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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강도 높은 훈련에도 실력이 늘지 않는 이유

임용한 | 139호 (2013년 10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655 3월 효종은 지금의 올림픽 사격장 옆에 있는 강릉(명종의 능)으로 행차했다. 돌아오는 길에 석현이라는 곳에서 효종은 금군(禁軍) 기병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고 갑자기 제안을 했다. 들판 가운데 작은 깃발을 하나 세우고 신호를 하면 기병이 경주를 해서 깃발을 먼저 뽑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군기도, 규율도 부족했던 효종의 금군(禁軍)

효종은 신호를 보내기 위해 호쾌하게 말을 달려 산위로 올라갔다. 효종의 기마술과 무예는 궁중의 일류 무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멋진 기마술을 뽐내며 산 위로 올라가 보니 신호도 하기 전에 별장들이 서로 부대를 출발시켜 기를 먼저 뽑으려고 난리였다. 경주에서 출발 신호도 하기 전에 제멋대로 달려 나간 셈이었다. 화가 난 효종은 당장 4명의 별장을 불러 매를 쳤다. 그리고 어전에서 기를 휘두르고 나팔을 분 뒤에 말을 출발시키라고 단단히 명령했다.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기만 휘두르고 아직 나팔을 불지 않았는데 박민도라는 장군의 부대가 또 성급하게 출발했다. 효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왕의 머릿속에는 청나라에 잡혀 가 인질 생활을 할 때 보았던 청나라 팔기군의 훈련과 전투 광경이 떠올랐을 것이다. 청나라 기병은 군기가 세고 약속된 작전과 신호에 따라 일사불란하고 질풍 같은 전술기동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능력은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즈칸의 몽골 기병보다 더 뛰어났으면 뛰어났지 못하지 않았다. 북벌을 꿈꾸며 청나라 팔기군과의 대결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효종에게 조선의 최정예군이라는 국왕의 경호부대가 출발신호 하나 지키지 못하는 광경을 보니 화가 나다 못해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효종은 다시 박민도를 불러다 매를 치고 이건 게임이 아니라 군령인데 군령을 어겼으니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정말 창피하게 세 번째 정열이 시작됐다. 이젠 보는 사람이나 하는 군사나 흥이 다 깨졌다. 그렇다고 시작한 일을 하지 않고 끝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또 정시영이라는 초군(哨軍) 한 명이 말을 달려 튀어 나왔다. 이젠 장군과 병사들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제지를 했을 텐데 정시영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달려 의기양양하게 기를 뽑았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본인은 왕이 용기가 있다고 칭찬을 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모습을 본 효종은 정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이 따위로 제멋대로인 군대를 가지고 무슨 전쟁을 하겠는가? 분노한 효종은 정시영을 처형하고 목을 군문에 걸어 본보기로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신하들이 사형은 지나치다고 말렸지만 효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북벌을 추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조선 정예군의 실력

이 조치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효종의 분노가 이해는 된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던 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은 인질이 돼 심양으로 잡혀갔다. 심양에서 10년 넘게 생활하면서 봉림대군은 청나라에게 설욕하고야 말겠다는 복수심을 불태운다. 복수를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고 적을 알아야 한다. 원래부터 무예와 군사에 관심이 많았던 봉림대군은 청나라 군대를 따라가 그들의 전투를 참관하고 전술을 익혔다.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봉림대군이 즉위해서 효종이 된다. 효종은 꿈에 그리던 북벌을 추진했다. 북벌론에 대해서는 당대에도 그렇고 오늘날까지도 의심이 많다. 정말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가 중원을 침공해서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중국 지배까지는 아니라도 청을 멸망시키는 일은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청나라는 사실 허약하다. 인구는 한족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조선이 청을 공격하면 한족이 봉기할 것이고, 그러면 청은 무너진다.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우리보다도 약한 종족이었다. 그들이 심기일전해서 단합하니 명나라를 무너뜨렸다. 우리라고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조선에 돌아와 보니 현실은 참담했다. 정예군이라고는 만 명도 되지 않고 말만 정예군이지 실력도 형편없었다. 활쏘기 시험을 봤더니 잘 해야 한 발 맞추는 자가 대부분이었다. 실력이 없다기보다는 의욕이 없었다. 속된 말로 잘리지 않고 월급이나 타면 된다는 식이었다.게다가 이런 표적 사격은 실전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군대는 조직력과 전술력이 생명이다. 그러나 그런 훈련은 제대로 하지도 않고 석현 사건에서 보듯이 군기와 군율에 대한 개념조차 부족했다.

 

그나마 이것은 직업군인인 서울의 오군영 군대의 수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예비군 훈련처럼 일반 농민도 농한기에 일정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은 그야말로 형식적이어서 군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군비 증강 및 군사 훈련에 매진한 효종

효종은 이런 현실에 분노했다. 중앙군을 증강하고 강하게 훈련을 시켰다. 심지어 궁궐 후원에까지 훈련장을 만들고 자신이 직접 무사들과 말을 달리며 훈련을 시켰다. 지방에서도 제대로 된 훈련을 하도록 다그쳤다.

 

그 효과가 있었다. 17세기 중반 청나라는 지금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벌였다. 무력 충돌로 발전하자 조선에도 파병을 요청했다. 효종은 소수의 정예부대를 파견했는데 그동안 갈고 닦은 조선군의 실력을 가늠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2번에 걸친 나선정벌은 효종에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줬다. 그 무섭던 청나라 군대는 어느 새 타락하고 나태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군 지휘관의 판단력, 전술능력이 오히려 뛰어났다. 참전한 조선군 포수들(포수는 포병이 아닌 총병임)은 여러 번 청군 포수들과 사격시합을 했는데 조선군의 사격실력이 더 뛰어났다. 실전에서도 조선군은 선봉부대로 활약했고 우수하고 침착한 전투능력으로 승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효종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이 잘 싸운 이유는 병사들이 원래 정예병이었고 병력도 겨우 수백 명에 불과한 중대 규모의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지휘관이 직접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석현의 깃발 시합처럼 연대 규모 이상의 군대가 능력을 발휘하려면 개인의 무용이 아니라 전술능력이 필수적이다. 조선군은 그 부분에서는 여전히 수준 이하였다. 지방군은 정예병과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수령과 지방군 장수들에게 엄하게 조련하게 했더니 진법이나 전술 수준은 그럭저럭 올라왔지만 직업무사가 아닌 농민들로 훈련을 시키니 군사들의 개별능력이 너무 떨어졌다. 아무리 전투에서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해도 병사들의 개인기량이 수준 이하라 전투에서 이기기 힘들었다. 효종은 애원하듯이 물었다. “훈련을 계속 시키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죄송합니다만 가망이 없을 듯합니다.

 

더 큰 애로가 있었다. 효종은 10만의 정예군만 육성하면 청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부실한 정예군도 2~3만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군대를 운영할 재력도 없고 군에 충당할 무사 자원도 없었다. 효종은 한창 북벌을 추진하다가 왕이 된 지 10년 만에 갑자기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아쉬워하고 혹은 암살이 아니냐고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효종이 좀 더 살았다면 북벌이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다. 당시 조선은 전쟁 가능한 10만 군대를 양성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고강도 훈련에도 조선군의 실력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정예병의 전술능력이 잘 개선되지 않았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북벌이라는 목적에 대한 공유와 신념이 부족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말하며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는 조선인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성공하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의 공유이지 목적의식의 공유가 아니었다.

 

목적의식은 내용이 분명해야 하고 기대효과도 선명해야 한다. 그래야 장병 개개인이 분명하게 사명을 인지하고 훈련과 전술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하지만 북벌은 좋은 것이지만 정말 가능하겠는가라는 의구심이 사회에 가득했다. 북벌을 하면 모욕과 수치를 해소한다는 감정적인 요인 외에 내가 우리 사회가 얻는 실질적인 이익은 무엇일까? 리더는 그런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구성원 각각이 구체적인 비전을 가질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조선의 위정자들은 북벌론을 얘기할 때 “만주족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감정만 공유했을 뿐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군사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오군영 병사들은 명목상 월급을 받는 직업군인이었지만 부대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이 부족했다. 월급은 짜서 간신히 기초 생활비나 될 정도였다. 병사 자신을 위시해서 가족들이 부업을 해야 했다. 군인이 부업에 정신이 팔리면 훈련도 소홀해 지지만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쉽게 상실한다. 군인의 자세, 생활태도와 민간의 생활방식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의식, 자부심이 부족해진다. 이 때문에 제식, 사격 등은 훈련을 통해 성과를 올릴 수 있었지만 전술력과 같이 자발성과 창의성, 공동체적인 단합을 요구하는 훈련에선 성과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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