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노키아가 추락하고 있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장악하던 1등 기업 노키아의 신용등급이 최근 투기등급 바로 위인 ‘BBB-’까지 떨어졌다. 신용등급이 더 떨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부정적’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주가는 급락했고, 선두자리도 업계 2위인 삼성에 밀려 위태롭다. 지난해 최고경영자(CEO)까지 교체됐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인수합병설도 나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적수가 없을 것처럼 승승장구하던 그 회사가 맞나 싶다.
사실 노키아는 특허만 1만1000개를 보유하고, 연간 1000개씩 특허를 등록하는 기술 기업이다. 연구개발(R&D)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신기술 개발 능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애플보다 몇 년 앞서 터치스크린 방식의 스마트폰 개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재빨리 상품화하지 않아 스마트폰이 주도하는 기술 변화의 흐름을 놓쳤다. 독자적인 운영체제(OS) 심비안을 고집하다가 시장 흐름에도 뒤처졌다. 거대한 선박을 집어삼키는 시장 변화의 ‘퍼펙트 스톰’ 앞에서는 항공모함과 같던 1등 기업도 무기력했다. 문제는 이런 퍼펙트 스톰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일어난다는 점이다.
미국 모토로라는 1990년대 아날로그 휴대전화 전성시대를 이끈 최강자였다. 1990년대 초 미국 시장의 60%를 차지했던 난공불락의 기업이었다. 하지만 디지털 휴대전화 기술을 앞세운 노키아 등 후발주자에 밀려 1998년 초 점유율이 34%로 떨어졌다. 급기야 12만 명을 해고해야 했다. 모토로라는 디지털 휴대전화 기술을 경쟁사보다 먼저 개발하고도 시장을 내주고 말았다. 당시 모토로라 경영진은 디지털 기술을 외면하고 자신들이 잘해왔던 아날로그 제품을 더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매달렸다. 세상은 청동기, 철기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 석기를 날카롭게 다듬는 일에 매달렸던 것이다.
미국 다트머스대 경영대학원 시드니 핑켈스타인 교수 연구팀이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사업 실패를 겪은 대부분의 기업은 자기 분야에서 ‘넘버 원’ 기업들이었고, 1등이라는 자부심이 큰 회사였다. 1등 기업에 등극하는 순간 실패의 조건을 갖췄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이들 기업의 경영자들이 무능하거나 머리가 나빠 실패한 것은 아니다. 학식이 높으며 경험이 풍부한 뛰어난 CEO와 노련한 정예 임직원들이 포진해 있었다. 오히려 이게 문제였다.
성공한 경영자들은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경쟁자와 시장 변화를 무시한다. 이런 태도는 조직 전반으로 퍼진다. 자만심은 새로운 학습을 방해하는 ‘부정적 전이’로 이어진다. 결국 ‘나홀로 웨이’를 고집하다가 시장에서 고립된다. 외부의 비판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소비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안다”고 반박한다. 급기야 “우리가 만들면 고객들이 따라온다”는 식의 자아도취에 빠진다. 그러다가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세상을 배회하는 ‘좀비기업’이 된다. “세계 최고”, “업계 최고”만 외치다가 조직 전체가 벼랑 끝을 향해 좀비처럼 몰려가게 된다는 게 핑켈스타인 교수의 지적이다.
몰라서 실패하는 일은 많지 않다. 많은 기업들이 변화의 흐름을 알고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무너진다. 전문가들이 지식을 쌓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에 빠지듯이 1등 기업은 선두에 등극하는 순간 자신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잊고 성공한 현재의 모습만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1등 기업의 저주다.
일본 반도체벤처협회장이자 자인일렉트로닉 사장인 이즈카 데쓰야 씨는 “삼성전자와 7년간 합작회사를 유지하며 삼성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엄격함을 배웠다”고 털어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엄격한 경영 자세였다. 의사결정은 대부분 상명하복식으로 실행됐기 때문에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가 빨랐다. (중략) 최고경영자는 물론 삼성 직원들 모두가 맹렬하게 일했다. 일본의 기술을 흡수하려는 욕심 또한 대단했다. 무엇이든 자세히 질문하며 대단한 열정을 보였는데, 가만 내버려두면 욕실이나 침실까지 따라올 것이라는 농담도 종종했다.” (이즈카 데쓰야 <시간을 팔지 마라>)
스마트폰 혁명에서 삼성과 노키아의 운명이 갈린 것도 성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조직의 화석화(化石化)를 막고 1등 기업의 저주를 비켜가는 비결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박 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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