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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낯섦에서 생각이 시작된다

강신주 | 59호 (2010년 6월 Issue 2)

동양의 공자(BC 551∼479)나 서양의 플라톤(BC 428/427∼348/347)은 모두 인간이 가진 사유 능력을 강조했다. 다른 동물과 비교했을 때 인간만 사유, 즉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생각으로 점철되어 영위된다. 하루 일상을 되돌아보자.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스파게티를 먹을까? 아니면 추어탕을 먹을까?’ ‘거래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오늘 피곤한데 그가 술을 좋아하면 어떡하지?’ ‘이번 선거에서는 누구를 찍을까?’ ‘집사람 생일 선물로 무엇을 사주는 게 좋을까?’ ‘이번 휴가는 어디서 보낼까?’ 등.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인간은 분명 생각하는 존재기는 하지만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을 떠나려고 할 때를 떠올려보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사람이 있을까?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퇴근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책상 위를 정리하고 옷을 바로잡자. 그리고 일어나서 20m 전방에 있는 문까지 걸어가는 거다.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야 한다. 왼쪽으로 돌리면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퇴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무실의 시계를 보고 별다른 생각 없이 업무를 정리하고, 옷을 걸치고,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사무실을 나선다.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 사실 우리는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다. 가령 퇴근 시간이 되었는데도 아무도 자리를 뜨려고 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만 모르는 일이 회사에 있는 건가?’ 혹은 옷을 입으려는데 옷이 보이지 않을 때도 생각한다. ‘뭐야! 누가 내 옷을 갖고 간 건가, 아니면 점심 때 식당에 두고 온 걸까?’ 여기서 우리는 얼핏 생각이란 것의 비밀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해 ‘생각은 언제 발생하나’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event)과 조우할 때에만 발생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라는 현대 철학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존재와 시간>이란 유명한 책을 쓴 이 독일 철학자는 인간이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은 과연 언제 사유하게 되는지를 숙고했다.
우리는 가까이 ‘손 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쨌거나 손 안에 있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하이데거는 심오한 철학자라고 불리며, 철학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것은 사실 그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심오한 무엇인가를 통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가 가진 미묘한 뉘앙스를 갖고 사유했다. 독일어 특유의 미묘한 뉘앙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그의 사유는 생경하고 심오한 느낌을 갖게 했다. 방금 읽은 구절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휘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배려함(besorgen)’이라는 말이다. ‘배려함’이란 용어는 그다지 어려운 용어는 아니다. ‘눈에 띔(auffallen)’이라는 말과 대조해서 생각해본다면 ‘배려함’이란 말의 의미는 명확해진다. ‘배려함’과 ‘눈에 띔’이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논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자. 문이나 손잡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자연스럽게 문을 열게 되는 일상적인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배려함’의 사례이다. 반면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아 문과 문을 열려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게 되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눈에 띔’의 사례이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배려함’은 ‘특별하게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띔’은 ‘어떤 것과의 친숙했던 관계가 좌절되어 어떤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배려함’을 ‘손 안에 있음(zuhandenheit)’으로 표현한 반면 ‘눈에 띔’은 ‘손 안에 있지 않음(unzuhandeness)’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그 문이 나와 너무 친숙해서 그 문을 열려고 할 때 어떤 생각도 필요하지 않은 경우를 의미한다. 반면 ‘손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은 친숙하게 열리던 문이 열리지 않아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오직 ‘손 안에 있지 않은’ 예외적인 경우, 즉 특이한 사건이 발생할 때에만 우리의 생각,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에 띔’의 작용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 어제까지 열렸던 문이 왜 지금은 열리지 않는 거지?’ 이제 우리에게 친숙함이 사라지고 낯섦이 찾아왔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낯섦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통해서 이제 우리는 자신이 항상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분명 우리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그것은 항상 예상치 못한 사건과의 조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통찰은 사물과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결혼한 지 20년이나 된 너무나 친숙한 부부가 있다고 하자. 아마 하이데거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배려함’이나 ‘손 안에 있음’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부부는 너무나 친숙해서 상대방에 대해 전혀 생각이 발생하지 않는 습관적인 관계에 빠져 있다. 서로의 안색만 봐도 두 사람은 상대방의 욕구, 불만족 등을 생각하지 않고도 알아챈다. 남편이 아침 밥상에서 반찬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면 아내는 금방 오늘 야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역으로 아내가 저녁상에 와인을 올려놓고 새로운 음식을 준비하면 남편은 아내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의 긴장감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방에 대한 ‘생각’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출현하기 어렵다. 아내는 남편에 대해, 혹은 남편은 아내에 대해 부단히 자신을 새롭게 가꾸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낯섦, 혹은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자신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나 긴장감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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