기엔 한국적 오너 경영의 현실이 워낙 독특하다. 기업 간 노동 이동도 자유롭지 못해 박차고 나가기도 쉽지 않다. 시장의 눈치를 봐야 할 전문경영인이 오너 일가의 경쟁 속에서 조직 내부로만 시선을 돌린다면 혁신하고 시장을 개척하기는 힘들다. 여기에 2∼3세 경영자가 내부 경쟁으로 위축되면 기업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같은 혁신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룹 분할을 통해 전환점을 만들어봤으면 한다. 1990년대 전후 삼성, 현대, LG의 그룹 분할 이후 분가한 오너들은 재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기면 기업과 재산을 받아 분가한 오너 2∼3세의 자금이 기존 산업이 아닌 신성장 산업이나 ICT 업종을 인수하거나 투자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이들의 자본과 벤처기업의 기술이 결합하는 시너지도 가능해진다. 이 방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도 중요하다. 예를 들면, 기업 분할을 유도하기 위해 일정 기간을 정해 증여 상속의 특례를 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네거티브 방식’에서 벗어나 정부 차원에서 재계에 한바탕 ‘새 판 짜기’를 유도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혁신을 얘기하지만 실제 기존 조직 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따른다. 기존 사업에서 돈을 벌고 있는 한 모험을 기피하는 게 조직의 속성이다. 그룹 분할은 글로벌 마인드를 지닌 신세대 오너들과 그 팀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필자가 말하는 ‘그룹 분할’은 말 그대로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이다. 하지만 혁신과 성장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여러 방안 중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조경엽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소장
조경엽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매일경제신문에서 산업, 금융, 경제 전반을 취재하고 글을 써왔다. 이후 부국장으로 금융부장, 국제부장 등을 거쳤고, 주간지 <매경이코노미> 담당 국장과 월간지 <럭스맨> 담당 국장을 역임했다. 1997년부터 1년간 미국 조지타운대 정부-기업관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부터 KB금융지주 상무(경영연구소장)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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