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조선의 세종은 위대한 왕이었다. 총명하고 성실했으며 국가의 장래와 미래에 대해 그만큼 장기적인 안목과 국량(局量), 책임감을 지니고 살았던 지도자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러나 이 위대한 왕의 최후가 그리 편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의 최고책임자로서 평생토록 쌓아온 노력이 잘못된 판단이었을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임감 강한 지도자에게 그것은 충격과 마음의 고통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세종을 고민하게 만든 문제란 바로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문제, 즉 국방이었다.
1449년 8월 명나라 황제가 오이라트족에게 패해 포로가 되는 토목보의 변이 발생했다.(DBR 95호 ‘토목보의 變: 속병 든 明나라, 황제를 빼앗기다’ 참조) 이 사건은 약 한 달 반 뒤인 9월29일에 조정에 보고됐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즉시 의정부와 육조의 중심을 소집하고 양계(평안도 지방인 ‘서계’와 함경도 지방의 ‘동계’)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이라트가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어떤 왕이라도 그렇게 했을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여기서 머물지 않았다.
세종은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잘못을 바로 잡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던 것 같다.(세종은 토목보의 변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약 5개월 후인 음력 1450년 2월17일에 사망한다.) 왕은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지대의 영토확장에 큰 공을 세운 김종서를 불러 유훈과도 같은 부탁을 남겼다. 그 부탁은 국방체제를 전면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사력의 절반을 국경선에 배치
세종이 평생에 남긴 두드러진 업적 중 하나가 영토확장이다. 세종은 통치 후반부에 두 번의 여진정벌을 통해 4군6진을 개척하고 집요하게 공격해 오는 여진족을 격퇴하며 이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끔 이 노력을 가볍게 보고 조선의 문신들이 사대주의에 빠져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 선에서 멈췄다고 비판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기업가를 불러다 놓고 왜 당장 세계 시장을 석권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다. 여진족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분열돼 있기는 했지만 인구와 생산력에서도 조선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군대가 한번 진군했다고 해서 그 땅이 자기 나라의 영토가 되는 건 아니다. 장기적인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조선의 물력과 인력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을 확보하는 데도 국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몽상가들과 달리 이 사업이 요구하는 물량을 알았던 세종은 모험적인 결정을 한다. 조선 군사력의 절반을 압록·두만강 지역에 집중시킨 것이다. 이것은 대담하고 위험한 결단이었다. 국방력이 국경선에 집중 배치되기 때문에 여진족처럼 산발적으로 국경을 습격하는 군대는 효과적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거란, 몽골의 침입처럼 거대한 군대가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전면적으로 침공해 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다.
적이 내륙으로 진공해 오면 후방의 병력을 모아 방어선을 펴야 한다. 그러나 후방에는 제대로 된 군대와 무사가 없다. 형식적인 동원체제는 있지만 쓸 만한 무사와 지휘관은 모두 국경에 가 있다. 믿을 만한 군대는 단 하나,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뿐인데 그 병력은 겨우 2만∼3만 명이다.
허술하게 방치된 내륙 방비 체계
병력 동원도 문제지만 후방의 군대를 모아 적의 진격을 저지할 방어 기지도 없었다. 고을마다 읍성이 있고 산성이 있었다. 하지만 읍성은 대부분 담장 수준이었다. 성벽의 높이가 평균 3∼4m였다. 높은 담장이라고 해봤자 5m가 되는 게 없었다. 성이 요새로 기능을 하려면 최소한 옹성(성문 앞을 두르는 성으로 성문을 보호)과 치(성벽에서 돌출한 부분으로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 후면에서 공격하는 기능)는 있어야 하고 성 내부를 구획해서 이중으로 성을 쌓거나 벌집모양으로 구획된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 병력이 줄어들고 성의 일부가 함락돼도 끝까지 저항할 수 있고 적군은 성 안으로 들어올수록 점점 더 어려운 함정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내륙의 성들은 이중성은 고사하고 옹성과 치를 제대로 갖춘 성도 드물었다. 1451년 조선 정부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전라도의 중요한 군현 20개의 읍성 중에서 옹성과 치를 갖춘 성은 8개뿐이었다. 그나마 6개는 형식적이어서 4대문 중에서 한두 곳에만 옹성을 두르고 나머지는 없었다. 실전에서는 옹성이 있는 곳을 피해 공격하면 되므로 이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모든 성문에 제대로 옹성을 갖춘 곳은 강진에 있는 도의 최고사령관인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인 내상성과 무장성뿐이었다. 그나마 무장성은 성문이 두 개뿐이어서 100% 평가를 받았던 것이었다. 옹성 못지않게 방어력을 좌우하는 중요 시설인 해자는 겨우 6개 성에만 있었다. 경상도는 사정이 좀 나아서 17개 군현 중 11개 군현이 옹성을 완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자는 5군데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나마 이곳이 좀 나은 것은 왜구의 침입이 제일 심했던 탓이었다.
양계 다음으로 중요한 국방지역이라는 경상·전라도가 이 정도니 충청·강원·경기·황해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내륙 지역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조사도 안 했고 성의 보강이나 정비 대책은 아예 시행하지도 않았다. 충청도 감영 소재지이고 충청도 최고의 전략요충인 충주만 해도 성벽 높이 3.8m에 옹성, 해자가 전무했다. 나중에 유성룡은 이런 성들은 산적이나 막을 수 있을 뿐 정규군과는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산성은 좀 낫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원래 우리나라의 전략은 적이 오면 산성으로 도피해서 방어하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지만 산성은 공격하지 않고 통과하면 그만이다. 산성 방어로 일관하면 적이 오는 길을 무저항으로 열어주게 된다. 그러므로 산성 방어는 일종의 임시대책이다. 전쟁을 수행하려면 중간 중간 적의 예상 진격로에 병력을 모아 적을 저지할 만한 요새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관방(關防)이라고 한다.
오이라트 같은 북방민족이 침입해 수도로 진군한다고 할 때 관방이 될 만한 곳이 압록강변의 의주, 청천강변의 안주성, 대동강변의 평양성, 황해도의 절령(정방산성), 임진강 여울목 등이었다. 이 성들은 삼국, 고려시대부터 무수한 전쟁을 겪어온 역전의 요새다. 그러나 이런 요충들조차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없어진 곳도 있었다. 절령과 임진강 여울은 아예 아무 것도 없어서 당장 나무 울타리를 세워야 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