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원에서 펼치는 사냥, 축구 우리 속 원시성 자극하는 전쟁 같은 축제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축구는 푸른 초원에서 이뤄지는 사냥의 원형을 그대로 경기장에서 구현한다. 팀을 이뤄 사냥감을 쫓는 사냥의 모든 과정이 축구에 모두 그대로 들어 있다. 축구는 골(목표)을 사냥하고 승리를 사냥하는 게임이다. 이 과정에서는 협업이 필요하다. 또 부족들의 전쟁을 상징적으로 치르는 대리전이며 축구의 승리는 공동체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축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축구를 원시성 가득한 스포츠라고 한다. 사냥을 통해 그 어느 생명체보다 빠른 진화를 이뤄온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화생태학으로 바라본 축구는 단순한 경기를 넘어 이기고 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온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류 전체의 놀이다. 더해서 인간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축구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열리면 지구는 자신을 꼭 닮은 지름 22㎝의 공 하나에 울고 웃는다. 그런데 온 지구인이 한자리에 모여, 한곳을 바라보며 이렇게 열광하는 게 축구 이외에도 또 있을까? 인류는 왜 유독 축구에 열광할까? 선수가 아닌 한 축구가 살아가는 데 크게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진화생태학적인 차원에서 축구는 흥분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축구는 푸른 잔디 위에서 승부를 펼친다. 푸른 잔디 위 승부, 사실 축구의 기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아프리카 동부, 세계 최대 초원인 세렝게티 초원을 포함한 곳에서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마치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이 푸른 초원의 등장은 사실 초기 인류에게 절대 위기였다. 수백만 년 전 대륙을 덮고 있던 열대우림의 숲이 급격한 환경 변화로 초원으로 변하면서 삶의 터전이었던 숲이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초기 인류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숲을 따라 근근이 살아가거나, 아니면 점점 넓어지는 초원에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기로에서 선 인류는 과감하게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넓고 탁 트인 초원에는 먹잇감이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백만 마리의 초식동물들이 있었고, 자연사 한 동물만으로도 먹고살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법, 인류는 이 넓은 세상에 이미 자리를 잡은 강자들, 그러니까 사자, 표범, 하이에나 같은 맹수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고 신선한 고기를 위해 살아 있는 초식동물을 노려야 했다. 이 녀석들 또한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말이 넓은 세상이지 초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곳이었고 숲 속에서 해왔던 방식은 의미가 없었다. 인류는 걷기 시작한 덕분에 손을 얻었고, 고기를 섭취하면서 뇌를 키울 수 있었지만 덩치를 키울 만한 진화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살아가는 데 덩치가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덩치가 없으면 지배하며 살아갈 수 없다.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게 진화다. 인류는 덩치를 대신할 만한 훌륭한 장치를 찾아냈다. 바로 협력이다. 커진 뇌를 통해 계획을 하기 시작했고 ‘1+1=2’가 아니라 ‘1+1’이 3이 되고 5가 되는 짜임새 있는 협력을 통해 사자 같은 맹수들을 견제하면서 몇 백㎏이나 되는 덩치 큰 먹잇감을 사냥할 수 있었다. 당연히 두 발로 걷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인류는 달리기 시작했고 더 짜임새 있는 계획과 협력으로 생명력을 높여갔다.

축구는 푸른 초원에서 이뤄지는 사냥의 원형을 그대로 구현한다. 팀을 이뤄 사냥감을 쫓는 사냥의 모든 것이 축구에 들어 있다. 축구를 원시성 가득한 스포츠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냥을 통해 그 어느 생명체보다 빠른 진화를 이뤄온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 안에 내재된 본성에 가장 가깝다는 얘기다.

축구는 골(goal·목표)을 사냥하고 승리를 사냥하는 게임이다. 어느 선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포르투갈의 호날두는 세계 최고의 선수지만 월드컵에서는 ‘빛나는’ 스타가 아니었다. 축구는 혼자만의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혼자 빛날 수가 없다. 각자 자기 역할을 해내는 팀워크가 필수적이다. 팀워크는 숫자 싸움이라기보다 짜임새가 우선이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이 이뤄지면 1+1=5가 된다. 60∼70㎏밖에 안 되는 인간들이 1t이나 되는 버팔로를 사냥할 수 있고, 몸무게 250㎏의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사자를 이길 수 있다. 조직력은 불확실한 세상에 진출한 신참자 인류가 초원을 아우르는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오늘날 우리 인류를 만들어낸 근본적인 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축구는 순전히 몸과 두뇌가 어우러지는, 땀을 흘리며 뛰고, 달리는 경기다. 인류는 걸으면서 새로운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달리면서 생태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로 부상했다. 인류보다 먼저 초원에 자리 잡은 사자, 표범, 치타, 하이에나는 인류보다 훨씬 빨리 달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달리기는 단거리용일 뿐이다. 단거리가 아니라 멀리 달리는 능력에서 인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인류는 강자들이 잘하는 종목에서 ‘잘하는 2등’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목에서 1등을 지향해 최고가 됐다. 협력을 하면서 누구보다 멀리 추격하는 사냥꾼을 이길 수 있는 사냥감은 거의 없다. 실제로 인류는 말보다 더 오래,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미국에서 열리는 말과 인간의 달리기 레이스에서는 누가 이길지 모른다. 초반에는 말이 월등하게 앞서가지만 오래 달릴수록 전세가 역전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의 지구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생명체도 42.195㎞를 인간처럼 달릴 수 없다. 축구는 이런 인간의 진화적 노력, 다시 말해서 인간이 뛰고 달리면서 땀과 노력으로 ‘골’을 이뤄내는 진화의 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옛날 초원 위를 뛰었던 사냥꾼은 이제 더 높은 몸값을 위해 푸른 잔디 위를 뛰고 있다. 왜 남미에서 실력 좋은 선수들이 배출되는가? 가난을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축구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출신의 선수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능력을 가진 사냥꾼은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지금도 야생 부족들의 사회에서 훌륭한 사냥꾼은 뭇 여성들의 흠모 대상이다.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얘기다. 박지성이 그렇듯이 전도양양한 미래가 있는 청년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닌가.

큼지막한 녀석을 사냥해 돌아왔을 때 마을은 축제로 이들을 맞이했다. (야생 부족들은 지금도 이렇게 한다.) 사냥꾼들의 고생을 위로하고 성과를 축하하며 성과물을 다 함께 나눠가지는 축제는 공동체가 하나 되는 것을 더 공고하게 할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은 종교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축제를 뜻하는 페스티벌(Festival)은 그리스어 Fanum, 그러니까 신전에서 행해지는 종교행사, 그것도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축제에서 생겨난 어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축구에서도 축제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다만 이제는 사냥팀이 가지고 온 노획물을 놓고 다같이 포식하는 축제가 아니라 TV 덕분에 사냥 과정을 즐기는 축제가 됐다는 게 다를 뿐이다. (생중계가 되지 않았던 70년대에는 승리하고 온 선수들을 위해 카퍼레이드라는 축제를 벌였다.) 문명의 산물인 TV 생중계를 통해 좀 더 흥미진진하게 사냥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축제는 공동체의 기쁨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즐기는 잔치다. 평소 다이어트를 하는 이들이라도 맛있고 시원한 ‘치맥’을 먹고 마시며 함성을 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린다. 혼자서는 흥이 나지 않기에 모이고, 경기장에 갈 수 없으면 전광판 앞에라도 모인다. 골이 들어가면 환호하고, 먹히면 탄식을 토해낸다.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훌륭한 과정이다. 사냥 성공을 축하하는(이제는 기원하는) 축제를 통해 하나가 됨을 지향하는 장치가 여전히 가동되고 있다. (브라질 월드컵의 공식포스터 문구는 ‘축구로 하나 되는 나라 - 브라질과 축구: 하나의 정체성’이다.)

19세기에 탄생한 축구가 빠르게 전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은 데는 우리 안에 깊숙하게 녹아 있는 이런 오래된 본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축구는 ‘원시성 가득한 스포츠’다. 여기서 원시성은 ‘낙후된’의 의미가 아니라 기본적 본성, 문명 이전의 본성을 의미한다. 원초적 욕망을 채워주는 스포츠라는 얘기다. 그래서 축구는 단순하다. 복잡한 규칙이 없다. 축구는 국가와 민족,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 피부 색깔과 각기 다른 언어를 막론하고 종교와 이념을 넘어 동일한 규칙으로 경기를 한다. 빈 라덴도 축구를 좋아했고, 카뮈는 다시 태어나면 소설보다 축구를 선택하겠다고 했으며,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도 소문난 축구 팬이었다. 덕분에 2014년 현재 유엔 회원국은 193개국이지만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은 209개국이나 된다.

축구의 원시성은 엠블럼이 증명한다. 팀들이 자신의 상징처럼 여기는 엠블럼에는 독수리, 사자, 용, 호랑이, 방패 등이 가득하다. 대부분 맹수들이거나 전쟁용품들이다. 첼시는 사자, 리버풀은 불사조, 아스널은 대포, 맨체스터 시티는 독수리, AS로마는 늑대다. 이뿐인가.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팀은 사자 문양이 그려진 패치를 달 수 있고, 잉글랜드 대표팀은 사자 문양을, 독일 대표팀은 독수리 문양을 달고 뛴다. 한국 대표팀은 호랑이와 함께 뛴다. 원시부족들이 했다는 독수리를 내세우고, 호랑이, 사자 같은 토템을 숭상한다. 그래서 축구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리는 원시성을 살아 있게 하는 열망이고 열정이라고 한다.

뛰는 선수들은 물론 보는 사람들까지 함성을 지르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우리 안의 오랜 본성을 폭발적으로 분출시키는 근원에 원시성이 있다. 물론 이런 원시성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인류는 원시성의 부작용으로 무던히도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나된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우리’가 어느 이상으로 강화되는 순간,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는 부정적 부족정신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쟁이 좋은 예다. 축구 또한 이런 부작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축구의 응원전은 그 어느 스포츠보다 격렬하다 못해 난폭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국가 간 대결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축구 이외의 어떤 스포츠가 전쟁 대리전 양상을 띠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축구 경기를 보도하는 기사들도 승리 사냥, 전사, 전략, 전술, 제압, 격파, 일사불란 등 전쟁 용어로 가득하다.

이 때문에 ‘부족’들의 이런 전쟁을 ‘상징적으로’ 치르는 축구 감독들은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다. 상징적이긴 하지만 ‘전쟁’이니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문명의 상징인 손을 쓰지 못하고 발과 몸으로만 뛰어야 하고 수많은 변수들이 영향을 끼치기에 승부는 예측할 수 없다. 감독은 이 모든 것을 컨트롤하면서 승리를 이끌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리더의 존재가 결정적이라는 의미다. 축구에서 리더십을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리더십 없는 승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지성이 뛰었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2013년 같은 선수들이 뛰었지만 전반기와 후반기 성적은 극과 극을 달렸다.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은 많은 승리를 일궈냈지만 후임인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의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단지 감독만 바뀌었을 뿐인데. 원시성을 어떻게 컨트롤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는 의미다.

진화생태학으로 바라본 축구는 단순한 경기를 넘어 이기고 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온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류 전체의 놀이다. (고등동물일수록 놀이가 발달하는 특징이 있다. 놀이를 통해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습득한다.)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통해 골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이 과정 자체를 통해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푸른 초원에서 사냥감을 찾아 달리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리더 역시 이런 과정을 통해 목표를 달성한다.

아니, 우리가 축구에 열광하는 것은 우리 안의 본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축구와 닮아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실 국가는 국제무대에서, 기업은 시장에서, 샐러리맨은 직장이라는 축구장에서 뛰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드리블을 하고, 누군가는 슛을 하고, 누군가는 수비를 하면서 살아간다. 멋진 골을 만들려고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간 바람에 이상한 볼을 만들기도 하고, 불공정하다고 격렬하게 항의하다 옐로카드를 받기도 한다. 못된 심판도 있다. 또 누군가는 스타가 되고, 누군가는 땅을 치며 눈물을 머금어야 한다. 관중석에서 보면 저런 것도 못하느냐, 바보 아니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막상 직접 해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 살아가는 일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축구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꼭 빼닮았다. 현실에서 못한 것들을 축구를 통해 하고 싶어 한다. 이러니 어찌 축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광원 생존경영연구소장 araseo@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