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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여염집 탈취금지령’을 아시나요? 영조, 초강경 법으로 권세가 횡포 막았다

노혜경 | 169호 (2015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조선시대엔 권세가들에게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억울하게 집을 빼앗겼지만 권세가의 보복이 무서워 고발도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조는 이 같은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해 여염집 탈취금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도성 내 집 매매 자체를 금지시킬 정도로 초강수를 뒀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영조가 이토록 무리수를 뒀던 건 여염집 탈취 문제 자체를 넘어서 고위층의 불법에 대해 일반 평민들도 두려움 없이 고발할 수 있는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다소 무리다 싶을 정도로 강경하게 법령을 시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양반도 고발할 수 있게끔 하는 용기를 심어줬던 것이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잘 살고 있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법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워줘야 하는 경우에도 내 억울함을 호소하며 버티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버젓이 내 소유의 집인데도 쫓겨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많았다.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던 조선 백성들

조선시대의 서울은 지금처럼 하나의 행정구역이 아니었다. 왕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특별한 영역이었다. 여기에다 성벽으로 둘러져 있어서 서울의 공간은 더 이상 확대하기 힘든 영원불변의 공간이 됐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서울로 모여드는 인구는 끝없이 늘어나고 공간은 변함이 없어서 집을 늘리려면 주변 사람의 집을 헐어야만 했다.

 

조선 초부터 권세가들이 남의 집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이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권세가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민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염병이 돌면 궁 안 사람들이 병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민가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때 아주 좋은 집으로 피난을 가서 원래 살고 있던 사람을 내보낸 뒤 그 집에서 안 나오고 버티는 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세 들어 살다가 기한이 차도 나가지 않는다든가, 매매를 빙자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엔 특별한 권력자들이 집을 빼앗곤 했지만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까지 오염되는 법이다. 점차 일반 관료들까지도 여기에 합류했다.

 

여염집 탈취금지령

억울하게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권세가의 보복이 무서워서 고발도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의 고생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남자는 남의 집에 머슴을 살러가거나 부녀자들은 허드렛일을 해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 궁 밖에 살면서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강력한 법안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여염집 탈취금지령이었다.

 

여염집 탈취금지령은 권세가들이 일반 백성들의 여염집을 빼앗는 불법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 법령이었다. 영조는 노년에내가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여염집 탈취금지령을 내린 것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라고 회상하면서 이 법을 성공한 정책의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 처벌도 굉장했다. 이 법을 어길 시에는 양반뿐 아니라 왕족과 고급 관료들까지 예외 없이 유배를 보냈고 차후로도 고급 관료로의 진출길을 막아버렸다. 유생들은 6년간 과거시험도 못 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로선 정말 엄청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영조의 초강경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궁 밖에서 자란 영조는 왕이 법령을 내려도 그것이 시행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형식화되는지 너무 잘 알았다. 탈취금지령을 내리면 분명히 매매나 전세로 위장할 거라는 사실도 미리 눈치 챈 영조는 아예 매매와 전세조차 금지시켜버렸다. 그러니까 도성 내의 집 매매 자체가 불법이 됐고 민가에 세를 내어 사는 것 또한 불법이 됐다. 쉽게 말하면 그냥 지금 사는 집에 평생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신하들은 너무 지나치다며 반대했지만 영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다 보니 선의의 피해자도 나타났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선의의 피해자까지 발생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제가다. 1761(영조 37) 영조는 금지령 위반자에 대한 보고가 뜸하다는 생각을 하고 한성부 관리를 직접 불러서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제출된 보고서에 박제가의 어머니 이 씨가 들어 있었다. 당시 박제가는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인 승지 박평(朴坪)이 사망하자 후처였던 박제가의 어머니는 박평의 집을 나와 필동에 집을 사서 이사했다. 이것이 양반의 권력을 이용해 민가를 빼앗은 경우라고 고발당한 것이다.

 

 

721, 위반자 처벌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우의정 홍봉한은이 씨가 서얼가로 허울뿐인 양반이라 초가삼간을 구하기도 힘들며 그가 구입한 집의 주인은 양반인데 이 씨가 어떻게 강제로 빼앗을 수 있겠느냐며 선처를 요청했다. 박평은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영조 자신 곁을 보좌하던 승지였고 재직 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영조는 박평과의 의리도 저버린 채 박평의 유가족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이 씨가 여자라서 유배갈 수가 없으니 아들인 12살 소년 박제가를 대신 귀양 보내라고 명령했다. 다행히 형조판서 남태제가 어린아이를 유배형에 처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자 대신 집안일 하던 노비 소녀가 대신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됐다.

 

영조의 엄격한 법 집행으로 여염집 탈취는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권세가보다 가난한 양반들이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가 늘어났다. 또 이사가 불가능하고 금지령을 지나치게 엄하게 하자 형조나 한성부 관리들이 마구잡이로 위반자를 잡아들이는 폐단도 늘어났다.

 

영조가 무리수를 둔 까닭은

법을 집행하더라도 기본적인 상상을 중시하던 영조가 이렇게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일까? 영조가 진짜 바꿔놓은 관행은 여염집 탈취금지령이 아니라 고위층의 불법에 대해 힘없는 백성도 고발할 수 있는 문화를 확산시킨 것이었다. 조선시대라고 일반 백성이 양반의 불법을 아예 고발조차 할 수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은 철저한 신분제사회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고발을 허용해도 실제로는 고발이 불가능했다. 천하의 세종도 해결하지 못한 조선의 법 관행이 바로 아랫사람의 고발제도였다. 사람들은 법을 모르기도 몰랐지만 힘없는 자신이 초특급 권력가를 고발해 제대로 처리나 되겠냐는 두려움 때문에 더더욱 고발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영조의 다소 무리다 싶을 정도로 강경한 여염집 탈취금지령이 시행된 이후, 백성들은 권력가가 정말, 실제로, 처벌을 받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장면을 계속해서 목격하다 보니 마침내는 집을 빼앗기면 양반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국가와 관청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면 개혁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다. 모든 개혁에는 부작용과 무리수가 따르기 때문에 한 번에 일을 벌이면 감당 못할 대혼란이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부작용이 없을 작은 일로만 빙빙 돌아도 실패한다. 그래서 영조는 하나의 안건이지만 근원으로 파고들면 더없이 근원적이고 오랜 개혁과제와 연결돼 있는 하나의 일, 바로여염집 탈취라는 불법행위에 집중했다. 한 가지 사안에 집중했기 때문에 부작용도 어찌어찌 관리하며 끌고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건국 이래 강고하게 유지돼 오던 신분제의 커다란 방벽 하나를 허물었다. 기업에도 수많은 개혁과제가 있다. 다양한 방식의 접근법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영조처럼 하나의 구멍이지만 개혁의 핵심과 연결되는 파이프를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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