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열정적 완벽추구… 그 뒤의 창조적 파괴 기나긴 순례의 끝, 참 나를 찾다

149호 (2014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혁신

 창조적 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그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난 순례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조직이론 관점에서열망수준창조적 파괴의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세계적 예술가들의 열망수준은 흔히 선두 기업들이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해서 ‘1등 기업이 되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즉 창조적 예술가들의 열망수준은 자신의 과거 기준이나 경쟁자 등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완벽함이다. 그 결과 두 번째 특징인 창조적 파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이 같은순례자적 삶의 궁극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세계적 첼리스트인 송영훈 경희대 음대 교수다. 재능을 타고났지만 정작 첼로에는 큰 관심이 없던 그는 두 명의 위대한 멘토, 바로 로빈스 교수와 자신의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순례자적 삶에 나선다.

 

편집자주

모두가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불꽃 같은 창조적 에너지로 인류사를 밝혔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해보면 평생 한군데 정착해서 편안히 창작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절하게 바라는 뭔가를 찾아 무수한 시련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길을 떠난다. 마치 일생이 하나의 순례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19세기 말 동시대를 살아가며 서로 애증이 뒤얽혔던 고흐와 고갱의 삶을 보면 필자가 말하는 순례의 의미를 금방 알 수 있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가난한 시골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목사가 되기 위해 탄광촌에 들어가 광부들의 비참한 삶을 함께하려 했다. 그러나 지나친 순수함과 열정이 광부들에게 부담이 돼 소외를 당하면서 상처를 입고 정신질환까지 겹쳐 고통 속에 작품 활동을 하다 짧은 생을 마친다. 고흐는 브뤼셀, 헤이그, 파리, 암스테르담, 앙베르, 영국 렘스케이트, 프로방스, 아를르 등을 떠돌아 다니다 결국 파리 근교 작은 시골 마을 오베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까마귀가 나는 보리밭바로 옆에 있는 오베르의 작은 공동묘지에는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나란히 묻혀 있다. 그 묘지 앞에 서면 고흐가 머나먼 순례길에서 돌아와 드디어 안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고갱 또한 마찬가지다. 파리에서 신문기자의 아들로 태어난 고갱은 선원이 되려다 다시 증권거래원으로 일했으나 결국 예술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화가가 됐다. 일생 동안 파리, 페루의 리마, 다시 프랑스 오를레앙, 다시 파리, 부르타뉴, 파나마의 마르티니크 섬, 고흐와 함께 아를르, 남태평양 타히티, 다시 프랑스, 다시 타히티로 끝없이 옮겨 다니다 먼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둔다. 뭔가를 찾아 전 세계를 헤매고 다니는 순례의 길이 그의 이상향이던 타히티에서 끝났다. 그의 대표 걸작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바로 그의 일생 동안의 순례를 한 화폭에 담아놓은 대작이다.

 

필자가 창조적 예술작품들이 탄생하는 조건과 과정에 대한 탐구를 통해 창조성의 원리를 밝히고자 시도한 책인 <창조성의 원천>을 집필하기 위해 세계적 예술가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술가들로부터 반복적으로 받은 인상은 그들이 마치 이 세상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그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난 순례자 같다는 느낌이었다.

 

 

“음악가는 편안한 삶을 살아선 안 돼!”

첼로 거장 아르토 노라스의 이 한마디는 저로 하여금 당시 안정된 연주가의 삶을 버리고 그의 제자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한 번의 성장을 위해 훌훌 털고 떠난겁니다.

-첼리스트 송영훈

 

 

연주하며 교감을 나누는 4첼로 실내악

 

이런 창조적 예술가들의 삶은 조직이론적 관점에서 열망수준과 창조적 파괴의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적 예술가들의 열망수준은 흔히 선두 기업들이 모든 경쟁자들을 압도해서 ‘1등 기업(great company)’이 되겠다는 것과 같은 ‘1이나최고는 아니었다. 인터뷰 과정에서 이들 세계적 예술가는 누가 그 분야의 최고냐, 혹은 자신의 위상은 어느 정도 되느냐 등에는 전혀 관심 없고 단지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상상하는 완벽함을 열망한다. 즉 창조적 예술가들의 열망수준은 자신의 과거 기준이나 경쟁자 등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완벽함인 것이다. 진정한 완벽함은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항상 갈급함과 부족함을 느끼고 끊임없이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도전하게 된다. 그 결과 두 번째 특징인 창조적 파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즉 자신이 경쟁우위를 가지는 영역에 결코 머무를 수 없으며 끊임 없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아 미지의 영역으로 순례 길을 떠나게 된다. 창조의 순례자인 이들에게는 매 순간의 예술이란 더 완벽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 과감하게 파괴하고 버려야 할 대상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피카소는나는 파괴하기 위해 그린다라고 선언했다.

 

필자가 <창조성의 원천>을 저술하기 위해 인터뷰한 20여 명의 세계적 예술가들은 예외 없이 이런 순례자적 삶을 살아왔지만 그중에서도 순례자의 이미지에 특히 가까운 사람은 젊은 첼리스트 송영훈이다. 송영훈의 삶의 궤적을 통해 예술창조의 순례자적 본질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송영훈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21세기 한국 클래식 음악계를 이끌어갈 주축으로 주목받고 있는 첼리스트 송영훈은 5살에 첼로를 시작해 11살에 서울 시향과 랄로 협주곡 협연으로 데뷔했다. 예원학교에서 2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은 후 1988년 줄리어드 예비학교 실기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이어서 줄리어드 음대에서 공부하다 바로 영국 노던 왕립 음악원, 핀란드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차닝 로빈스, 랄프 커슈바움, 아르토 노라스 등 세계적 거장들에게 사사했다. 줄리어드 음대에 재학하는 동안 줄리어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첼로 수석, 영국 노던 왕립 음악원 오케스트라 첼로 수석을 역임했으며, 강효 줄리어드 대학 교수가 전 세계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설립한 세종 솔로이스츠 멤버로, 금호 4중단 멤버로도 활동했다. 피아노 4중주 그룹인 MIK 앙상블의 멤버로서 2005 1집 앨범 ‘MIK Ensemble’을 발표했다. 특히 영국 노던 왕립 음악원을 다닐 당시 알게 된 현대 탱고의 거장 작곡가 피아졸라의 음악에 흠뻑 빠진 송영훈은 첼로로 연주한 탱고 앨범을 발매하고 탱고 콘서트를 개최해 클래식음악과 첼로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송영훈의 첼로 소리가 모순적이라고 한다. 성스럽고 깊으면서도 감각적이다. 격정적으로 거칠다가도 갑자기 한없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바뀐다. 화려하면서 동시에 담백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송영훈만의 이런 절묘한 첼로 소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송영훈은 그 어떤 거장도 낸 적이 없는 자신만의 첼로소리를 찾아 끊임없이 전 세계를 방랑해왔다. 마치 순례하는 구도자 같은 음악가다. 강동석, 김영욱, 백건우, 정경화, 정명훈 등 한국 클래식 음악을 세계에 알린 1세대를 이을 2세대 음악가를 대표하는 세계적 첼리스트 송영훈은 심각한 유럽 고전파, 낭만파 시대의 정통 클래식 레퍼토리와 대중적인 탱고 등 크로스오버 레퍼토리에서 모두 최고의 음악성을 보여주는 드문 음악가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독주는 물론 다양한 형태의 실내악 앙상블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세계적 명성과 안정이 보장된 자리를 박차고 스승을 찾아 다시 학생으로 되돌아가기도 하며, 장르의 경계를 넘어 탱고에 심취하거나 팝 음악가들과도 서슴지 않고 협연하는 등 실험정신으로 충만한 음악가다. 그의 이런 모험과 도전은 모두 학생시절 영국에서 듣고 그의 뇌리에 영원히 박혀버린 거장들의 첼로소리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한 내면으로의 끝없는 순례다.

 

2006년 첼로로 연주된 ‘Tango’ 앨범이 발표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 앨범의 깊고 자유로우며 격정적이고 관능적인 첼로 선율에 환호했다. 이 앨범에서 연주된 곡들을 작곡한 현대 탱고 음악의 전설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민속음악은 물론 정통 클래식 음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존경해 마지않는 거장이다. 영국 노던 왕립 음악원에서 첼로를 공부하던 한 젊은 음악인도 그의 음악에서 깊은 예술적 영감을 받고 빠져들었다. 피아졸라의 탱고 선율은 당시 슬럼프를 겪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예술 세계로의 빗장을 열어주는 동시에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 젊은 음악가가 바로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송영훈이다.

 

세계 최고의 클래식 음악 교육기관들과 거장들에게서 첼로를 배운 송영훈은 정통 클래식 첼로 레퍼토리들을 모두 섭렵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탱고, 보사노바,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장르들이 갖는 각기 다른 매력을 발견하고 이를 자신만의 첼로 소리로 표현해보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차닝 로빈스의 마지막 제자로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세종 솔로이스츠 멤버로 활동하던 그는 새로운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안정된 지위를 과감하게 버리고 다시 학생이 된다. 핀란드에 건너가 거장 아르토 노라스를 사사했다. 왜 그는 한자리에 머물지 않고 순례자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으로 돌아다니는 것일까? 그가 음악의 순례자로서 찾아 다니는 성지는 도대체 무엇일까?

 

지치지 않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첼로에 심각하게 몰입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는 송영훈을 만나 그의 음악세계와 첼로에 대한 사랑, 그가 평생 찾고 있는 순례의 대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봤다.

 

예술가의 DNA - 비올리스트 아버지와 바이올리니스트 형

송영훈이 첼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무엇보다 그의 부친이자 국내 비올라계의 개척자 고 송인식 씨가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였으므로 클래식 음악소리가 항상 집안에서 끊이지 않았다. 음악은 어릴 때부터 그의 무의식과 DNA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송인식 교수는 자식들에게 결코 음악가의 길을 강요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악기는 하나씩 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는 정도였다. 어릴 적부터 무엇에서나 지기 싫어했던 송영훈은 현재 미국 보스턴의 명문 음악대학인 뉴잉글랜드 음악대학(New England Conservatory) 교수로 재직 중인 형 송정훈이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하자 형을 이기기 위해 크기가 훨씬 큰 첼로를 시작했다고 한다.

 

송영훈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사랑하고 첼로를 사랑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형적인 그 나이 또래답게 스포츠를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아이였다. 밝고 쾌활하고, 친구들과 축구 하는 것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내면은 평범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권유로 계속해나가던 첼로였지만 그에게는 타고난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와 형 등 삼부자가 모두 현악기를 하는 음악가 DNA를 타고난 그였다. 연습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송영훈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한국에서 나갈 수 있는 모든 콩쿠르에 나가 상을 휩쓸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나갈 수 있는 모든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을 정도였다. 즉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연주자였다는 얘기다.

 

그에게 한국에서는 첼로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떤 자극도, 발전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일한 선택은 형이 있는 미국이었다. 송영훈은 먼저 유학을 간 형을 따라 뉴욕 줄리어드 예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소명의 개안 - 스승의 인도로 예술가의 길에 눈을 뜨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길에 들렀던 독일에서 송영훈은 평생을 잊지 못할 연주를 듣게 된다. 처음으로 음악에서 깊은 감동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음악을 사랑해서 첼로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음악보다는 운동을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때 베를린의 콘서트에서 들은 음악은 그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줬다. 바로 피아노의 여제라고 불리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였다.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에 베를린의 한 저명 첼로 교수에게 오디션을 보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어요. 부모님과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를 들으러 갔어요. 레퍼토리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는데 협연자가 저는 그때까지 알지도 못했던 전설적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였어요. 저는 첼로 전공인데도 그날 연주에서 처음으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슈만 피아노 협주곡은 그때는 알지도 못하는 곡이었는데도 뭔가 슬프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어요. 나도 저런 소리를 내고 싶다고 느꼈어요. 물론 그 다음날 다 잊어버렸지만.”

 

형이 있는 뉴욕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입학한 줄리어드 예비학교에서 송영훈은 일생을 바꿔놓을 정도로 깊은 영향을 미치고 그를 본격적으로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운명적인 스승을 만난다. 그에게 첼로에 대해, 음악에 대해, 음악가로서의 삶에 대해 결정적인 영감을 줬던 일생일대의 멘토이자 스승은 바로 첼로의 거장으로 당시 줄리어드 음악대학의 교수였던 차닝 로빈스였다.

 

차닝 로빈스는 동양에서 건너 온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송영훈을 처음 만난 날 레슨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차닝 로빈스는 어린 송영훈이 타고난 재능은 탁월하나 스포츠에 빠져 첼로에 그렇게 열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질문은 하나였다. 혹시 음악에서 진짜 감동을 받은 순간이 있었냐는 질문이었다. 음악에서 깊이 감동받았던 적이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는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환경만 잘 조성되면 다시 깊이 사랑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닝 로빈스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선생님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음악에서 진정한 감동을 받았던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나. 혹시 한 번도 없었다면 지금 음악을 그만 두고 떠나라. 음악에서 감동을 받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면 결국은 첼로를 안 할 것이다. 분명히 언젠가 음악을 그만두고 운동을 하든가 다른 길로 갈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은 가르치기 싫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그때까지 음악에서 진정한 감동을 받은 적이 한 번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순간에 대해 선생님께 말씀 드렸어요. 베를린 필하모니 연주회에서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그럼 됐다. 내일부터 레슨 스케줄을 짜줄 테니 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선생님에게 무지하게 혼나면서 첼로 공부를 했어요.… 그때 선생님이 68세였고 지병이 있었는데도 무척 엄하게 저를 가르치셨어요. 그전까지는 나가는 콩쿠르마다 우승을 하고 주목을 받아서 무엇도 겁날 것이 없었는데 로빈스 선생님께 첫 레슨을 받는 날부터 많이 혼났어요. 선생님은 유태계 미국인이신데 요요마를 7∼8살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가르친 첼로계의 전설이었어요. 어린이들을 많이 다루신 거죠. 연습 때 나쁜 버릇이 나오면 첼로 엔드핀을 뾰족하게 갈아 인정사정 없이 찌르기도 하시고 심지어 레슨 때 양말 색까지 참견을 하셨어요. 레슨이라고 무대에서 신을 수 없는 하얀 양말을 신고 오면 다시 집에 가서 갈아 신고 오라고 하셨어요. 진짜 엄하게 레슨을 받았는데 절대로 칭찬은 안 하셨어요.”

 

로빈스 교수가 송영훈을 특별히 엄하게 가르친 것은 송영훈이 자신의 마지막 제자가 될 것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영훈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 이미 그의 지병은 심각하게 악화돼 있는 상태였다. 로빈스 교수는 송영훈을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그에게 예술가로서의 모든 것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송영훈은 로빈스 교수로부터 그렇게 오래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레슨보다는 병상 곁에서 스승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 과정에서 송영훈은 음악과 예술에 대한 일종의 사명감을 갖게 됐다.

 

“병상에 누워 계신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제게 사명감이라는 게 생겼어요. 그때는 첼로 레슨보다도 선생님과 대화를 굉장히 많이 했어요. 제가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시고 자신의 음악관도 들려주셨어요. 그리고 제가 첼로를 정말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안 해도 된다고도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 저는 반대로 첼로에 대한 애착이 더 커졌어요. 차닝 로빈스 선생님은 제게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어요. 미국 아버지셨죠.”

 

로빈스 교수는 말년에 병상에 누워 어린 제자에게 첼로 레슨 대신 음악에 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들려주며 어린 소년이 세계적 음악가가 돼 자신의 예술적 아들로 커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송영훈에 대한 로빈스 교수의 깊은 애정과 기대는 그의 악기 구입에 얽힌 에피소드에서 잘 알 수 있다.

 

“저한테 필요한 악기를 구해줘야 한다고 일흔이 다 되신 노인이 뉴욕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고속도로를 직접 운전해서 갔어요. 일반인들은 두 시간 반이면 가는 거리를 힘들게 운전해 여섯 시간이나 걸렸어요. 시내 운전 속도인 50∼60㎞ 정도로요. 필라델피아의 악기상에게서 저한테 꼭 맞는 사이즈의 악기가 하나 들어왔다고 전갈이 왔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선생님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못 샀어요. 그러다가 돌아가시기 4개월 전쯤에 줄리어드에서 한 10분쯤 떨어져 있는 악기상에 우연히 저를 데리고 악보를 사러 가셨다가 허름한 케이스에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을 보고 선생님이 저게 뭐냐고 한 번 열어보라고 하셨는데 열어보자마자 선생님 눈빛이 바뀐 거예요. 악기상 주인은 오래된 좋은 악기라서 조심조심 다루는데 선생님은 주저 없이 꺼내서 제게 한 번 연주해보라고 하셨어요. 웬 어린 꼬마에게 엄청나게 비싼 악기를 만지게 하니 악기상 주인이 말리려 하는데 선생님은 이 꼬마가 알아서 잘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 지 1분도 안 지나서 선생님이 주머니를 뒤지며 무엇인가를 찾으시더니 지갑을 꺼내셨어요. 1불짜리와 20불짜리를 다 합쳐서 250불인가 300불인가를 주인에게 건네주고 동전은 다시 넣으시더라고요. 그러더니 나머지 첼로 값은 이 아이가 이 악기로 언젠가 세계적 연주자가 되면 그때 갚을 거라고 하시며 그 첼로를 들고 나오셨어요.”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 바비 맥퍼린과의 협연

 

순례의 명령 - 스승의 유언을 따라 소리의 순례 길에 나서다!

얼마 후 차닝 로빈스가 지병으로 별세했다. 진정한 스승인 차닝 로빈스의 죽음은 이제 막 소년티를 벗고 있던 송영훈에게는 이겨내기 버거운 사건이었다. 로빈스 교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송영훈을 걱정하고 그의 미래에 대한 유언장을 남겼다.

 

“로빈스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0시간을 울었어요. 눈물이 멈추질 않았어요. 형과 손 잡고 맨해튼 거리를 그냥 달려갔어요. 어디 계신지도 몰라서 일단 줄리어드 예비학교 교장선생님에게 갔어요. 린다 교장선생님은 제게는 미국 어머니 같은 분이었거든요. 제가 가자 교장선생님께서 밤 10시까지 퇴근도 안 하시고 저희 형제와 같이 안고 울었어요. 로빈스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속상했던 일들을 다 말하면서 어떻게 말도 안 하고 갈 수 있냐고 통곡했어요. 그러자 교장선생님께서 로빈스 선생님이 아픈 모습과 마지막 가는 모습을 어린 제게 절대로 보여주기 싫어하셨다며 대신 제게 쓴 글이 있다고 보여주셨어요. 제게 남긴 유언장이었어요. 그 유언장을 자세히 보니 세계 첼로계를 이끌어온 커다란 물줄기와 그 속에서 제가 앞으로 있어야 할 위치를 하나하나 다 설명해주셨더라고요. 이탈리안 첼로학파의 계보를 잇는 미국의 전설적인 초창기 첼리스트인 펠릭스 새몬드에서 시작해서 레너드 로즈, 차닝 로빈스, 린 해럴, 요요마로 이어지는 전설적인 거장들의 계보를 말씀해주셨고 제가 그런 위대한 거장들의 계보를 이어야 한다는 부탁이었어요. 선생님은 제 성격을 일찍 파악하셔서 조금이라도 남보다 특별하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자만할까봐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하지 않으셨던 거였어요.”

 

차닝 로빈스 교수의 유언장은 아직 운동을 첼로보다 좋아하던 어린 소년이던 송영훈에게 예술가로서의 무거운 사명감과 뿌듯한 자부심을 동시에 심어줬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전설로만 알고 있던 거장들의 계보 끝자락에 자신이 있었다. 유언장에는 송영훈이 뉴욕을 떠나야 하는 이유도 함께 적혀 있었다. 로빈스 교수는 송영훈이 뉴욕에서 계속 공부하고 활동하면 상업적으로는 잘 팔리는 스타 음악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깊이 있는 첼리스트로 성장해 자신만의 깊은 소리를 가진 거장으로 발전하려면 유럽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했다.

 

전설적 거장들이 내는 강렬하면서 깊으며 신비롭기까지 한 첼로 소리를 듣는 순간 냉정하게 자기 자신의 첼로 소리를 평가하게 됐다.

결과는 충격과 절망감이었다.

그들이 내는 깊은 첼로 소리 자체를 낼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곳의 오랜 문화와 전통, 새로운 교육방식을 받아들여 한 단계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 사이는 전설적인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이 카네기홀 대표를 지내면서 일종의 뉴욕 음악계의 대부로 행세하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음악가들끼리 집단을 형성해 폐쇄적으로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경향이 있어 어린 송영훈이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언장 첫 장에서 거장들의 계보를 말씀하신 후 두 번째 장에서는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을 주셨어요. 저는 즉시 선생님이 주신 지침을 따라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유럽의 다섯 학교에 지원했는데 가장 먼저 답이 온 분이 영국 맨체스터의 왕립 노던 음악원의 랄프 커슈바움 교수님이었어요. 이런 거장들은 보통 학생을 네다섯 명 정도만 가르치죠. 반 학기 동안 유럽행 준비를 하면서 줄리어드 음악원을 다녔는데 로빈스 선생님도 안 계시고 후임으로 오신 분과는 그전 같은 유대 관계가 없었어요. 그래서 빨리 짐 싸서 커슈바움 교수께로 갔어요.”

 

충격과 좌절- 진정한 거장들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다!

채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영국으로 건너간 송영훈은 현지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힘겨운 생활을 계속했다. 그전에 살았던 뉴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시골이었고 교통편도 좋지 않았다. 뉴욕에서는 학교를 다니면서 연주활동을 병행했지만 왕립 노던 음악원의 학교 교칙상 그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활동을 그만 두고 랄프 커슈바움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첼로연주를 사사하기 시작했다. 항상 같이 있던 형도 없고 친구도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편한 시골에서 송영훈은 고립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영훈은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충격적인 경험을 영국의 시골 맨체스터에서 하게 된다. 랄프 커슈바움 등이 주축이 돼 맨체스터에서 격년제로 개최하던 첼로만을 위한 세계 최대 규모의 페스티벌이 열렸다. 1993년 맨체스터 첼로 페스티벌에서 송영훈은 그동안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로만 생각하고 감히 범접할 생각조차 못했던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 야노스 스타커, 요요마 등 전설적 거장들의 연주를 한꺼번에 직접 듣게 된 것이다. 엄청난 감동과 충격, 좌절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지금까지 항상 1등만 하고 칭찬을 받아왔던 그는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때까지는 자신의 첼로 소리를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곡의 해석이나 기교는 더 수련해야겠지만 첼로 소리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전설적 거장들이 내는 강렬하면서 깊으며 신비롭기까지 한 첼로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꿈에서 깨며 처음으로 냉정하게 자기 자신의 첼로 소리를 평가하게 됐다. 결과는 충격과 절망감이었다. 그들이 내는 깊은 첼로 소리 자체를 낼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당장 첼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로빈스 선생님을 위해서고 뭐고 그런 소리를 평생 못 낼 것 같았어요. 그때까지 항상 칭찬만 받았던 제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된 거예요. 저분들 하고 비교했을 때 나는 정말 큰일 났다. 당장 첼로 그만둬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스로 그렇게 결심한 것이 아니라 직접 들어본 전설적 거장들의 손 닿을 수 없이 높은 수준이 저 스스로를 무너지게 만들었어요. 이 이상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지 상상도 안 돼서 포기하게 만든 거예요. 나는 절대 안 되겠다. 그걸 처음 느꼈어요.”

 

이런 충격은 어떤 사람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슬럼프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사람에게는 한 단계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송영훈은 이때 자신 말고도 이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젊은 유망주들이 자신과 비슷한 쇼크와 좌절감을 맛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게 됐다.

 

 

각고의 노력과 슬럼프- 나만의 소리를 찾는 고행의 수도승 생활

전설적 거장들의 완벽한 연주를 직접 듣고 자신의 첼로 소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좌절했던 송영훈은 다시 용기를 내어 조금이라도 그 소리에 다가가기 위해 엄청난 양의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기숙사 방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도 않고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연습만 해서 학교 친구들은 그를 정신병자라고 불렀다.

 

“지금도 당시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그래요. 제가 진짜 정신병자인 줄 알았대요. 그냥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아무데도 가지 않고 연습만 했어요. 왜냐 하면 그때 들었던 거장들의 소리를 내야 하니까. 로스트로포비치가 냈던 소리, 야노스 스타커가 냈던 소리, 요요마가 냈던 소리, 미샤 마이스키가 선보였던 독특한 핑거링 등. 레슨이나 수업도 거의 안 가고 방에서 연습만 했어요. 운동선수도, 음악가도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재능이 중요하긴 하지만 나머지는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런데 그전까지는 그렇게 열심히 연습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민망해도 그때까지 심각한 연습은 거의 안 했어요. 그래도 항상 콩쿠르 등에서 결과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제 방에서 하루 종일 첼로 소리만 나니까 학교에서도 이상하다고들 했어요. 그때는 정말로 손가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연습했어요.”

 

2년 동안 기숙사 방 밖에도 거의 나가지도 않고 피나는 연습을 했지만 노력의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뼈에 각인될 정도로 강렬한 충격을 줬던 대가들의 소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 잠을 아껴가며 2년간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거장들의 경지는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완전한 자신감 상실이었다. 랄프 커슈바움 교수의 추천으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나갔지만 자신의 소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이 즈음 그는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마침 그때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도망치듯 급히 귀국했다.

 

 

아버지와 스승의 메시지 - 다시 세상으로 나가라!

송영훈과 그의 아버지 송인식 교수는 같은 음악의 길에 종사했지만 그때까지 평범한 부자지간처럼 대화를 많이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 나가 생활하던 송영훈은 아버지를 만나 대화할 시간이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첼로를 포기할 정도로 깊은 슬럼프에 빠져 자신감을 잃고 있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아버지였다. 매일 아버지의 병상 곁을 지키면서 송영훈은 평생 못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학교생활 이야기들, 아버지의 연애시절 이야기 등 소소한 일상부터 깊은 이야기까지 부자지간은 8개월에 걸쳐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에게 사랑과 희생이라는 숭고한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줬다. 그때까지 외국에서 혼자 살아가면서 가족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고 또 주변의 칭찬과 화려한 수상경력들로 시야가 가려져 자기 내면의 진정한 소리에 대해 깊이 고찰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병상에 누운 아버지와 8개월간 나눈 대화는 그때까지 송영훈에게 없었던 사랑, 희생, 가족, 예술가적 소명의식 등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가족 간의 사랑과 희생뿐 아니라 송영훈의 예술가로서의 일생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대가들의 소리를 따라갈 수 없어서 좌절하고 첼로를 포기하고 8개월 동안 첼로를 거의 손에 대지 않았던 그가 다시 첼로를 잡게 됐다. 병상에 계신 아버지의 한마디가 결정적 계기였다. 아버지는 송영훈에게 그가 세상으로부터 보물 같은 재능을 선물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그 선물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가 다시 세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가에게 자기 실력과 재능에 대한 좌절은 예술가로서의 꿈을 포기할 만큼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때 그 재능과 가능성을 믿고 조용히 지켜봐 주는 멘토와 스승의 따스한 시선과 한마디 격려는 예술가가 다시 한번 지난한 예술의 길에 도전하는 용기를 준다. 송영훈에게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좌절했을 때 조용히 용기를 주고 격려해준 멘토가 바로 아버지였다. 그때 송영훈은 줄리어드 예비학교 시절 미국 아버지로 부르던 스승이었던 차닝 로빈스 교수도 그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직 첼로에 맘을 붙이지 못하고 스포츠에 빠져 있던 송영훈에게 차닝 로빈스는 연습을 강요하기보다 아버지처럼 믿고 기다리며 격려를 해줬다. 비록 칭찬은 거의 해주지 않았던 스승이었지만 로빈스 교수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소명에 대해 일깨워 준 것이다.

 

“로빈스 선생님은 제게앞으로 세상에 음악을 들려줌으로써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야 하는 재능과 책임을 타고났다고 하셨어요. ‘이건 신이 주신 재능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요.”

 

 

또다시 일어나 순례길에 나서다 - 드디어 자신의 소리를 찾다!

아버지와 로빈스 교수의 유언에 용기를 얻어 다시 첼로를 잡은 송영훈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 기회가 닿을 때마다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열심히 연주를 하다 보면 언젠가 영국에서 들었던 거장들과 같은 소리를 자신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우선 연주에 몰두했다. 이미 소년 시절부터 워낙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많은 기회가 주어졌다. 강효 줄리어드 교수가 전 세계의 실력 있는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한 세종 솔로이스츠의 첼로 수석과 금호문화재단의 박성용 이사장이 세계적 4중주단을 꿈꾸면 창단한 금호 현악4중주단 첼로 주자, 세계적 실내교향악단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의 객원 수석으로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다.

 

그러던 송영훈에게 프랑스의 한 대부호 음악후원자가 전 세계 젊은 음악가들을 모아 함께 합숙하며 세계적 거장들에게 직접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인구 300명가량의 프랑스의 한 중세 도시에 있는 빌라촌에서 각 나라별로 30세 미만의 젊은 첼리스트와 성악가 15명을 초대했다. 각각 집 한 채와 자동차를 빌려주며 온전히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해줬다. 이때 핀란드의 명문 시벨리우스 음악원의 교수인 세계적 첼리스트 아르토 노라스가 초빙돼 젊은 첼리스트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합숙 프로그램은 매일 아침 6시에 시작해 밤까지 계속 됐다. 한 사람당 두세 시간가량 노라스에게 직접 레슨을 받고 저녁마다 작은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30세 미만의 유망한 첼리스트라면 항상 국제 콩쿠르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경쟁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합숙을 통해 서로 더 잘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 젊은 음악가들은 각 나라를 대표하는 실력 있는 연주자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쟁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더욱 치열하게 연습하고 연주했다. 쟁쟁한 젊은 첼리스트들이 모여 매일 연주회를 개최는 이 기간은 마치 첼로 페스티벌 같았다.

 

매일 아르토 노라스에게 레슨을 받고 면담을 하는 과정에서 송영훈은 깜짝 놀랄 제안을 받게 된다. 아르토 노라스가 자신의 뒤를 이을 뛰어난 제자를 마지막으로 키우고 싶다며 송영훈에게 러브콜을 한 것이다. 전설적인 거장 노라스의 제자가 되기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대가들은 제자를 많이 키우지 않고 4∼5명 정도만 가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제자를 받아들이려는 시기와 교육을 받고 싶어 하는 학생 본인의 시기가 서로 맞지 않으면 제자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그때 송영훈은 이미 전문 연주자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망설였다. 그때 노라스는 송영훈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영광이지만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유로 뉴욕에 소유하고 있던 아파트, 소속 단체들로부터 받고 있던 대우 등을 다 이야기했더니 노라스 선생님께서 딱 한마디 하셨어요. ‘물론 그게 편안하지. 그런데 음악가는 절대 편안하면 안 돼라고요. 제 레슨을 맡아 보니까 너무 잘하는데 굉장히 편안하다고 평가하셨어요. 슬픈 선율조차 행복하고 아름답게 들린다는 것이었어요. 이 말씀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나름대로 비장하고 슬픈 마음으로 연주한다고 생각했던 제게는 큰 충격이었어요. 그래서 다시 영국의 첼로 페스티벌에서 엄청난 충격과 좌절을 느꼈던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고 결심하게 됐어요. 옛날에는 간극이 너무 커서 따라잡기 어려웠는데 그때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가능할 것도 같았어요. 서른이 되기까지 아직 5∼6년 남았는데 그때까지만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서른도 늦지 않으니 그때 편안한 삶을 찾아 오케스트라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또다시 학생이 되기 위해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와 같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오케스트라의 객원 수석 자리를 버린 거죠.”

 

결국 송영훈은 편안한 전문 연주자의 길과 수많은 기회들을 포기하고 아르토 노라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핀란드 헬싱키의 시벨리우스 음악원으로 배움의 길을 떠났다. 핀란드는 낮이 짧고 밤이 길며 차갑고 황량한 전형적인 북구의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송영훈은 나라 전체가 마치 고요한 수도원 같은 핀란드의 연습실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자신의 영혼 속에 깊이 각인된 거장들의 소리를 재현하고 넘어서기 위한 고행과 같은 수련을 계속했다.

 

노라스 교수는 송영훈이 재능이나 테크닉은 이미 최고 수준으로 탁월하므로 듣는 사람들에게 영혼을 울리는 깊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첼로 소리와 음색을 찾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로빈스 선생님의 유언을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송영훈은 노라스 교수의 가르침에 따라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새벽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깨어 있는 시간 전부를 치열한 연습에 쏟아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이 다 될 무렵까지 홀로 음악원에 남아 치열하게 고뇌하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던 송영훈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자신의 첼로에서 맨체스터 첼로 페스티벌에서 들었던 거장들의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깜짝 놀란 그는 혹시 착각인가 싶어 다시 시도해봤는데 또다시 그가 그렇게도 간절하게 찾던 꿈의 첼로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송영훈은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정신 없이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첼로에서 오래 전 영국 첼로 페스티벌에서 거장들의 연주에서 들었던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이었어요. 너무 놀라 다시 한번 해봤는데 같은 소리가 났어요. 너무 좋고 흥분해서 혹시 그 소리를 내는 법을 잊어 버릴까봐 그날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워 그 소리를 연습했어요.”

 

드디어 그렇게도 간절하게 원하던 자신만의 완벽한 첼로 소리를 찾은 것이었다. 도저히 가까이 갈 수도 없다고 포기했던 로스트로포비치, 스타커, 요요마 같은 거장들의 경지의 문턱에 드디어 올라 선 것이다. 물론 완성도는 아직 전설적 대가들의 수준에 못 미쳤지만 소리 자체의 격은 같은 것이었다. 이제 끊임없는 연습과 정진을 거듭하면 돌아가신 아버지와 로빈스 교수가 그렇게 간절하게 원했던 거장들의 계보를 잇는 음악가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새로운 순례 - 폭을 통한 깊이

자신만의 첼로 소리를 찾은 송영훈은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연주 활동을 펼치며 무대를 전 세계와 다양한 장르들로 끊임없이 확대했다. 자신만의 첼로소리를 찾기는 했으나 음악의 길은 끝이 없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완벽한 소리를 향한 여정을 계속했다. 무엇보다 연주의 폭과 다양성이 예술적 깊이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한 송영훈은 적극적으로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자신의 소리를 찾은 그에게 이제 정통 클래식음악 레퍼토리에만 갇혀 있는 것은 창조적 파괴의 정반대인 현실 안주를 뜻했기 때문이다.

 

독주, 협주, 실내악 등 모든 클래식 음악 분야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송영훈의 폭 넓히기를 통한 완벽한 첼로 소리로의 순례는 심지어 장르의 경계도 넘어선다. 그는 첼로만의 깊은 소리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만 있다면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도 최선을 다해 연주하겠다고 한다. 다양한 크로스오버 연주회에도 음악적 수준만 최고를 지향한다면 기꺼이 나선다. 첼로 음악의 영역을 확장하고 첼로 소리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넓히면서 동시에 클래식음악의 대중화와 저변 넓히기에도 기여하고 있다. 세계적인 보컬 아티스트인 바비 맥퍼린이 목으로 내는 현악기 소리와 첼로의 2중주를 연주하기도 했고, 또 음악성이 높은 대중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인 김동률의 콘서트와 앨범 작업에도 합류해 히트곡아이처럼을 멋진 탱고선율로 연주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김동률 콘서트에 왔던 대중음악 팬들 중 많은 수가 송영훈의 첼로소리에 반해 그의 첼로 연주회에 왔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송영훈의 폭 넓히기를 통한 깊이 더하기의 가장 대표적 예가 탱고음악에 대한 심취다. 탱고는 원래 아르헨티나의 대중 춤곡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전설적인 작곡가 아스트로 피아졸라에 의해 클래식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신탱고로 한 단계 성장했다. 송영훈은 영국 왕립 노던 음악원에 재학 중일 때 우연히 탱고 연주를 듣고 사랑에 빠져 끊임없이 탱고 음악을 공부하고 가능성을 실험해왔다고 한다. 송영훈은 격정적이면서도 관능적이고,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첼로 고유의 음색을 최고조로 표현할 수 있는 음악 중 하나가 탱고라고 보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 탱고 연주와 알리기에 열정적으로 나서고 있다. 중남미와 일본의 세계적 탱고그룹들, 피아졸라와 함께 연주했던 파블로 징어 등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세계 무대에서 피아졸라의 곡들을 중심으로 개최한 송영훈의 탱고 콘서트와 앨범은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관능적이면서도 격정적이고, 서정적이면서도 비장한 탱고의 선율은 송영훈 특유의 첼로 소리와 너무나 잘 어울려서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완벽한 탱고 음악을 만들어냈다. 송영훈은 탱고에서 또 한 단계 폭을 넓혀 브라질, 멕시코, 쿠바,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의 중남미 음악 전반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이들 나라에도 초청돼 연주하며 첼로 소리의 가능성을 끝없이 확장하고 있다.

 

탱고를 비롯한 중남미 음악, 크로스오버와 대중음악에까지 이르는 송영훈의 폭 넓히기 작업은 핀란드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 밤늦게 홀로 연습에 몰입하면서 찾아낸 송영훈만의 독특한 소리를 더욱 더 깊고 풍부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영혼을 울리는 소리를 가지게 됐다. 송영훈에게 이런 폭 넓히기 작업의 또 다른 의의는세상으로 나가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음악으로 세상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돌려주라는 그의 아버지와 로빈스 교수의 유언을 실천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만 즐기는 정통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음악들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보고 그의 음악을 원하는 청중들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열정적으로 연주한다. 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음악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라디오 클래식음악 프로그램 DJ로 활동하기도 하고 예술의 전당에서 주최하는 클래식음악 대중화 콘서트 시리즈에 진행자로 나서기도 했다. 또 저소득층 문화나눔 프로젝트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문화소외지역에 가서 자선음악회를 열거나 음악에 소질은 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매주 1회씩 첼로 레슨을 해주고 있다. 물론 경희대 음대 교수로서 후진 양성에도 노력하고 있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음악에만 집중하지 않고 너무 일을 많이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첼로는 자신의 목소리이자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첼로를 폭넓게 알리고 가르치는 것 또한 그의 소명 중 하나라고 답한다. 송영훈은 처음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했을 때에 비해 그의 콘서트에 오는 팬 층이 훨씬 젊어졌다는 사실에 고무돼 있다. 문화선진국인 구미에서는 클래식 음악팬들이 급격히 노령화되는 데 비해 우리나라 팬들이 젊어지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고 큰 보람을 느낀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와 아시아가 세계 클래식음악계의 발전을 주도할 신호라는 것이다. 그의 팬클럽 모임에서 팬들이 송영훈의 음악을 듣는 이유가 마음의 평안을 주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으로 나가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음악을 하라는 아버지와 로빈스 선생님의 유언이 실천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구도에서 즐김으로- 그의 우상이 송영훈의 의견을 구하다!

송영훈은 독주, 오케스트라 협연, 탱고, 월드뮤직, 크로스오버 등 첼로 소리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저변을 넓힐 수 있는 음악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연주해 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뛰어난 음악적 동료들과의 실내악 앙상블이다. 대규모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주회와 달리 실내악은 가까운 음악적 동료와 친구들이 내밀한 음악적 대화를 나누는 가장 수준 높은 클래식음악 장르로서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 못지 않게 상대방의 소리를 듣고 거기에 자기 소리를 맞춰서 전체로서 최고의 하모니와 앙상블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또한 실내악 연주를 통해 다른 분야 최고 연주자들과 소리를 맞추다 보면 서로의 음악이 동반 상승하며 깊어지게 된다.

 

시벨리우스 음악원에서의 공부를 마친 후 송영훈이 시간과 노력을 가장 많이 투자한 분야도 바로 실내악 연주다. 송영훈은 바흐에서 현대음악의 거장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실내악 명곡들이 작곡됐으나 막상 우리나라 청중들이 즐길 기회가 있는 레퍼토리는 그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실내악 명곡들을 연주하며 끊임 없이 알리고 있다. 그중에서 송영훈이 특별히 의미 있게 생각하는 실내악 연주는 오래 전 베를린에서 그에게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의 깊은 감동을 맛보게 해줬던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주최하는 벳부 실내악 페스티벌이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송영훈의 첼로 소리를 특히 좋아해 벳부 페스티벌에서 같이 무대에 서기도 하고 또 리허설 때 서로의 연주를 듣고 평을 하기도 한다. 특히 리허설에서 아르헤리치가 어떤 곡을 연주해 보인 뒤 송영훈에게 자신의 연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평을 구하고 그의 의견을 다음 연주에 반영했을 때 그가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피아노의 전설적 거장이자 자신에게 처음으로 진정한 감동적 음악을 들려줬던 우상이 자신에게 음악적 의견을 구했다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송영훈의 음악 하는 태도는 여전히 치열하고 열정적이지만 이제 과거 맨체스터 노던 왕립 음악원이나 헬싱키 시벨리우스 음악원 시절처럼 투쟁하듯이 고행하는 방식은 아니다. 거장들의 소리에 견줄 만한 그만의 소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연주와 음악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경지에 이르렀다. 운동만 좋아하던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음악대학 교수였지만 음악을 절대 강요하지 않았고, 또 미국 유학을 시작했을 때 여전히 첼로에 대해 큰 흥미를 갖지 못하고 겉돌고 있던 송영훈에게 스승인 로빈스 교수가 가르쳐준 것도 첼로와 음악을 억지로 하지 않고 즐기라는 것이었다.

 

“그때 줄리어드 근처 농구장에 가서 운동하고 있으면 로빈스 선생님이 농구하는 곳으로 데리러 왔어요. 로빈스 선생님은 일단 제가 첼로를 싫어하지 않도록 하려고 배려하셨어요. 제가 운동을 너무나 좋아하는 걸 보시고 언젠가 제가 공을 놓고 첼로를 열정적으로 할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으셨나 봐요. 그래서 무섭게 레슨을 하시면서도 절대로 첼로가 질리지 않게 하셨어요.”

 

송영훈은 타고난 재능으로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수상을 하고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결코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 음악가가 되는 길 역시 절대 순탄하지 않았고 음악을 그만 두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지독한 좌절과 시련도 겪었다. 음악과 첼로에 대한 깊은 사랑, 예술가로서의 확고한 소명의식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어코 자신만의 소리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가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움직이는 예술의 경우 예술가 자신이 그 예술에 진정으로 감동받지 않고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청중을 감동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악과 첼로를 진정으로 좋아하도록 인도해준 아버지와 스승의 사랑이 송영훈이 거장들의 소리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첼로 소리를 찾는 자기 내면으로의 구도자적 순례의 길에 나서게 만든 것이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신동엽 교수는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스프링국제실내악축제 조직위원장을 지냈고 국립발레단 등 여러 문화예술단체들을 자문해왔다. 조직이론 분야 최고 학술지인 와 문화예술 분야 세계적 학술지인 등에 논문을 실었다. 최근에는 세계적 예술가들의 창조 프로세스를 심층 분석한 <창조성의 원천>을 출간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