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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5

울지도 분노하지도 말자, 역사는 울보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김상근 | 98호 (2012년 2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대중이란 누구인가?

마키아벨리가악의 교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은 강자를 위한 권력의 지침서처럼 보이고 어떻게 하면 약자를 겁주고 억압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의 하수인처럼 행동하면서 약자를 억누르는 정교한 방식을 고안해낸 인물로 이해됐다. 누구든지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는 순간 마키아벨리는 타도해야 할 공공의 적()으로 간주된다. 미국 경제의 심장부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던 시위대의 슬로건 중에우리는 99%(We are 99%)’란 것이 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산출하는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상위 1%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표출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상위 1%를 위해 일하는 참모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머지 99%로부터악의 교사란 오해를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본인이 99%의 범주에 속하는 대중(大衆)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의 보편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대중의 모습은얼빠진 짐승이었고우리에 갇혀 있는 노예에 불과했다. 그는 대중을 노예근성에 물들어 있는 한심한 존재로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습성은 얼이 빠진 짐승처럼 사나운 본성을 지니고 숲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리 속에 갇혀 노예처럼 사육되고 있다가 뜻밖에 자유로워져서 들판에 방목되면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보금자리인 동굴이 어디 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누군가가 다시 잡으려고 오면 즉시 그 먹잇감이 돼버리는 것과 같다. 타인의 명령하에 사는 데 익숙해진 대중이 바로 그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1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대중이란 늘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고 힘을 가진 포식자(捕食者)에게 잡아먹히는 나약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15세기 말 피렌체의 대중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피렌체 경제를 유럽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켰을 때 앞다퉈 메디치 가문을 찬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프랑스의 침략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헌신짝처럼 메디치 가문을 버렸다. 그들은 메디치 저택을 습격해 재산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수도사 사보나롤라가하느님의 심판을 운운하며 등장하자 이번에는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주술에 빠져들게 된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가 태동했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가 갑자기 중세 시대의 암흑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나 종교적 열광주의도 잠시뿐 피렌체 대중들은 4년 만에 사보나롤라를 불태워 죽여 버렸다. 젊은 마키아벨리는 이런 피렌체 대중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왜 대중은 사보나롤라를 불태워 죽였을까? 과연 대중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들인가? 이들에게 역사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폴 자민(Paul Jamin)이 1893년에 그린 <브레누스와 그의 전리품>. 로마를 점령한 브레누스가 로마 여인을 포함한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다. 로마시민들은 베이로 도주했다.

‘대중’의 한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고찰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역사로 돌아갔다. 로마사에 나타난 대중의 실체를 분석한 것이다. 기원전 387, 갈리아인(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살던 야만족)들이 로마를 침공하자 공포에 질린 로마시민들은 도심에서 북쪽으로 16㎞ 정도 떨어진 베이(Veii)라는 작은 도시로 도피했다. 베이는 산 중턱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야만족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격이었다. 베이로 집단 이주한 일반 시민들은 로마의 귀족계급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갈등을 겪게 된다. 야만족의 군대가 침공했을 때 원로원은 시민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 로마를 사수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일반 시민들은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로마를 버리고 말았다. 텅 비어 있던 로마로 입성한 갈리아의 지도자 브레누스(Brennus)는 일곱 달 동안 마음껏 약탈을 일삼다가 약 1000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을 보상금으로 챙기고 로마를 떠났다.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역사에 치욕스러운 오점을 남긴 순간이었다.

 

한편 베이로 집단 이주했던 일반 시민들은 야만족이 철수한 로마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적에게 노출돼 있는 로마보다 산악 도시인 베이가 더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원로원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하루 속히 로마를 재건하려던 원로원은 베이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법률을 공표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모두 로마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베이의 시민들은 원로원의 결정을 비난하며 새로 제정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정해진 기간이 다가오고 로마로 귀환하지 않은 시민에 대한 강력한 처벌 계획이 발표되자 그들은 하나둘 로마로 돌아갔다. 처벌이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른 시민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면 자기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마키아벨리는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포악한 자라도 혼자 남게 되면 무서운 나머지 법률을 따르게 된다는 리비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일반 대중이란 존재는 이렇게 늘 줏대가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며 겁을 주면 따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혹평을 퍼부었다.2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중은 종종 지배자의 결점을 비난하는 데 대담하고 노골적인 언사를 사용하지만 이윽고 형벌이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순식간에 동료들끼리 서로 신용할 수 없게 돼 서둘러 그 지시에 따르게 된다.”3

 

기원전 4세기의 로마시민들이나 15세기 말 피렌체의 대중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마키아벨리는 알아차렸다. 모름지기 대중은 권력을 가진 강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며 이런 나약한 대중은 강경한 규제로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채찍과 당근으로 대중을 통제하라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나약한 본성을 까발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을 통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더 지독한 악명을 얻게 된다. 이것 때문에 <군주론>이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지침서란 고약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논리를 펴기 위해 다시 고대의 역사로 돌아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

 

“아가토클레스를 비롯해 그 밖의 사람들이 배신과 잔혹한 일을 일삼아 왔음에도 각기 제 나라에서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낼 수 있고, 외적을 막아 내고, 시민들의 반란도 전혀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4

 

아가토클레스 기념 동전. 집권하기 전까지 악당이었던 그는 대중을 잘 통제해 탁월한 지도자로 변신에 성공했다.

마키아벨리는 대중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의 인물인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독재자 아가토클레스(Agathocles, 기원전 361∼289)를 사례로 든다. 아가토클레스는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 시라쿠사에서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그는 약 1만 명의 시민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악당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시칠리아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시칠리아가 그리스의 간접지배에서 벗어나고 아프리카 북단의 카르타고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토클레스의 지도력 때문이었다. 15년 동안 시칠리아의 왕으로 군림(기원전 304∼289)하며 국가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후 공화정 제도를 부활시키고 임종을 맞이함으로써나라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원래 악당이며 독재자였던 아가토클레스가 어떻게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는가? 아카토클레스가 탁월한 군주로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가 시칠리아의대중을 잘 다뤘기 때문에 성공적인 군주로 변신했다고 분석했다. 아가토클레스의 통치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잔혹과 은혜를 적절히 베푼다는 것이다. 이른바채찍과 당근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아가토클레스는 먼저 대중들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군주의 통제력을 확립한 후 지속적인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책을 펼쳤다.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잔혹함이 훌륭히 사용됐다는 것은 자기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상 한번은 잔혹함을 행사하지만 그 뒤 더 이상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가능한 부하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전환한 경우를 말한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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