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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其戰勝不復: 기존 승리법 믿다 무너진 노키아

김경원 | 167호 (2014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전략

교훈

과거에 성공한 전략이 내일도 꼭 통하지는 않는다. 항상 점검하고 바꿔라.

 

전쟁 사례

이스라엘은 1967 6일전쟁 당시에 큰 효과를 봤던올탱크 공격(기계화 보병 수행 없이 탱크로만 대형을 짜서 진격)’ 전술을 1973 4차 중동전에서도 똑같이 이용해 큰 낭패를 봤음. 지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올탱크 공격에 당했던 이집트가 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고 나선데다 대전차 미사일까지 도입하는 등 상황이 바뀐 것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

 

경영 사례

과거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호령하던 노키아는 스마트폰을 가장 먼저 개발해 놓고도 당장의 재무 성과가 훨씬 좋았던 피처폰 사업부에 집중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게 됨. , 과거의 성공에 대한 미련으로 자기부정을 하지 못했고, 이는 쇠락의 길로 이어짐.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전략은 실제 전쟁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현장형 경영전략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손자병법의 허실(虛實) 편에기전승불복(其戰勝不復)’이라는 어구가 나온다. ‘전쟁에서 한번 승리한 방법은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전략을 수립하는 기획부서 담당자들은 애써 새로운 성공 방법을 생각해내기보다 기존에 효과가 검증됐던 방법을 다시 채용하는 예가 많다. 문제는 사업 환경이 예전과 크게 달라져 과거 성공을 가능케 했던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됐음에도 이를 답습할 경우 경영 실패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쟁사례

예전의 방식을 답습했다

큰 코 다친 이스라엘 군의 탱크 운용술

1967 65일 이스라엘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랍 국가들을 기습했다. ‘6일전쟁(Six-day War)’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서쪽으로는 이집트 영토인 시나이 반도, 동쪽으로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 고원을 단 6일 만에 점령하고 전쟁을 끝냈다.

 

이스라엘군이 이렇듯 빠른 진격 속도를 보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즐겨 썼던전격전(Blitzkrieg)’ 방식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탱크와 기계화 보병(장갑차나 트럭에 의해 운반되는 보병)의 합동 대형을 갖추고 공군력의 지원을 받아 적이 예상치 못한 속도와 규모의 전력 투입으로 단숨에 적진을 돌파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이스라엘도 이 방식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실제 실행 단계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를 취했다. 탱크 부대가 기계화 보병의 수행 없이 탱크로만 대형을 짜서 진격한 것이다. 소위-탱크 공격(all-tank attacks)’이다. 신생 국가인 이스라엘은 돈이 없어 국방 예산을 최우선적으로 탱크, 전투기 등의 주력 무기에 투입한 결과, 보병을 실어 나를 장갑차나 트럭 등을 사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보병이 빠른 진격 속도의 탱크 부대를 수행할 수 없었다. 보병이 따라붙지 않으면 탱크의 기동력을 최대로 살릴 수 있다. 그러나 적의 대전차 보병에 대한 방어가 취약해질 수 있는데다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남은 적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인원이 모자라게 된다. 이스라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스라엘 군은 기계화 보병이 함께 작전을 수행하지 않아 발생하는 약점을 탱크 간의 협조 기동과 장거리 사격술로 메웠다. 즉 탱크 하나하나가 마치 각개전투하듯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진하도록 했다. 당시 기갑군단장이었던 이스라엘 탈(Israel Tal)이라는 장군이 이 방법을 창안해 전차병들에게 훈련시켜 숙달되도록 했다. 또한 이들에게 장거리 포격술을 연마시켜 시야가 훤히 트여 있는 사막 지형에서 멀리서부터 적 탱크는 물론 대전차 포가 보이는 즉시 격파시키도록 함으로써 대전차 보병에 대한 취약점도 해결했다. 이런 탱크 운용방법은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이 단시일 내에 방대한 땅을 점령하고 승리한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1973 106일 오후에 설욕의 칼날을 갈아온 아랍 국가들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먼저 기습했다. 바로욤키푸르(Yom Kippur)전쟁’, ‘4차 중동전이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과 서에서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시나이 전선에서는 이집트 군이 6일전쟁 후 수에즈운하를 건너 상륙한 후 곧바로 진지를 구축했다.

 

허를 찔렸지만 이스라엘 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이집트 군이 보병만으로 수에즈운하를 도하한 직후여서 아직 탱크를 가져오지 못한 것을 발견한 이스라엘 군은 자신만만했다. 그때까지도 탱크전의 교리는탱크를 잡는 것은 탱크였다. 당연히 탱크 없는 보병들의 방어진을별거 아닌것으로 간주했다. 이스라엘 군은 상륙 후 바로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한 이집트 군을 상대로 이번에도 보병의 호위 없이 탱크 부대로만 돌격을 감행했다. 이스라엘 군도 이때쯤에는 충분한 수의 장갑차와 트럭이 있었고 이에 탑승할 기계화 보병도 있었지만 군 수뇌부는 지난 전쟁에서 큰 성공을 거뒀던 탱크 운용술에 매달려 이를 활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올-탱크 공격에 변변한 대응도 못하고 당했던 이집트 군은 이에 대한 방비를 확실히 하고 나왔다. 소련으로부터 ‘RPG-7’과 같은 대전차 로켓은 물론, 최신식 무기였던 보병용 대전차 미사일 ‘AT-3 새거(Sagger)’를 대량으로 도입해 병사들 사이사이에 이런 무기들을 촘촘히 배치했다.1 공격해오는 이스라엘 탱크들을 향해 이집트 병사들의 대전차 로켓과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가자 폭발하는 이스라엘 탱크가 속출했다. 그 결과 개전 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 군은 시나이에 배치했던 탱크 700여 대 중 3분의 1 이상이 타격을 입었다.이스라엘의 우방인 미국은 이런 피해에 놀라 유럽에 배치 중이던 자국의 탱크 중 상당수를 원조해 줬다. 상황이 어찌나 다급했던지 소속 국가를 표시하는 페인트도 지우지 못한 채로 지원했다.

 

이스라엘 군은 뒤늦게 탱크의 운용 방식을 바꿨다. 원래 독일 전격전의 형태로 돌아가 보병을 태운 장갑차나 트럭이 탱크부대를 수행토록 했다. 탱크가 전진하기 전에 매복이 의심되는 곳에 이들 보병을 먼저 내보내 대전차 무기를 제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탱크의 손실 대수가 크게 줄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피해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적의 대비와 대전차 미사일의 출현이란 상황 변화를 감안하지 않고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반복했다가 뒤늦게 이를 바꿨지만 그때는 이미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만큼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 후였다.

 

경영사례

과거의 성공공식에 집착했다 낭패 본 노키아

1865년에 핀란드의 노키아라는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로 출발한 노키아(Nokia)는 이후 인수합병을 통한 사업 다각화로 케이블, 타이어, 전자, 통신제조업 등 폭넓은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에는 핀란드 최초로 GSM 방식2 의 상용화를 통해 휴대전화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1992년에는 시티뱅크 출신의 요르마 욜릴라(Jorma Ollila) CEO로 취임하며 휴대전화 사업을 핵심사업으로 정하고 기존 제지, 고무, 케이블 등의 사업을 정리했다. 그 후 세계적으로 이동전화 시장이 급속히 커짐에 따라 기술적으로 앞섰던 이 회사의 휴대전화 판매가 급증하면서 마침내 1998년 모토로라(Motorola)를 제치고 세계 1위의 휴대전화 기업으로 올라섰다.

 

노키아는 이후 고성장을 거듭했다. 2007년 말에는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 이상을 점유할 정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노키아 매출액은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약 2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핀란드 증시에서도 노키아의 시가총액은 전체 상장사 시가총액의 약 3분의 2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상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노키아가 망하면 핀란드가 망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계 1위의 기업으로 발돋움한 지 채 20년이 지나지 않아 스마트폰이 피처폰을 밀어내고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노키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장을 선도한 회사였다. 1996년 노키아는 자사 최초의 스마트폰인 ‘Nokia 9000’을 출시한 후 파생 모델들을 지속적으로 내놓았다. 애플의 아이패드가 나오기 한참 전인 1990년대 후반에는 무선 인터넷과 터치 스크린이 탑재된 태블릿 컴퓨터까지 개발했다. 경쟁사들보다 훨씬 빨리 시장에 진입한 결과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아이폰이 출시되기 직전인 2006년에 이 회사의 스마트폰 판매대수는 3900만 대를 기록했다. 2007 6월 출시된 아이폰이 2010년이 돼서야 판매대수가 3900만 대를 넘어선 것을 보더라도 이 회사는 초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큰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애플이 아이폰이라는 공전의 히트상품을 출시하기 전까지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규모는 기존의 피처폰 시장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었다. 그런데 노키아의 스마트폰이 한창 시장에 나오던 시기인 2004, 모토로라는 ‘RAZR’라는 휴대폰 모델을 출시하며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이 제품은 스마트폰이 태동하기 전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피처폰이었다. 경쟁사의 선전으로 노키아의 투자자들은경쟁 회사가 기능이 별로 없는 휴대전화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데 노키아가 하이엔드 스마트폰에 집착한다고 비난했다. 이런 와중에 2006년 올릴라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이 회사의 CFO였던 올리페카 칼라스부오(Olli-Pekka Kallasvuo)가 그의 뒤를 이어 CEO로 취임했다. 수익에 민감한재무쟁이였던 그는 투자자들의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피처폰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했고 스마트폰 사업부를 피처폰 사업 부문으로 통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당시에 매출 등 재무성과가 훨씬 더 좋았던 피처폰 사업부의 목소리에 스마트폰 사업부가 눌리는 결과로 나타났다. 당연히 이후에는 후속 스마트폰 모델의 개발이 더뎌졌다.

 

스마트폰과 피처폰 사업부의 통합으로 생긴 더 큰 문제는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아이폰 출시 전 노키아는 자사의 스마트폰을 뒷받침할 만한 소프트웨어가 부족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당시 노키아는심비안(Symbian)’이라는 자체 운용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키아는 심비안을 애플처럼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활성화시키는 노력을 충분히 기울이지 못했다. 사업부의 통합으로 회사 내에서 스마트폰 사업부가 힘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비안은 애플의 iOS, 구글의안드로이드(Android)’처럼 운용체계 시장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도 이를 외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뒤늦게 추격에 나서 스마트폰 라인업을 확대할 때에도 심비안을 고집했다. 하지만 이미 전 세계 스마트폰 사용자가 안드로이드나 iOS에 익숙해진 상태여서 심비안을 탑재한 노키아 휴대폰은 별 인기가 없었다. 2011 2월에야 뒤늦게 심비안을 포기하고 윈도를 채택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노키아가 전략적인 오류를 범하면서 고전하는 동안 애플과 삼성은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했다. 결국 2013 9, 1998년 이래로 14년간 세계 휴대전화 업계 1위 자리를 유지하며 한때 3030억 달러 수준의 천문학적인 시가총액 규모를 자랑하던 이 거대 기업은 휴대전화 사업 부문을 마이크로소프트에 단 72억 달러( 79092억 원)에 매각하는 신세가 됐다. 결론적으로 노키아는과거의 성공에 대한 미련으로자기부정을 하지 못했고 이는 쇠락의 길로 이어졌다.

 

김경원디큐브시티 대표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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