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창조경영
편집자주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약 0.2%에 불과한 소수민족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모진 핍박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천재적인 두뇌와 시대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안목을 바탕으로 전 세계 각 분야에서 최고위층의 지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주류에서 주류로,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올라선 유대인들의 지혜를 통해 초경쟁 시대의 생존 전략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창조경제가 새 정부 정책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창조경제를 이끌 창조산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창조산업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정부의 정책적 관심과 지원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자들마다 생각이 다르고 정부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논리들이 등장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혼란스럽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보면 창조산업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안에 ‘남과 다른’ 창의성을 갖고 태어나듯 어떤 산업에서든지 기존에 없던 ‘남과 다른’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창조산업이고 ‘대박’을 터뜨리는 비즈니스다. 유대인들이 다양한 산업군에서 창의성을 발휘해 성공한 사례들을 살펴보자.
미(美)에 창의성을 불어넣다
우선 헤어디자인 산업. 1940년대 후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영국 런던의 뒷골목은 ‘해방의 힘찬 기운’보다는 오히려 ‘전후의 혼란’으로 어수선했다. 이 틈을 파시스트 잔당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파고들었는데 유대인들은 이들의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허구한 날 맞고만 살 수 없었든지 이 지역에서 살던 예비역 군인 등 43명의 유대인들이 ‘43그룹’이란 모임을 만들어 폭력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 43그룹의 가장 막내가 바로 나중에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가 된 비달 사순이다.
비달 사순은 1928년 런던 근교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살 때부터 미용실에서 일을 배웠다. 1954년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 본드가(街) 108번지에 자기의 미용 살롱을 오픈했다. 당시 여성들의 머리 스타일은 펌이나 올림머리가 전부였다. 비달 사순은 기하학적 모양의 짧은 쇼트 커트 형식인 ‘보브 컷’이라 불리는 단발머리를 선보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천편일률적인 스타일에서 탈피해 여성들이 자기 얼굴 형태에 맞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꾸밀 수 있게 해준 덕택이다. 이는 미니스커트 유행과 맞물리며 헤어디자인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할 정도로 대박을 친다. 당시 BBC 방송에서는 ‘여성 혁명’이라고까지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는 1965년 미국으로 이주해 자신의 이름을 딴 비달사순이라는 브랜드의 샴푸 등 각종 헤어용품으로 큰돈을 벌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은퇴한 뒤 자비를 털어 이스라엘 히브리대에 세운 비달사순센터는 헤어디자인이 아니라 반유대주의와 인종박해에 대해 연구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세계 최고의 미적 감각을 가진 화려한 모습의 내면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정말이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비달 사순의 예에서 보듯 창의성 발휘에는 업종의 구분이 없다. 창의성만 발휘할 수 있다면 대박을 터뜨리는 창의산업이 된다. 특히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에서는 창의성이 더욱 빛을 발하곤 한다.
여성적이고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대표 영역으로는 화장품이 꼽힌다. 미국에는 에스티로더를 비롯, 존슨앤존슨, 헬레나루빈스타인, 레브론, 맥스팩터 등 유대인들이 세운 회사들이 즐비하다.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은 단연 에스티 로더라 할 수 있다. 1908년 뉴욕 빈민가인 퀸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에스티 로더는 수려한 미모로 한때 영화배우를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삼촌이 운영하는 미용연구소에서 미용크림을 팔러 다녀야 했고, 그렇게 화장품과 인연을 맺었다. 어려서부터 피부미용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자신이 직접 화장품을 만들기도 했다. 이게 고객들로부터 값싸고 품질 좋다는 평가를 받자 1946년 우리 나이로 마흔에 과감하게 창업의 길로 나선다. 그녀는 업계 최초로 무료 샘플과 백화점 납품 등 고급 매장 전략을 통해 에스티로더를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로 성장시켰고 1998년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천재 경영인 2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달콤함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훔치다
시각적 감각이 필요한 미용, 뷰티 산업뿐만 아니라 섬세한 미각이 필요한 식품 업계에서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유대인 사업가들이 많다. 먼저 초콜릿부터 살펴보자. 초콜릿은 중세시절 이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는데 이를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밀턴 허시다. 1857년 독일에서 펜실베이니아로 이민 온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밀턴 허시는 집이 가난해 학력이라곤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닌 게 전부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와 사업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오늘날 초콜릿의 대명사가 된 허쉬초콜릿을 일궈냈다.
가난 때문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인쇄공장에 취직한 밀턴은 일에 재미를 느끼지 못해 사탕공장으로 옮겼다. 18세에 필라델피아에서 사탕가게를 연 그는 사업이 신통치 않자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캐러멜 공장을 차렸다. 이때 좋은 우유를 사용해야 좋은 캐러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낙농중심지인 데리처치에 초콜릿 회사를 차렸다. 우유와 초콜릿을 농축시키는 기술을 개발해 품질 좋은 초콜릿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1905년부터 허쉬초콜릿이 쏟아져 나왔다. 허쉬초콜릿이 유명해지자 주 정부는 마을 이름을 데리처치에서 아예 허시로 바꿔 주기도 했다.
그는 성공하면 그 결실을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는 전형적인 유대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기업을 통해 번 돈으로 대부분 허시공장 직원들인 마을 주민들이 전기를 무료로 쓸 수 있도록 했고, 학교는 물론 골프장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허시학교’에 남아 있다.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무료로 다니는 이 학교는 허쉬초콜릿의 주식을 상당수 가지고 있다. 이는 회사 경영이 좋으면 대부분 이익이 학교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미국인들에게 달콤하고 감각적인 아침 식사를 제공한 던킨도넛도 유대인의 작품이다. 1916년 보스턴 근교에서 태어난 월리엄 로젠버그는 대공황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10대 초반에 학교를 중퇴하고 식품배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안 해 본 일이 없는 그는 1950년 ‘브랜드’가 있는 도넛을 개발했다. 1954년 던킨도넛이란 이름을 내걸었을 때 이미 5개 점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후 점포를 늘리며 미국 최초의 프랜차이즈 영업기법을 개발해냈다. 그는 1960년 국제프랜차이즈연합을 직접 조직했다. 현재 미국의 소매 영업 중 프랜차이즈를 통한 판매가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은 ‘프랜차이즈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공헌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고객은 왕이다’ ‘충분한 서비스라는 말은 없다’는 고객중심경영을 강조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하겐다즈’란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 최초로 아이스크림을 대중화한 매터스 루빈도 유대인이다. 그는 신선한 우유를 사용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 낙농국가인 덴마크를 연상케 하는 브랜드를 만들어 하루아침에 아이스크림의 황제가 됐다. 버몬트주의 한 버려진 주유소에서 회사를 시작해 나중에 하겐다즈의 라이벌로까지 성장한 아이스크림업체인 벤&제리의 창업자 벤 코헨과 제리 그린필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아이스크림업계의 강자 베스킨&라빈스의 창업자인 버튼 베스킨과 어빙 라빈스 모두 유대인이라면 지나친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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