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거울을 쳐다보는 횟수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젊은 시절 자주 보던 거울을 왜 점차 멀리하는 것일까? 거울 속에는 영원할 것 같았던 젊음이 사라지고, 세월의 흔적과도 같은 주름이 새겨진 푸석푸석한 얼굴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 뿌리 깊은 집착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모든 집착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져버렸거나 부재할 때 발생하기 마련이다. 땀 흘려 일당으로 받은 10만 원이 호주머니에서 어느 사이엔가 사라질 때, 없어진 10만 원에 대한 집착은 슬그머니 우리를 찾아온다. 이미 10만 원은 없어졌다고 포기하려 하면 할수록 집착은 커져만 간다.
불교는 이런 우리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공(空)의 지혜를 알려준다. 공이란 순야타(Śūnyatā)라는 산스크리트어를 한자어로 옮긴 말이다. 불교에서는 공을 깨닫는 순간, 모든 집착을 버리고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고 한다. 이런 경지를 진여(眞如·tathatā)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진여의 상태에서는 어떤 집착도 없이 평화로운 마음으로 외부 사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이란 무엇일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도의 불교철학자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250?)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로부터 인류 최고의 이론가라는 극찬을 받았을 정도로 영민했던 철학자로 공(空)을 철학적으로 가장 정교하게 체계화했던 인물이다. 나가르주나는 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모든 존재를 자성(自性·svabhāva)을 가진 실체로 본다면 그대는 그 존재가 인연이 없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 어떤 존재도 인연(因緣·pratiya-samutpanna)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이 없다. - 중론(中論·Madhyamaka-śāstra)
자성이란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나타내는 불교의 전문용어이다. 나가르주나는 지금 두 가지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불변하는 동일성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인연의 마주침으로 생긴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후자의 시선은 공을 깨달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가령 눈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눈사람은 불변하는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눈사람이 생기기 위한 인연들을 생각해보자. 차가운 온도와 적절한 습기 등의 인연이 마주쳐야 눈이 내리는 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린 눈이 충분히 습기를 머금고 있어야 뭉쳐질 수 있다. 수북하게 쌓인 눈이 눈사람을 만들려는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면 눈사람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겨울 아침에 서 있는 눈사람 하나마저도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생겨난다.
만약 눈사람이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인연이 다하면 눈사람은 허망하게 녹아버린다. 날씨가 푹해지거나 바람이 불어 습도가 낮아지면 눈사람은 서서히 녹아서 물로 변한다. 눈사람은 어디로 간 것일까? 천국으로 간 것일까? 눈사람이 사라져서 물이 흥건해진 마당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눈사람이 이제 천국으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말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인연의 마주침과 인연의 흩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물론 나가르주나는 인연의 마주침과 흩어짐, 그리고 인연의 마주침으로 생긴 것들은 모두 공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허무주의를 읽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눈사람이 공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연이 계속되는 한 지속되기 때문이다.
눈사람만이 그런 것일까?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로 공한 것 아닌가? 어느 남녀의 열정, 분위기 있던 밤, 아름다운 음악, 따뜻한 침대, 달콤했던 와인 등등. 이런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어느 날 우리도 잉태됐으니 말이다. 아마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됐더라면 우리는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는 것도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이 지속되는 것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들려준다.
내(我·atman)가 없는데 어찌 나의 것(我所· atmani)이 있을 것인가. 나와 나의 소유가 없으므로 그는 나라는 의식도 없고 소유하려는 의식도 없는 자가 된다. … 안으로나 밖으로나 나라는 생각이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집착은 없어질 것이다. -중론
나가르주나가 말한 ‘나’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나’는 아니다. 여기서 ‘나’는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불변하는 자아를 말한다. 겉으로는 내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영혼과 같다고 이해되는 것이 바로 아트만이다. 결국 ‘내가 없다’는 표현은 ‘내가 공하다’는, 다시 말해 ‘나는 수많은 인연들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이런 나에게 나의 것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모두 인연이 있어서 내게 잠시 머무는 것일 뿐이다. 철저하게 나 자신이나 내가 가진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부질없는 집착의 노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나가르주나의 핵심적인 전언이다.
이제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자. 주름진 얼굴마저도 무수한 인연의 마주침으로 만들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늙은 어부의 주름에는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새겨있고, 나이든 농부의 주름에는 땅과 싸우면서 생긴 인연이 아로새겨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주름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고유한 향내를 풍기는 아름다운 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가. 인연이 다해서 사라진 젊음에 집착하느라, 우리는 인연의 새로운 마주침으로 생긴 근사한 주름을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만의 주름을 펼쳐보면서 자신이 마주쳤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는 삶, 그것은 젊고 탱탱한 얼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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