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십자군. 이 한마디처럼 열정과 로망, 분노와 비난을 일으키는 단어도 없을 듯하다. 어떤 이들은 십자군의 숭고한 종교적 열정과 기사들의 모험심을 찬양했고, 어떤 이들은 종교의 오만과 가혹함을 비난했다. 혹자는 십자군이 종교가 아니라 서구인의 탐욕에서 비롯한 것으로 현대 제국주의에 빗대 비난하기도 한다. 누구는 이 십자군 전쟁을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꽤 인기가 있지만 사실을 더 애매하게 만든다. 문명의 충돌, 문화적 충돌이라는 표현은 사실 굉장히 애매하면서 듣는 사람마다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게 하는 마법 같은 효능이 있는 용어다. 어떤 이들에게 문명의 충돌, 문화적 충돌이란 표현은 어쩔 수 없는 것, 운명적인 갈등과 같은 식으로 체념을 준다.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갑이 을에게 절대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을 강요하는, 즉 절대적인 반감과 분노를 던진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었던 십자군 원정
십자군의 본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원정도 여러 번 있었고 군대의 구성과 상황도 그때마다 다르다. 중세 유럽이 지닌 독특한 사회구조와 정서상태, 종교의 역할을 납득할 만큼 설명하려면 엄청난 분량의 글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단정적인 결론은 다 틀리다는 것이다. 종교적 열정. 중요하긴 했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종교적 열정에도 수십, 수백 가지 내용이 있다. 그렇다고 세속적 탐욕과 목적이 전부도 아니다. 한때 십자군의 참전 동기를 영지의 세습에서 탈락한 낙오자들, 탐욕에 물든 약탈자들로 설명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들 중에는 정말 전 재산을 기부하고 빚까지 져가며 십자군 복무를 요즘의 평화유지군 참여같이 생각하고 온 사람도 많았다. 다만 그런 기사라고 해도 적절한 약탈과 전리품 획득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 시대의 윤리가 그랬기 때문이다. 그건 중동의 아랍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군 원정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원정이었다. 당시 유럽은 가난했고 왕국들은 작았다. 원정과 정복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1만의 군대만 해도 유럽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기사 중심의 중세 유럽의 군대는 심하게 말하면 봉건 영주끼리 패싸움을 할 때나 유용한 군대였지 알렉산더나 카이사르의 군대같이 진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병종과 전술은 단순했고 통솔은커녕 훈련도 되지 않았다. 특히 전투력이 기사에게 편중돼 있는 게 문제였다. 유명한 소년 십자군 사건처럼 십자군 운동은 가끔 대중적인 선동과 군중심리를 유발했는데 빈농과 건달 집단은 식량과 비용만 축낼 뿐 전쟁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잘만 훈련시키면 훌륭한 군대가 될 수 있는 전략자원이지만 유럽의 군대와 전술체제 자체가 평민 군대를 육성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십자군 원정을 전쟁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형편없는 군대로 한 세기 동안 원정을 감행했고, 수도 많고 훨씬 잘 조직된 중동 군대와 싸우며, 심지어 몇 번은 성과 도시를 함락시켰고 국가도 멸망시켰던 것이 신기한 일이자 연구대상이다.
그중에서 가장 신기한 사건은 1200년 4차 십자군 원정에서 발생한다. 사자왕이라고도 불린 리처드 1세가 활약한 3차 십자군은 유럽의 굵직한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국왕이 주도했다. 덕분에 제일 통솔이 잘되고 위협적인 원정이 됐다. 그러나 원정의 실체를 안 후 그들은 손을 뗐다. 모험가였던 리처드 1세는 원정에 복귀할 마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반면에 3차 원정군이 이룩한 절반의 성공은 남아 있던 기사와 대중들의 로망에 불을 질렀다. 풀크(Fulk)라는 전도사가 등장해 대중들을 격분시킨다. 그의 설교 아래 수많은 농민과 기사들이 십자군에 자원했다. 서약을 한 사람이 2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에 고무돼 귀족과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로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귀족들, 리처드 1세나 초기 십자군 왕국의 지도부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로 구성된 집행부가 탄생했고 마침내 4차 십자군이 조직됐다.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한 4차 십자군 원정
머나 먼 중동 땅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도시국가였던 베네치아와 수송선과 경호함대에 대한 용선계약을 맺는다. 계약한 인원은 3만5000명이었다. 집행부는 20만 명이란 자원자의 진정성을 믿을 수가 없어서 3만5000명 정도가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작 베네치아에 모인 병력은 1만1000명에 불과했다. 서약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 적었고 통제가 되지 않아 일부 자원자들은 자기 멋대로 편한 항구를 통해 중동으로 건너간 탓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돈으로는 계약한 대금을 지불할 수가 없었다. 몇 명의 귀족과 기사가 전 재산을 털었지만 그래도 비용은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 비잔틴제국의 내전으로 망명해 있던 알렉시우스 왕자가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탈환해 주면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십자군 지휘부는 망설였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막상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십자군은 경악했다. 이 시대는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었고 기사들 대부분은 고향 주변 이외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전 유럽의 도시와 왕궁을 합친 것보다 더 화려한 건축과 교회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화려함보다 더 놀라운 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었다. 비잔틴제국 1000년을 사수한 이 거대한 삼중성벽은 함락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4차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에는 십자군의 3배가 넘는 수비대에 특별히 초빙해 온 용병대까지 가세해 있었다. 반면 십자군은 주력인 기사의 절반 정도가 이 공격에 반대해서 떠난 상태였다. 그러나 막상 십자군이 도착하자 비잔틴도 사정이 복잡해진다. 이 나라가 원래 정치적으로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복잡한 왕국이었다. 작은 구실만 있어도 황제의 입지는 흔들렸다. 알렉시우스 왕자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등장하자 주변을 믿을 수 없게 된 황제는 망명해 버린다. 십자군은 쉽게 성공했고 알렉시우스 왕자는 알렉시우스 4세로 즉위했다. 하지만 황제가 되자 그도 비용 지불을 유예했다. 본인은 어떻게든 지불을 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음모에 이력이 난 비잔틴 귀족들이 호응하지 않았다. 1204년까지 비잔틴에 머물면서 십자군은 십자군대로 짜증이 있는 대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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