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편집자주
모두가 ‘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1.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20세기 100년을 지배한 효율성을 대체하는 21세기적 시대정신으로 불리는 창조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차르트나 피카소와 같은 혁명적 예술가들이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 스티브 잡스와 같은 기발한 기업가들은 어디에서 창조적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었을까? 누구나 인류의 삶을 바꾼 창조적 인물들을 닮고 싶어 하나 이들의 업적은 도저히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아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부분 창조성은 소수의 타고난 천재들에게나 해당되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능력이라고 여기면서 포기하게 된다. 필자는 지난 몇 년간 동료들과 함께 창조적 인물들이 가장 많이 모인 집단인 예술가들 중에서도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예술가들과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기타 연구를 토대로 창조성이 형성되고 발휘되는 환경적 조건을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하는 책을 저술하고 있다. 경영학자인 필자가 뜬금없이 예술에 대한 연구와 저술에 매진하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만일 타고난 천부적 재능 이외에 창조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인이나 조건들을 체계적으로 찾아낼 수 있다면 보통 사람들도 창조적 업적을 창출해낼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필자가 DBR 지면을 통해 반복적으로 강조해왔듯이 창조성은 21세기 시대정신이다.
창조성이 거스를 수 없는 21세기 시대정신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더라도 21세기 창조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큰 산이 있다. 창조성을 21세기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성이 어디에서 오며, 어떻게 형성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고 심층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성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가장 손에 잡히지 않는 극도로 모호한 개념 중 하나다.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원리는 물론 개념 정의마저 학자마다 다 다르다. 창조성은 ‘새롭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기반이 되는 능력’이라는 지극히 일반론적인 개념 정의 이외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다. 예를 들면, 창조성이란 개인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조직이나 제도, 사회적 환경의 산물인가에 대한 합의도 없다. 또 창조성이 사고와 행동의 과정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 결과에 관한 것인지도 명확하게 정립돼 있지 않다. 창조적 산출물이 우연히 발견되는 것인가, 아니면 치밀한 의도와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가도 논쟁적이다. 창조성을 천재들의 영역으로 보는 입장도 있고 보통 사람도 창조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창조성이 타고난 유전적 자질인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교육되고 양성될 수 있는 것인가 등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창조성에 관한 과학적 연구가 최근에야 비로소 시작된 데 있다. 창조적 천재들의 이야기는 지난 5000년간의 역사시대 동안 예술과 문학, 철학, 역사 등에서 즐겨 다뤄온 주제 중 하나였으나 체계적인 학문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다. 즉 창조성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일대의 거장 심리학자인 로버트 스턴버그 교수와 동료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문사회과학 분야들 중 창조성이 가장 많이 연구된 심리학의 경우만 살펴봐도 1975년에서 1994년까지 20년 동안 창조성과 관련된 연구는 전체 심리학 연구의 1.5%에 불과했으며 심리학 교과서들에서도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스턴버그 교수는 창조성이 체계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웠던 이유로 신비주의적 접근을 지적한다. 즉 고대 사회에서부터 창조성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현상으로서 신에게서 받은 영감이 그 원천이라는 신비주의적 전제가 당연시돼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조성의 정확한 이해에 더 큰 방해물은 도구주의적 접근이다. 즉 21세기로의 전환기를 전후해 창조와 혁신이 기업경쟁력의 새로운 원천으로 강조되면서 경영컨설턴트나 저널리스트,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갑자기 창조성의 원천들을 피상적으로 나열하는 책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접근은 창조성을 기업의 이윤추구와 같은 성과창출의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도구주의적 한계를 가진다. 즉 창조성이라는 흥미진진한 현상 자체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나 확고한 학문적 근거도 없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수박 겉핥기식의 창조성 모형들이 유행처럼 남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접근은 20세기를 지배하던 효율성으로부터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조성으로 시대정신이 전환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중대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당장은 경쟁력 강화의 효과적 수단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다가 더 나아 보이는 수단이 등장하면 급속히 관심이 사라지는 유행으로서의 창조성은 본래 창조성이 가지는 역사성과 시대정신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킨다.
도구주의적 접근의 또 다른 한계는 창조성을 연장이나 공구와 같은 도구로 보기 때문에 사용자의 뜻에 따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관리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과정, 그리고 대상을 관리 가능한 영역에 한정해 개인이나 조직, 사회의 창조성을 섣불리 인위적으로 조작하며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우를 범한다. 그러나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과정은 워낙 다양하고 광범위해서 기계나 연장처럼 관리한다는 것은 ‘관리 불가능한 대상을 관리하려는 헛된 시도(Managing the Unmanageable)’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전 세계적 유행에 맹목적으로 동조해 창조성을 행정과 경영의 핵심 도구로 추구했다가 좌절 끝에 다시 20세기적 효율성 패러다임으로 회귀하는 사례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관리 불가능한 대상을 관리하겠다고 시도하는 도구주의적 접근의 한계 때문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새로운 100년을 주도할 시대정신으로 평가되는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원리를 깊이 있고 정확하며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는 현재까지 인류의 학문적 자산으로는 확실한 해답이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러 학문 분야들에서 창조성의 한두 가지 단편들을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한 걸음마 단계이다.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차선의 대안은 무엇일까?
2. 예술에서 창조성의 원리를 배우라
필자는 현재로서는 예술이 창조성의 원리에 대한 질문들에 대답해 줄 최고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효율성 사고가 지배했던 현대 산업사회에서 예외적이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인식됐던 창조성을 집중적으로 다뤄온 유일한 분야가 바로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은 의식주 수준의 1차적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필요한 제품들을 대량으로 싸게 만드는 것이 당면과제이던 20세기 산업사회의 효율성 만능주의 패러다임에서는 결코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었다. 20세기 100년 동안 예술은 경제나 정치 등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 분야들과는 멀리 떨어진 변방의 아웃사이더였다. 따라서 예술은 소수의 예외적인 기인들이나 천재들의 영역으로 치부됐고 결코 체계적으로 이해되거나 주류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창조성이 21세기의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부상하면서 예술이 사회 발전의 주류로 자리매김을 할 때가 온 것이다. 21세기 창조사회는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술가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예술의 시대’다.
창조성은 예술의 본질 그 자체다. 예술은 창조성이 없으면 개념을 정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전들은 예술을 ‘새로운 미적(美的)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즉 예술의 본질은 ‘미’와 ‘창조’ 두 가지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의미를 연구한 학자들은 예외 없이 창조성을 다른 분야들과 구분되는 예술의 핵심 특징으로 강조하고 있다. 워싱턴대의 예술사회학자 하워드 베커 교수는 예술세계(Art World)를 미적 창조성의 생산과 확산에 관여하는 다양한 집단들로 파악했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리처드 케이브스 교수는 문화예술 분야를 아예 ‘창조산업(Creative Industries)’으로 부르기도 했다. 토론토대의 경영학자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도 전통적으로 예술과 과학 분야에 집중돼 있던 창조적 계급(Creative Class)이 21세기에는 여러 다른 분야들로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이 21세기 국가발전 전략으로 제시한 14개의 ‘창조산업’ 대부분이 문화예술 분야이다. 21세기 초 가장 창조적 인물로 평가받는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주도한 애플의 모든 창조적 상품들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한 것이라고 정리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 예술가들의 창조적 행위에 대한 이해는 극도로 예외적인 소수 천재들만의 영역으로만 인식돼 ‘천부적 재능’과 같은 타고난 능력이나 신이 선물로 주는 듯 불현듯 찾아오는 ‘예술적 영감’에서 그 원천을 찾는 신비주의적 접근이 주를 이뤄왔다. 또한 예술과 예술가들을 주로 연구해왔던 예술학이나 미학 등의 인문학에서는 예술작품의 심미적 가치나 예술사조 측면에서 가지는 의미 등 예술 작품의 내용 그 자체는 깊이 있게 연구해왔으나 그런 예술작품들이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창조적 행위의 원천이나 과정, 조건, 환경 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는 예술이론이나 미학 등과 같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뛰어난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과 영감을 통해 풍부한 지식과 좋은 취향을 획득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나 예술 창조성이라는 흥미진진한 현상의 원천과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이에 반해 필자는 창조적 예술작품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이런 창조적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는 환경적 조건에 관심을 가진다. 즉 필자는 창조적 예술작품의 탄생에 천재적 예술가들의 창조적 재능과 영감이 중요한 원천이 된 것은 사실이나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 예술가들이 어떤 시기에,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어떻게 예술을 접하게 됐으며,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 일했으며, 어떤 기회들과 장애요인들을 가졌는지 등과 같은 사회적 요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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