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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현장주의=백성과 소통, 헌신=王과 소통 ‘청백리’ 이원익, 70년 관직의 비법은 있다

김준태 | 171호 (2015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오리 이원익은 88년간의 생애에서 무려 70년 세월을 공직에서 보냈다. 선조, 광해군, 인조로 이어지는 세 명의 왕 밑에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그런데 그는 허름한 집에서 노비도 없이 오직 녹봉에만 의지해 살 정도로 가난했다. 청백리의 표상처럼 회자되는 그지만 사실 업무수행 능력과 1인자와의 관계설정 방법, 아랫사람으로부터의 신뢰를 얻는 부분에 있어서도 탁월했다. 그는 언제나 현장으로 뛰어가 확인하는현장주의자였고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였다. 민심이 그를 향하다 보니 왕으로부터 의심을 살 만했지만 그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임금으로부터의 신뢰도 확고히 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정미년(1547) 10, 당대의 명신(名臣) 이준경은 상서로운 자색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나라를 떠받칠 인재가 탄생했다며 크게 기뻐했다.1)그날 한양 유동(楡洞) 천달방(泉達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부근)에서 태어난 아이를 두고 한 말이다. 21년이 지나 무진년(1568). 청년이 된 그 아이가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영의정이었던 이준경은 급히 입궐해 임금에게장차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이가 매우 위태합니다. 보필할 재주는 얻기 쉽지 않으니 속히 구해야 합니다라고 간청했다. 왕은 강삼(江蔘) 다섯 근을 내려주며 병을 치료하도록 하면서도 무척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영상이 저토록 관심을 갖는 것일까.’ 왕은 청년이 병에서 낫자마자 입궐시켜 직접 만나봤다. 얼굴은 볼품이 없었고 키도 작달막했다. ‘저런, 내가 강삼 닷 근만 낭비했구나.’ 하지만 그로부터 24년이 흘러 임진왜란. 이제는 어엿한 조정의 대신이 돼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 앞장 서는 그를 보며 왕은 감탄한다. “그때 원로(이준경)가 천거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참으로 나라를 떠받칠 재주를 가졌다.”

 

나라를 떠받칠 재주

 

이 일화의 주인공은오리대감으로 유명한 이원익이다. 그는 태종의 아들인 익녕군(益寧君) ()의 고손자로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의 조정에서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청백리에도 뽑혔다. 이원익은 88년의 생애 중 70년 가까운 세월을 공직에 복무했고 이 중 40여 년을 재상으로 있었는데 유능하면서도 청렴한 삶으로 임금뿐 아니라 조야의 신망을 두루 얻었다. 이원익이 영의정이 돼 한양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질 정도다.2)

 

1569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원익은 처음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그는 훗날 그의 큰 무기가 될 중국어 능력을 키운다. 당시에는 젊은 문관들을 별도로 선발해 중국어를 공부하도록 한 제도가 있었는데 다분히 형식적으로 운용됐고 선발된 사람들도 학습에 충실하지 않았다. 중국어는 역관들이나 잘하면 되는 것으로, 양반이 중인인 역관들의 일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원익은 달랐다. 그는 우직하게 중국어를 공부했고 평가 때마다 매번 수석을 차지했다. 이때 이원익이 익힌 중국어는 대명 외교에서 빛을 발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사신의 왕래가 빈번했고 명나라 군대와의 교섭 업무도 중요해졌다. 명군에 대한 접대나 보급뿐 아니라 공동 작전계획 등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긴밀한 협의가 필요했다. 그런데 양질의 통역관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원익이 탁월한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매끄럽게 일을 처리해 나간 것이다. 명나라 장수로부터이 사람은 한인(漢人)이 아니냐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3)

 

이원익은 황해도 도사로 근무하던 중 율곡 이이의 눈에 띄었다. 황해도 관찰사였던 이이는 군적(軍籍) 정리 등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통해그의 재주와 국량이 비범함을 알아보고 감영의 중요한 정무(政務)를 맡겼으며4)중앙에 복귀해서도 그를 적극 추천했다. 이후 이원익은 안주 목사를 지내며 명성을 떨쳤다. 당시 안주는 관서지역의 요충지였지만 연이은 재해와 기근을 겪으며 모두가 부임하기를 꺼렸던 고을이었다. 이원익은 안주로 가자마자 긴급히 구휼 곡식을 나눠주고, 군정을 개혁했으며, 백성들에게 부과됐던 잡역을 감면했다.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권장해 백성들의 부대수입도 늘려줬다.5)이러한 이원익의 공덕을 기려 관서지역 백성들은 뽕나무를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주에서 얻은 명성은 이원익이 재상으로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하는 토대가 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경이 전에 안주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의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먼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들을 효유해 인심을 수습하라. 지금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니 적이 만일 경성(京城) 가까이 온다면 관서로 파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뜻을 명심하고 대처하라”(25.4.28)며 이조판서였던 이원익을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로 삼아 평안도로 파견했다. 왕의 어가(御駕)로 돌이 날아 올 정도로 인심이 흉흉해진 그때 왕이 안전하게 평안도로 피신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민심을 얻고 있는 이원익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이원익은 임진왜란 초기,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쟁 지휘부이자 보급기지였던 관서지역의 민정을 담당했다. 그는 전란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대책들을 시행했으며 쉼 없이 병력을 충원해 전선으로 보냈다.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야습해 보루를 파괴하고 전마 80필을 빼앗는 등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6)그는 맡은 바 임무에 혼신을 다해오직 이원익만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7)선조도평안감사 이원익의 사람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내 지난 날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며 아들과 사위에게도 관직을 제수해 그의 노고에 보답하도록 했다.8)

 

1)<동고유고(東皐遺稿)> 중 후손들이 덧붙인 부록유사(遺事)’에 나오는 기록이지만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이해에 이준경은 평안도 관찰사로서 평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원익이 이준경의 문생(제자) 명단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등 이준경으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2)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이원익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록>에는 인조가승지를 보내 하루빨리 입궐할 것을 거듭 재촉했는데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오자 모든 백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를 맞이했다고 기록돼 있다.(<인조실록> 1 316)

3)<연려실기술> 18

4)<선조수정실록> 7 101: <선조수정실록> 9 12

5)<선조수정실록> 20 41

6)허목, <동서기언(東序記言)> ‘오리이상국유사(梧里李相國遺事)’

7)<선조실록> 27 130

8)<선조실록> 27 28

 

 

이원익은 임기가 끝났는데도 계속 유임된다. 이원익 말고는 이 일을 감당해 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사관은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후 이원익에게 남부 최전선을 총괄하는 도체찰사의 임무를 맡기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도지금 평안도는 나라의 근본 구실을 하는 지역으로 이원익이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서 백성들과 매우 친숙해졌기 때문에 나라에서 지시를 내리거나 일을 시행할 때 쉽게 할 수 있다”며 이원익의 이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9) 이원익에 대한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선조 28 61. 이원익은 우의정에 제수되고 사도(강원, 충청, 경상, 전라) 도체찰사가 돼 남쪽으로 내려갔다. 단순히 민정뿐 아니라 최전방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남부로 내려간 이원익은 무엇보다 백성들을 위무하고 보호하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조정의 신하들이아직 적들이 이 땅에 있어 산성을 수축하고 진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원익이 남하한 후 오로지 백성을 무마하는 것을 선무로 삼고 요새를 점거하여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조치가 없습니다라고 비판할 정도로 이원익은 백성을 최우선시했다.10)

 

이원익은 이순신에 대해서도 일관된 지지를 보냈다. 이순신을 의심하는 선조에게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라며 이순신을 극찬했고,11)이순신이 조정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비판을 받자 전장의 상황 때문이라며 변호해줬고, “원균이 공을 다툼이 심하여 이순신에게 안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원균의 공이 이순신보다 나을 수 없다” “원균은 당초에 많이 패하였으나 이순신만은 패하지 않고 공이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다투는 시초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평가했다.12)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압송되자이 사람이 죄를 받으면 대사(大事)가 끝장날 것입니다라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원익이 남부 전선의 군율을 확립하고 민심을 안정시키자 선조는 그를 한양으로 불러들이고 다시 평안도로 파견하고자 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하삼도(下三道)의 인심이 어수선하여 이원익이 내려오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이제 그곳을 버리고 관서로 간다면 하도(下道)의 민심이 안정될 수 없을 것이고 반드시 곳곳이 무너져 회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동(大同) 이남은 모두 버린 땅이 될 것이니 명군이 구원하고자 하더라도 형세가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이원익이 계속 남방을 관할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헌부에서도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그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이제 만약 그를 서울에 머무르게 하여 내려가지 않게 한다면 민심이 의지할 데가 없어져 다들 흩어질 생각을 품을 것이고 적이 오기도 전에 민심이 먼저 흔들릴 것이니 남방 천리는 장차 싸우지 않고도 빼앗기는 땅이 될 것입니다라고 우려했다.13)

 

공감의 리더십, 눈에 보이는 지도자

 

대체 이원익이 어떻게 했기에 이처럼 백성들의 신망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가 부임해 정사를 펼친 곳에서는그곳 사람들이 모두 예외 없이 부모처럼 받들어 사모하였고 이임할 때에는 수레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하였으며 떠나고 나서도 송덕비를 세우고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14)특히 평안도 관찰사로서 전쟁을 수행했던 평양에서는 백성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는데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최립(崔岦)이 사당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15)

 

이원익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가 백성들의 고난을 아파하고, 그 고난을 함께하며, 고난을 이겨내도록 지원하는 일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다.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에서 직접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백성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했다. 그는백성을 위한 것 외의 일은 전부 군더더기일 뿐이라 생각했다.16)그는 죽기 직전에도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만 나라가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언제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지극한 정성을 쏟으소서. 그러면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게 되고 민심이 회복되어 국가가 편안해질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17)

 

무릇 백성은 지도자가 자신의 곁에 있을 때 믿음을 보낸다. 자신들을 버리고 도망가거나 보호해주지 못하는 지도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자(invisible leader)’에게는 절대로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을 겪더라도 리더도 함께 그 상황을 겪고 있다면 구성원들은 기꺼이 리더를 믿고 힘을 합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이은 폭격으로 가족들이 죽어나가고 배급 식품으로 겨우 연명했던 영국 국민들이 처칠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부도 위기에 놓인 CEO가 근로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침식을 같이하며 회사의 재건을 위해 노력해 위기를 이겨낸 모습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구성원들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 힘을 결집시켜야 비로소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 민심이 뭉치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다18)고 역설한 이원익의 말처럼 말이다.

 

몸을 사리지 않는현장주의자’. 임금의 의심도 피했다.

 

이전 아티클에서도 필자가 자주 강조했지만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민심이 쏠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민심은 천심(天心)이라고 하는데 그 천심이 왕이 아닌 신하에게로 향했다는 것은 자칫 왕권이 뒤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왕들은 백성의 인망을 얻고 있는 신하들을 의심하곤 했다. 특히 정변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무력을 가진 신하라면 의심의 강도는 더욱 강해진다. 이순신과 선조의 관계가 바로 그 예일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이원익에게 보인 절대적인 신뢰도 이원익을 충분히 위태롭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심이 많기로 유명한 선조를 비롯해 광해군, 인조 등 이원익이 모신 임금들은 하나같이 이원익을 중용했다. 1599년 영의정에서 물러난 이원익의 병이 위중하자 선조는 어의를 보내 치료하도록 했다. 1602 2월에도 역시 어의를 파견해 그의 병을 보살폈다. 그럼에도 병이 낫지 않자 점치는 사람을 불러 그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할 정도였다. 선조는 이원익이 거처하는 곳이 강바람이 차다며 자신이 쓰는 담요와 병풍을 하사했고뭇 신하들 가운데 오직 이원익만이 대사를 맡을 수 있다. 나는 그를 제대로 쓰지 못하였으나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정성스러운 뜻을 보인다면 그를 쓸 수 있을 것이다는 유언을 남겼다.19)

 

9)<선조실록> 27 116

10)<선조실록> 29 31

11)<선조실록> 29 105

12)<선조실록> 29 117

13)<선조실록> 29 119

14)이식,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8,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공의 시장(諡狀)’

15)최립, <간이집(簡易集)>, ‘위평양사민제이상공생사문(爲平壤士民祭李相公生祠文)’: 기록에 의하면 이원익은 자신의 생사당이 세워진 것을 민망하게 여겨 남몰래 사람을 보내 사당을 허물었다. 하지만 평양 백성들이 이를 다시 세웠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목민관의 공덕을 기린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16)<선조실록> 28 726

17)<인조실록> 9 74

18)<인조실록> 1 322

19)<택당선생별집> 8, ‘영의정 완평부원군 이공의 시장’: <동서기언> ‘오리이상국유사

 

 

 

광해군도 즉위하면서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한다.20)그러나 이원익이 조정에서 이뤄지고 있는 붕당의 폐단을 비판하고21)임해군의 역모의 증거들이 불분명하다며 허점을 지적하자 광해군은 이를 무시했다. 이원익이 조정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광해군은 수십 번에 걸친 사직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해군 3 10월 이원익이 광해군의 면전에서 임금의 잘잘못에 대해 조목조목 강력히 직언하고 18번에 걸친 사직상소를 올렸을 때에도 병이 다 낫고 출사해도 좋다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이원익이설령 어머니가 자애롭지 못하더라도 자식은 불효해서는 안 된다며 폐모22)의 움직임을 비판하고 나서야 홍천으로 귀양을 보냈다.23)

 

이원익에 대한 인조의 신임은 특히 남달랐다. 그는 늙고 병들어 무거운 책임을 맡기에 적절치 않다는 이원익의 말에누워서라도 집무를 보라고 명했고24)나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다고 여겨서인가라며 거듭된 사직상소를 완강히 거절했다. 이원익이 아예 조정에 나오질 않자근래 경이 벼슬을 버리고 떠난 것으로 인해 인심이 흩어져 국운이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으니 오늘에야 더욱 경의 거취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이 조정에 있지 않으면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며 업무 복귀를 종용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면 집에 있어도 좋으니 사직만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25)심지어 인조는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듯 나는 경을 바라본다는 말까지 한다.26)

 

이원익이 왕들로부터 이런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때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서 소원해지고 심지어 갈라서기도 했지만 그를 내치지 못한 것은 왜일까. 우선은 이원익이 태종의 5대손, 즉 종친이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일원이면서 왕위 계승과는 상관없는 그의 존재 자체가 믿고 의지할 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원익에 대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였다. 그를 배척했다가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겠지만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이원익을 지지하는 민심의 향배도 자연 왕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신하들에게서도 보인다. 북인이 쓴 <선조실록>과 서인이 기록한 <선조실록>에서 똑같이 예찬하는 조정 대신은 그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유성룡에 대해서는목을 잘라 내거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던 정적 대북파 핵심들도 이원익에 대해서는어진 재상이기는 하지만 고집을 부린다. 안타깝게도 잘못된 소견을 주장한다는 식의 비난에 그친다.

 

이원익이 왕들로부터 신임을 받은 또 하나의 이유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자신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앞장섰기 때문이다. ‘일개 서생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며 왕이 허락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이원익은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겠다고 자원했다. 남방과 북방을 오가며 도체찰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그를 안쓰럽게 여긴 선조가 한양에 머물며 지휘하라고 하자조정에 있으면서 현장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주저 없이 전장으로 떠났다. 병중에 있었으면서도 명나라로 가는 사신 임무를 맡아머리를 땅에 짓찧으며 피를 낭자하게 흘릴 때까지 호소하여일을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의 나이가 80에 이르렀던 인조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그가 나서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감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자신이 반란을 진압하러 평안도로 가겠다고 지원한다.27)그는 총지휘관인 도체찰사가 돼 난국을 수습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사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 도체찰사를 맡아 후방지원을 총괄하고 소현세자의 분조(分朝)를 책임졌다.28)만일에 있을지도 모를 인조의 유고 사태를 대비해 국가의 미래를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한 것이다.

 

또 하나의 키워드, ‘청렴

 

이후 전쟁이 끝나고 이원익은 다시 향리로 돌아갔다. 조정에 나오라는 임금의 거듭된 부름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한번은 오랑캐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85세의 나이에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출사했는데29)그 모습에 감동한 임금이나라에 변란이 있으면 경이 꼭 들어오니 더없이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고 신하들도이원익이 어제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원해 떠맡는 이원익의 자세는 백성뿐만 아니라 동료 신하들, 나아가 임금의 신뢰를 이끌어냈다. 국가와 임금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곧 쓰러져 죽기 직전의 상황이어도 행동에 옮기고 실천하는 이원익을 의심하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믿을 수 있는 신하는 그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의견을 달리하고 소원해지더라도 왕들은 그의 손을 끝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끝으로 이원익은 평생 일관된 청렴함으로도 존경을 받았다. 한번은 인조가 승지를 보내 이원익의 안부를 묻게 하면서그의 기력은 어떠한지, 살고 있는 집은 또 어떤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가서 살피고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승지가 돌아와원익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앉거나 누울 때에도 꼭 다른 사람이 부축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집도 몇 칸 초가집에 불과하여 바람과 비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어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월급)으로 겨우 입에 풀칠하는 형편입니다라고 회계하니 인조는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에 살고 비바람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은 고금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존경하고 사모한 것은 그가 이룬 공덕 때문만은 아니니 바로 이러한 이공(李公)의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신하들이 본받는다면 백성들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감탄했다.

  

20)<광해군일기> 즉위년 214

21)<광해군일기> 1 19

22)광해군이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사건

23)<광해군일기> 7 623: 이때 이원익이 유배돼 관동 지방에 도착하자 극심하게 가물었던 그곳에 비가 내렸고, 그래서 이 비를상공우(相公雨)’라고 불렀다는 야사가 전해져 올 정도로 이원익에 대한 백성들의 신망은 두터웠다.

24)<인조실록> 1 48

25)<인조실록> 4 816

26)<인조실록> 4 127

27)<인조실록> 2 124

28)<인조실록> 5 117

29)<인조실록> 9 328

 

 

 그러면서 집을 지어 내려주도록 하니 임금이 신하의 청렴함을 기려 집을 지어 하사한 것은 세종 때 황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30)물론 이원익은 여기에 대해서도 완강히 사양했다.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수고로움을 끼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인조는상공(相公)의 집을 짓는 일이라면 백성들이 너도나도 와서 참여하겠다고 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31)

 

1634 129일 이원익이 죽자 임금을 대신해 조문한 도승지 이민구는영중추부사의 상사인데도 집이 가난하여 상을 치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놀라 보고했다. 그의 청렴함은 죽는 그날까지도 철저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원익은 죽음을 앞두고나는 평생 사사로운 이익을 보면 수치스러움을 생각하였고, 일을 어렵다 하여 거절하지 않았으며, 행동은 구차함을 용납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허물을 적게 하고 싶었지만 능히 그러지는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는 것 같아서 그 기미를 통해 드러나니, 따르고 버리는 것을 결단하는 것이 밝음이요, 용기는 밝음에서 생기고, 밝으면 미혹되지 않으며, 미혹되지 않으면 동요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믿음을 주는 2인자가 조직을 살린다

 

이상 이원익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2인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덕목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믿음이다. 참된 힘의 원천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에 있다. 그리고 그 필요는믿음으로부터 비롯되고믿음은 모범과 실천을 통해 적립된다. 기업에서도 1인자의 눈치를 보고 아부만 하는 2인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를 대체할 만한 수준의 인물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2인자는 이원익처럼 청렴하고 사심 없이 업무에 임하면서 기업에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가장 먼저 용기 있게 나서야 한다. 1인자를 대신해 현장에 나가 구성원들의 곁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어려움을 살피고 소통하는 일도 중요하다. CEO의 비전을 구성원들에게 전달하고 구성원들의 사정을 CEO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돼야 한다. 자신의 안위 따위는 돌보지 않고 기업과 직원들을 위해 헌신하고 1인자가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보좌한다면 그에 대한 구성원들의 믿음은 자연스레 확고해질 것이다.

 

1인자의 기분을 조금 상하게 하는 직언을 하더라도 업무능력과 조직에 대한 헌신으로 1인자에게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들에게도현장의 지도자로서 신뢰를 받는 2인자가 존재한다면 조직이 처한 환경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실제 바다에서 나라를 구해냈다면 이원익은 민심의 바다를 장악해 조선을 구해냈다고 할 수 있다.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기업은 조직원들이 똘똘 뭉쳐 함께 고난을 극복하지만 어떤 기업은 모두 제살 궁리만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에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외부에 많이 알려져 있는 1인자(오너나 CEO)에게서 특별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2인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들여다보는 게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이 같은 2인자를 알아보고 중용하는 것은 1인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순신 같은 영웅조차 시기하고 의심했던 선조도 꼼짝 못하게 만든 2인자 이원익의 삶과 철학, 그리고 그의 업무수행 스타일은 언제나 전쟁과 같은 비즈니스 현장을 누비는 기업 내 2인자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줄 것으로 보인다.

 

 

30)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보면가택(家宅)을 하사받은 것은 세 사람뿐이다. 세종 때에 황희(黃喜)가 가택을 하사받고, 선조 때에 이원익(李元翼)이 가택을 하사받고, 숙종 때에 허목(許穆)이 가택을 하사받았다.” (<이목구심서 2(耳目口心書二)>)라 돼 있고,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재상을 지낸 이로 집을 하사받은 것은 황희(黃喜), 이원익(李元翼), 허목(許穆)이다라고 기록돼 있다.(<춘명일사(春明逸事)>) 부정부패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황희가 집을 하사받은 것은 의외로 보이지만 청백리로 선정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년에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31)<인조실록> 9 111

 

 

김준태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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