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ons from Classic - 바흐와 헨델 上

천재성 부족한 바흐, 집중력으로 돌파하다

100호 (2012년 3월 Issue 1)

 
 
 
바흐는 ‘가치 창출(Value Creation)’이라는 관점에서 철저하게 진정성(Authenticity)과 진지함 자체에 호소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작품이 충실하게 목적을 반영하게 하는 데 대부분의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음악가들이 스타일과 트렌드에 맞게 작품을 작곡하고 관행대로 연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는 것으로 가치를 입증해 나간 것에 비해 바흐는 자신의 음악은 오로지 ‘정격’ 음악, 즉 하나님의 의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최상의 선율이어야만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또 그는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완벽을 기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작품의 정격성에 집중하기 위해 안정적 입지 구축에 따른 ‘겸업’ 의무를 거부하고 잦은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 얼핏 보면 꽉 막힌 완벽주의 예술가 같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절대로 마다하지 않았던 감각 있는 장인이 바로 바흐였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와 ‘음악의 어머니’ 헨델, 두 사람의 만남은 항상 엇갈렸다. 첫 번째 조우 기회는 당대 북독일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인 북스테후데가 자신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주최한 오디션장에서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결선에 올랐지만 주최자가 내건 우승자에 대한 혜택이었던 ‘딸과의 결혼’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옵션이라 판단하게 되면서 중도에 오디션을 포기하고는 각자의 갈 길을 가게 됐다. 수년 후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시점에 런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화도, e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연락할 방법이 없어 두 번째 기회 역시 날리게 된다. 평생 한번도 만나지 못하던 두 사람은 결국 인생 말년이 돼서야 겨우 접점을 찾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친구였던 북독일 작곡가 마테존(Johann Matheson)이 서신으로 서로를 중개했다. 그러나 이때 두 사람은 하필 같은 돌팔이 의사에게 눈 수술을 받고 둘 다 눈이 먼 상태였다.
 
바흐와 헨델은 많은 점에서 비슷했고, 또 달랐다. 우선 다양한 지적 배경과 경력을 지닌 작곡가라는 점이 비슷했다. 바흐와 헨델은 각각 라틴어 전문학교와 할레대 법학부에서 공부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음악인들이 전반적으로 이전의 작곡가들과 달리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분위기에 따른 측면도 있다. 두 사람과 ‘호형호제’ 하면서 지냈던 게오르그 필립 텔레만도 아버지의 등쌀에 못 이긴 진학이긴 했지만 라이프치히대 법학부에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었고 많은 이탈리아의 음악인들은 교황청이 만든 신학대에서 종교학과 문헌학을 공부하거나 당대 최고의 시인들을 찾아 다니며 협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문학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상적 다양성(Diversity)은 이전까지 종교 중심이었던 음악에 인간의 마음과 미세한 행위 동기를 담는 역할을 했고 사람들이 가사뿐만 아니라 음과 선율을 통한 개성 표현에도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은 상이했다. 바흐가 지나치리만큼 진지했다면 헨델은 상당히 발랄하게 거침없이 자신의 코드를 과시하면서 살았다. 바흐는 각지에 흩어져 있었던 음악인들의 표현 방식과 개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재해석해 백과사전식으로 작품을 써 나갔다. 따라서 스스로의 완벽주의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었다. 반면 헨델은 작품 자체의 완결성 못지 않게 사업적 흥행에도 큰 관심을 갖곤 했다. 오페라, 콘서트, 궁정 음악회 등 모든 장르에서 활약했던 그는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경우에만 작업했다.
 
우리는 이 두 거장들이 살았던 바로크 시대 음악계가 ‘창조 산업(Creative Industry)’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경제 시스템과 많은 점에서 닮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매체를 통해 자신의 코드를 만들어 나가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방식에서 크게 3가지의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이 시절의 음악인들은 고객(Customer) 또는 사용자(User)를 만나는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직접 설계하고 개발하고 보급까지 했다.한마디로 모든 가치사슬(Value Chain)에 포괄적으로 개입하면서 창조적인 제품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공정 관리를 했던 셈이다. 지금 표현으로 말하자면 스마트폰의 부품을 생산하는 단계에서부터 서비스를 기획하고 UX(User Experience) 테스트를 통한 사용자의 관점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마케팅까지 감당한 것과 같다.
 
둘째, 이들은 자신만의 역량 모델(Competence Model)을 만들고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해 나갔다.요즘 사람들이 전문가의 평전이나 경영자의 자서전을 통해 한 인물의 역량모델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 시절 작곡가들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면서 주장했던 여러 사상들, 제자들이 남겼던 기록이나 레슨의 흔적 등을 통해 이들의 역량 모델을 도출할 수 있다.
 
셋째, 그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략을 구사했다.
지금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러한 것처럼 바로크 시대에는 항상 새로운 작품을 내놓아야 했다. 클래식(Classic)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대로 과거의 작품을 되짚고 그를 통해 역사적 가치를 반추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반이 돼서야 정착됐던 관행이다. 당시의 작곡가들은 항상 ‘hot’한 아이템을 내놓아야 했고 프로젝트의 계약주가 원하는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나름대로 자극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제품을 계속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결국 작곡가 나름대로 시장을 해석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지 못하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기 쉬운 시기였던 셈이다. 바흐와 헨델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내면서 독보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경쟁 구도에 가장 성공적으로 대처해 나갔기에 현대에 이르기까지 거장 반열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2회의 연재를 통해 각각 바흐와 헨델의 삶을 살펴 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바흐, ‘나는 모범생이다’
바흐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부모님을 여의고 형의 슬하에서 10대를 보냈다. 형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파헬벨의 제자였다. 그러나 바흐는 번듯한 레슨이나 교습 과정이 아닌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음악에 입문했다. 악보가 보관돼 있는 다락에서 거장이 표현한 오르간 찬송곡집과 독주곡집을 베끼는 필사(筆寫)를 통해 구조를 익혀 나갔다.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작품의 전체 구조를 가정하고 서사적인 스토리를 담아내는 데 영향을 줬다.
 
바흐는 일생 동안 ‘진지함’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이다. 자신의 작품이 충실하게 목적을 반영하게 하는 데 대부분의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음악 활동 초년기에 작곡가나 지휘자로서보다는 훌륭한 오르가니스트이자 교회음악 담당자로서 더 인정받았다. 자신의 성향을 반영하는 작품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작품을 충실하게 고증하고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연주를 통해 실력을 입증해 나간 것이다. 바흐는 오페라와 협주곡으로 유명한 도시였던 함부르크에서 오르간 독주회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함부르크는 많은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의 실력, 성향을 비교해볼 수 있는 일종의 ‘테스트 베드(test bed)’였다. 바흐는 이 계기를 통해 당대 음악계로부터 성실성과 진지함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는 ‘바벨론 강가’에서라는 찬송곡집을 연주했다. 장대한 파사칼리아(다양한 패러디와 음률의 반복을 통해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가진 화려한 색채와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 장르)를 통해 자신의 즉흥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한편 조를 옮겨 가는 과정을 젊은 사람답지 않게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의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100세에 접어든 원로 음악가이자 함부르크 페스티벌의 회장이었던 요한 아담 라인켄(Johann Adam Reincken)이 무대로 나와 그의 손을 붙잡고 꿇어 앉아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이토록 젊고 아름다운 작곡가의 진지함에 반했다’면서.” 1
 
‘가치 창출(Value Creation)’이라는 관점에서 바흐는 철저하게 진정성(Authenticity)과 진지함 자체에 호소했던 사람이다. 그는 성실한 연주자였던 동시에 치밀하게 상품(Product)을 만들어 내려고 했던 장인이었다. 18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스타일과 트렌드에 맞게 작품을 작곡하고 관행대로 연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프시코드(피아노의 전신, 페달을 통해 다양한 울림을 표현하는 피아노에 비해 훨씬 소리가 납작하고 잔향 효과가 짧다.) 소나타나 협주곡들은 하나의 양식과 플랫폼이 있었고 관습에 맞게 따라하기만 하면 됐다. 프랑스 스타일, 영국 스타일, 이탈리안 스타일 등으로 각지의 춤곡이나 성가곡, 유행가 등을 번안하는 스탠더드(Standard)가 있었던 것이다. 작곡가들은 그것을 자유롭게 따오거나 번안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교를 과시하는 것으로 ‘가치(Value)’를 입증해 나갔다. 즉 최신의, 재미있는 곡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작품 자체가 얼마나 고도의 기법을 토대로 집대성됐느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바흐는 달랐다. 우선 자신의 음악은 오로지 ‘정격’ 음악, 즉 하나님의 의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최상의 선율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쉽게 번안되고 모방할 수 있는 작품보다는 성악가, 연주자, 칸토르(합창장으로도 불리는 이 표현은 단순히 지휘자라기보다는 연주와 지도를 번갈아 가면서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개념에 가까웠다. 베토벤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 음악계에는 전업 지휘자가 없었다.)가 갖고 있는 각각의 개성과 표현 방식이 최상으로 조합(Combination)될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아 나갔다.
 
 
바흐의 ‘진정성’에 대한 집착은 수많은 작품, 즉 상품(Product)들이 수많은 상징(Symbol)과 코드(Code)로 조합돼 있는, 독특한 의미(Meaning)와 브랜드 성향을 지닌 매체로 퍼져 나가는 역할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제품 자체의 완벽성뿐만 아니라 게르하르트 리히터나 무라카미 다카시와 같은 현대 미술적인 가치까지 함께 갖고 있는 아웃풋(Output)을 선호했던 것이다. 수학을 좋아했던 바흐는 음표 하나하나에 정량적인 음가와 정성적인 의미를 함께 고려해 담았다. 예를 들어 3의 음가를 나타내는 음에 3위(Trinity)를 이루는 성부, 성자, 성령의 종교적 의미와 완전한 세계의 조화의 의미를 담는 식이다. 일상 대화에서 하나의 문장과 같은 성격을 갖는 ‘프레이즈(Phrase)’를 통해서는 여러 음들이 교차하고 그것들끼리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세계관을 담아 내려 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연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들리는 리듬이나 음률들이 오묘하고 무거운 소리와 재치 있고 발랄한 소리가 자주 교차되고 변화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토록 고도화된 음악적 표현이 가능하게 했던 바흐의 역량 모델은 어디에 있다고 봐야 할까? 바흐보다 후대를 살았던 모차르트는 10분 만에 피아노 소나타의 패시지를 기억해서 새로 편곡해 내고 교향곡 전체를 듣고 이를 암기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토스카니니처럼 어떤 악보든지 한번 읽고 나면 사진처럼 머릿속에 암기한다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가진 연주자도 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천재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집중력(Concentration)’을 무기 삼을 수밖에 없다. 바흐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장기는 노력과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완벽을 기하는 기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탓에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와 연습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한번은 테너 파트가 특정 고음을 지속적으로 연주해야 하는 칸타타(Cantata·교회 예배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됐던 ‘노래하다’는 의미의 합창곡. 독일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도 비슷한 장르가 작곡됐고 후대에는 예배뿐만 아니라 세속적 목적으로도 칸타타라는 표현을 썼다.)를 반복해서 연습시킨 적이 있었다. 성악가를 악기들과 똑같은 구성요소(Component)로 생각했던 그의 작품에 대해 한 테너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완벽주의 성격의 칸토르였던 바흐는 반복적인 학습을 재강조할 뿐이었다. 결국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 괴팍하고 성격 더러운 칸토르 때문에 모든 합창단이 고생하고 있다’며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다행히 나름대로 호신술을 익혔던 바흐였기에 이 상황을 교묘하게 피해갈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은 그가 ‘성격 좋고 착실한 사람’만은 아님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작품 완성도를 위해서는 잦은 이사도 불사
바흐는 자주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 잦은 이직을 통해 자신의 환경을 작품의 정격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음악사학자들은 바흐가 일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시기(Period)를 나눈다. 조그마한 남부 독일 도시에서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던 20대 초반 시절을 ‘아른슈타트 시기’, 쾨텐(Coethen)이라는 지역으로 옮겨 궁정에서 악장으로 일하면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지도했던 시절을 ‘쾨텐 시기’, 그리고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교회음악학교의 지도자로서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던 시절을 ‘라이프치히 시기(Leipzig Period)’로 부른다. 바흐는 자신이 집중할 수 없는 순간을 못 견뎌 했다. 어떻게 보면 당대의 음악가들이 볼 때 어리석다고 할 만큼의 편집증이다. 당시 독일은 여러 도시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예술가들은 그 국가를 통치하는 영주나 교회의 수요에 맞게 작품을 제작하고 연주하는 직인(職人)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자신의 계약주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기만 하면 계속해서 ‘돈벌이’가 들어오는 구도가 생겨났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받고 도제들을 양성하는 과정을 통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오페라가 유행했던 드레스덴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던 바흐의 친구 텔레만(Telemann)도 그 일대에서 오랫동안 터줏대감 역할을 하면서 하나의 스쿨(School)을 이뤘던 작곡가였다. 또 바흐가 일생 동안 존경했던 북스테후데(Buxtehude) 역시 뤼베크라는 항구도시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하면서 북독일과 덴마크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던 예술가였다. 바흐는 이들이 대신 지불해야 했던 대가에 주목했다. 음악가들이 다른 겸업을 해야만 하는 법 조항이 그것이다. 텔레만은 국가가 교회를 관장하고 음악의 작품 생산 구조를 통제하는 과정에 순응하기 위해 도시의 보직들을 맡으면서 활동을 했다. 또 북스테후데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역할뿐만 아니라 도시의 세무 관리로서 의회에 출석하면서 예산과 회계를 보고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한 지역에서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안정적으로 입지를 구축해 나가는 여건을 조성하는 조건으로 수많은 역할을 요구했던 셈이다.
 
바흐는 그렇게 ‘겸업’을 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도시의 원로나 계약주들이 기대하는 바가 컸던 탓도 있다. 특히 쾨텐의 영주는 궁정 예배당의 정규 행사를 위한 곡을 작곡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사나 세레모니를 위해 작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것을 요구했다. 물론 계약주가 재정을 부담하고 지속적으로 창조적인 역량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지만 나름대로 완성도를 기울인 산출물을 계속해서 생산하고 싶었던 바흐에게는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작품에 대한 입김도 ‘편집증 기제’에 의한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시 당국이나 목사들은 바흐가 만들어 낸 오르간 찬송 즉흥 연주나 성가곡들이 지나치게 기교적이라는 이유로 자주 고소와 고발을 걸었다. 목사들이 종교재판소에 이의를 제기하면 바흐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시 재판소에 맞고소를 하는 피곤한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결국 바흐는 그에게 가장 적합한 직장은 궁정도, 시에 소속된 법정 음악가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정격 음악을 위해, 완벽한 작품의 생산을 위해’ 교회를 중심으로 학생 합창단원을 가르칠 수 있었던 라이프치히시로 옮기게 된다. 마침 라이프치히시는 인근 뤼베크나 쾨니히스베르크에 비해 문화자산이 취약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바흐와 같은 열정과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완벽한 작품을 생산해 내려는 이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이 시기를 통해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과 같은 바로크 음악의 금자탑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상당수 양산될 수 있었다.
 
바흐가 이토록 자주 이사를 다니며 직장을 옮겼던 배경에는 작품의 완성도를 기울이기 위한 최적의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사연들이 또 있었다. 그가 거쳐 갔던 예전의 계약주들은 빠르게 변화해 가는 음악계의 트렌드를 포착하고, ‘말을 갈아타려는’ 성향을 종종 보였다. 음악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는 루터교 영주가 죽고 비교적 화려한 교회 음악과 작품에 무덤덤한 칼뱅파 영주나 영부인이 등장하게 되면서 ‘비싼 인건비를 받는 작곡가’ 취급을 당해야 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 산업은 오늘날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처럼 창조적인 역량을 지닌 예술가들의 실력을 비교할 수 있는 장이 여러 군데 마련돼 있었다. 함부르크처럼 상업이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변호사, 의사들의 후원을 받아 음악 페스티벌을 열고 초청연주회를 통해 다양한 협연자와 합창단의 실력을 비교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됐다. 이런 장을 통해 실력이나 단가를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계약주들의 입맛에 맞는 인재들을 궁정이나 교회를 통해 영입하곤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전의 작품보다는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할 수 있는 ‘신규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원했다. 단순히 유행을 좇아가기보다는 작품 자체가 갖고 있는 가치에 집중했던 바흐에게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쟁 전략은 자신만의 독보적인 작품 가치와 역량을 지속적으로 편지나 호소를 통해 알리되 기회 구조(Opportunity Structure)가 마련되는 타이밍을 그때그때 포착해서 적응(Adaptation)하는 방식이었다. 오랜 팬이었던 영주들이 곡 의뢰를 해오면 그의 성향에 맞는 가사와 선율로 칸타타(Cantata)를 만들어 주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감각 있는 장인, 바흐
바흐는 국민적인 열기와 사회적 분위기를 활용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익숙했다. 한번은 루터교의 본산이었던 작센의 영주가 후계 구도에 의해 폴란드 왕으로 전보돼 가자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과정에서 독실한 루터교도였던 영주 부인이 가톨릭으로 종교를 바꾸는 것을 거부하면서 소박을 맞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남편은 폴란드에서 ‘새 살림’을 차린 상황이 되고 부인은 엘베강 인근의 고성에서 스스로를 유폐하다시피 하다 죽게 되자 북독일의 모든 도시가 충격과 의리 없는 영주에 대한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바흐는 그 기회를 노려 영주 부인의 장례 예배를 위한 장송 칸타타를 작곡한다. ‘후비여 한줄기 빛을 비추소서, 이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사파이어 집에 들어간 당신을 영원히 기리리니…’ 2  이 곡은 상당한 히트를 쳤고 바흐의 몇 안 되는 장송 칸타타 중에 대표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가톨릭과 루터교가 서로를 이단으로 비난하던 시기에 바흐는 국민적인 열기라는 기회 구조를 교묘하게 포착한 것이다. 얼핏 보면 꽉 막힌 완벽주의 예술가 같지만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절대로 마다하지 않았던 감각 있는 장인이 바로 바흐였다.
 
김혜옥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천영준 연세대학교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김혜옥 교수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선임연구원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1호 Diversity in Talent Management 2022년 08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