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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경영의 변화 양상과 시사점

‘늙은 일본’경영에서 ‘젊은 한국’이 얻을 것

5throck | 52호 (2010년 3월 Issue 1)
끝없이 이어지는 불황, 일본식 경영의 상징인 도요타의 위기, 국적 항공사 일본항공(JAL)의 침몰….
 
합리주의와 성과주의에 기초한 서구식 경영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았던 일본식 경영 방식이 최근 일련의 사태를 거치며 도마 위에 올랐다. 논란의 핵심은 일본식 경영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 기업 경쟁력 확보에 걸림돌이 되는지 여부다.
 
비판론자들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일본식 경영이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2004년 이후 이어진 잠깐의 호황도 규제 완화 등 일본 정부 차원의 대책이 효과를 본 것이지,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반면 고유의 동양적 정서와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본 기업들이 미국식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본식 경영의 문제점과 바람직한 적응·변화 방안을 모색해본다.
 

 
일본식 경영의 내재적 문제점
경영 전문가들은 1980년대 놀라운 성과를 보여준 일본식 경영 모델의 특징이자 경쟁력으로 중간 관리자층의 ‘조밀한 네트워크(the dense network of middle managers)’와 ‘측면 경로를 통한 의사소통 방식(the channels of lateral communication)’을 꼽는다. 일본 기업의 중간 관리자들은 최고경영자(CEO)가 제시한 비전을 실행하며 새로운 전략적 이니셔티브를 주도하는 조직 내 허리 역할을 맡는다. 이 과정에서 중간 관리자들은 동료와 상사, 부하 직원들 사이에 촘촘하게 형성된 개인적 인맥과 비공식적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십분 활용해 이해관계의 충돌을 사전에 조정, 원만한 합의를 이뤄나간다. 소위 ‘미들업다운(middle-up-down)’ 방식으로 요약되는 일본 기업의 이 같은 특성은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에 기초한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 및 공동체 의식과 맞물리며 조직의 에너지를 한군데 집결,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중간 관리자의 교량 역할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일본식 경영 모델은 기업 규모가 커지고 업무 성격이 복잡해지면서 점차 실효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 히토쓰바시대의 카루베 마사루, 누마가미 쯔요시, 카토 토시히코 교수가 18개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일본 기업의 중간 관리자들은 내부 의견 조율(internal coordination)을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것으로 나타났다.1  중간 관리자들이 내부 이해관계 조정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조직적 부담(organizational deadweight)이 커진다는 게 연구자들의 지적이다. 고객의 욕구가 무엇이고 경쟁사들의 동향이 어떠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쏟아져야 할 에너지가 조직 내부의 합의 도출을 위한 조정 작업에 과도하게 집중되면 기업 본연의 목표 달성과 장기 비전 실현이 어려워진다.
 
엄격한 위계질서 위에 형성된 일본 기업의 계층별 조직 구조 역시 과거 대량 생산 체제하에서는 최적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지식·창조 경영 시대에는 문제가 많다.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추진해야 하는 21세기 초경쟁 환경하에서는 유연한 조직과 활기 있는 기업 풍토가 필요하다. 조직원 간 신속하고 활발한 정보 교류도 이뤄져야 한다. 과거처럼 중간 관리자층의 의견 조율 기능에만 의존하면 시대 흐름에 뒤떨어질 수 있다.
 
조직 간 의견 조율을 중시하는 일본 기업의 의사결정 방식은 의사결정의 신속성도 떨어뜨린다. 의견 조율을 과도하게 중시하다 보면 자칫 조직의 비전이나 목적 달성보다는 각 부서장들의 체면 유지가 궁극적 목적이 되기 쉽다. 정치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특히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유목민적 유전자(nomadic DNA)가 필요한 21세기에서 의견 조율만 강조하는 문화는 기업 성장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외부 환경 변화에 능동적, 효율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모험 정신이 필요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동질성을 강조하고 조화에 집착하면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생산보다 주어진 결정에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조직에 순응하는 태도만 낳게 된다.

외부 환경의 변화
내재적 문제점 외에 외부 환경 변화도 일본식 경영에 변화의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외부 환경 변화 요인으로는 글로벌화가 꼽힌다.
 
글로벌화를 추진한 일본 기업들은 해외 현지에서 비즈니스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인사 제도 등 일본식 관행을 수정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또 글로벌화로 소비 시장이 통합되면서 해외에서 성과를 낸 최고의 기술이나 관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경쟁에서 도태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자본 시장의 글로벌화로 인해 단기 성과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실제 독일 튀빙겐대 마커스 푸델코 교수가 일본 기업 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부분은 지금까지 일본식 관행에 변화를 추구해왔으며 앞으로도 이런 추세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응답했다.2  특히 일본 기업의 본사와 미국 지사뿐만 아니라 독일 지사 관계자들도 독일식보다는 미국식 경영을 도입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일본식 경영에 타격을 준 또 다른 외부 환경으로는 불연속적 변화(dis-continuous change)의 일상화를 들 수 있다. 불연속적 변화는 연속적 변화(con-tinuous chang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과거 방식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필름 카메라의 기술 발전이 연속적 변화를 가져왔다면, 디지털 카메라 기술은 불연속적 변화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불연속적 변화가 나타나면 과거에 축적했던 기술이나 지식 자산 등 경쟁 우위의 원천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실제 불연속적 변화가 일상화된 정보기술(IT) 산업에서 일본 기업은 고전하고 있다. 일본 기업은 특유의 조직 문화를 바탕으로 프로세스 개선과 품질 향상에서 최고의 성과를 내왔다. 하지만 불연속적 환경 변화가 일상화되면 프로세스 개선이나 품질 향상보다는 단기적 경쟁 우위를 재빨리 확보하는 속도와 유연성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일본 최대 통신 사업자인 NTT는 방대한 자원과 막강한 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인터넷 기술 초기에 제대로 이 분야에 투자하지 못했다. 당시 기존 기술을 발전시킨 비동기전송모드(ATM) 기술이 통화 품질 측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 대신 이 분야에 집중 투자했다. 하지만 나중에 인터넷 기술이 불연속적 변화를 불러오자 NTT는 거대한 시장을 선점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일본인 자체의 의식 변화도 일본식 경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 장년층은 조직을 우선시하고 집단 이익을 중시했다. 하지만 청년층은 상대적으로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고 집단 이익보다는 개인 역할을 중시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젊은 인력을 활용해 성과를 극대화하려면 조직의 구조와 문화 전반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일본식 경영의 변화 조짐
전통적인 일본식 경영 스타일에 미국식 경영 스타일을 도입해 성과를 낸 대표적 일본 기업으로 캐논이 꼽힌다. 소위 ‘실력 종신주의’라고도 불리는 캐논의 인사 제도 시스템은 일본식 경영의 특징인 종신 고용을 인정하되 업무 성과에 따라 차등 보상을 하는 미국식 시스템을 도입했다. 60세 정년까지 전 직원에게 종신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연공서열을 없애고 철저히 실력에 따라 보상을 달리했다. 이에 따라 정기 승급이 없어지고 성과 중심 직무급제가 도입됐다. 캐논은 새로운 제도 도입 과정에서 조직원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점진적 변화를 추구했다. 우선 도입 시기 및 대상에 있어서 3, 4년간 유예 기간을 둬 2001년부터 과장급 이상 관리직이 먼저 직무급을 도입했으며, 기본급이 아닌 보너스 부문부터 차등을 두는 완충 장치 또한 마련했다. 전 직원으로 직무급 제도가 확대된 2005년, 캐논은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의 조사에서 ‘존경받는 기업’ 순위 2위에 올랐다.
 
전통적 일본식 경영 모델에 성과주의 시스템을 도입해 성공한 또 다른 사례로는 장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고성장세를 구가했던 일본 교토 소재의 전자 부품 업체들을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교토식 경영 모델’의 대표 주자는 하드디스크구동장치(HDD)용 모터 세계 1위 업체인 일본전산이다. 이 회사는 1973년 창업 당시부터 연공 서열제 대신 성과주의인 직능급 제도를 실시해오고 있다.
 
교토 기업들은 또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문화를 구축해 다양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서구적 기업 풍토를 일찌감치 조성했다. 보통 일본 기업들은 대기업과 하청업체 간 수직적 계열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종속돼 대기업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했다. 따라서 계열 내 기업들끼리는 협력이 잘 이뤄졌지만 계열에 편입되지 않은 기업과는 거래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계열 밖 기업이 보유한 특허나 지식 자산을 활용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교토 기업들은 독자적인 실력을 배양해 독립 기업으로 남으면서 수요 기업과 대등한 입장에서 분업 관계를 형성하는 ‘탈(脫)계열화 노선’을 채택했다. 대신 교토 기업들은 개발비용을 분담하고 재고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수평적 분업 구조를 구축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산-관-학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이를 토대로 교토 기업들은 초기부터 일본 내수 시장만이 아닌 글로벌 시장을 겨냥했다. 즉, 교토 기업들은 동질성을 강요하고 전체주의적 특성을 갖는 전통 일본식 경영 모델과 달리 다양성과 창조성이 중시되는 기업 풍토를 일찌감치 조성했다.
변화 시나리오와 전략과의 적합성
일본식 경영을 채택한 기업이 변화 압력에 대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조건 서구식 경영을 받아들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미국식 경영이 모든 조직에 통용되는 최적의 모델은 아니기 때문이다. 각 기업이 처한 환경과 전략적 선택에 적합한 경영 방식을 찾아서 접목시켜야 한다. 이와 관련, 마커스 푸델코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일본 기업의 변화와 관련한 4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나리오 1전통 모델 유지 혼다 같은 사례로 기존 일본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제한적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델이다.
시나리오 2전통 모델을 기초로 주요한 변화 시도 일본식 경영 틀 안에서 중요한 변화를 모색하는 기업으로 장기 계약을 유지하면서 성과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형태의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 여기에 포함된다. 미쓰비시, 마쯔시타, 도시바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나리오 3일본 스타일로 새로운 제도 수용 주주 가치 중시, 성과주의 도입 등 주요 경영 패러다임에서 미국 방식을 도입하지만 종업원을 중시하는 과거 관행도 유지하는 기업. NEC는 다양한 측면에서 급진적 변화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사례로 꼽힌다.
시나리오 4완전한 서구 모델로 교체 르노닛산처럼 인수합병(M&A)이나 제휴 등을 통해 서구식 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사례다.

이 네 가지 시나리오는 각각 기업 전략과의 적합성(fit)을 고려해야 한다.(그림) 기업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축으로 구분된다. 한 축은 단기적 성장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다른 한 축은 점진적 혁신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과감한 혁신을 추구하는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만약 점진적 변화와 장기적 이익을 추구한다면 일본식 경영이 보다 효율적이다. 점진적 변화와 장기적 이익을 위해서는 프로세스 관리, 운영 효율성 향상, 위험 관리가 매우 중시된다. 이를 위해서는 직원들의 참여와 동기부여를 중시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의 핵심 자원을 유지하는 일본식 경영이 효과적이다. 이런 전략을 추진하는 기업은 일본식 경영의 큰 기조를 유지하면서 대신 제한적으로 일부 문제점을 개선하는 시나리오1을 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반면 극도로 과감한 변화와 단기 성장을 중시하는 기업이라면 서구식 경영 방식을 광범위하게 도입하는 게 효과적이다. 이런 전략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의사결정의 속도를 높여야 하고, 적극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이는 서구식 경영이 강점을 갖는 부분이다. 따라서 시나리오4와 같은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
 
위 두 상황의 중간쯤에 위치한 기업이라면 시나리오2나 시나리오3을 선택하는 게 좋다. 과감한 혁신이 필요한 조직에서는 서구식의 창의성을 중시하는 유연한 구조가 필요하다. 또 단기 성과를 강조하려면 미국식 성과주의가 최적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실제 도요타는 최근 수년간 장기적 수익성을 추구하는 전략에서 단기간 성장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시장점유율 세계 1위 차지를 위한 공격적인 공장 증설과 공급 물량 확대, 마케팅 비용 지출 확대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런 전략 변화를 지원하기 위한 조직 문화나 경영 방식의 변화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즉, 단기 성장을 위해서는 빠른 의사결정과 유연성 제고,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확대 등이 필요했지만 도요타는 이전과 같은 일본식 경영을 고수했다. 최근 도요타 위기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같은 전략과 경영 방식 간 부조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변화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급격한 변화는 조직원들의 정서적 저항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본식 기조를 유지하면서 전략 실행을 위해 필요한 서구식 경영 요소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다. 물론 선택적 도입이 저항을 없애주는 완벽한 수단은 아니다. 건전한 위기의식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경영진의 진정성에 바탕을 둔 적극적인 설득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 기업에 주는 시사점
한국 기업은 서구 기업보다 일본 기업을 닮은 것이 사실이다. 조직에서 어른을 모시는 것도 그렇고, 연공을 중시하는 것도 그렇고, 퇴근 후 회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기업이 ‘일본형’ 경영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종신 고용’과 ‘평생직장’ 개념이 존재했지만, 외환위기라는 파고를 겪으며 서구의 합리주의와 효율 지상주의 물결이 쇄도했다. 그 결과 지금은 한 회사에서 정년을 맞고 퇴임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고, 산업 특성에 따라 편차가 있긴 하겠지만 때론 이직률이 미국보다 높을 때도 많다. 임원이나 간부들의 평균 연령도 일본 기업에 비해 훨씬 젊다. 의사결정 구조와 조직 분위기 역시 일본과는 차이가 있다. 합의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이 보기엔, 한국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는 매우 수직적이다. 조직 분위기도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개인주의적’이라는 평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에 있어서도 정부 정책은 양자의 ‘계열화’였지만, 이는 정착이 되지 않았다. 서강대 박내회 교수는 일본식 경영과 미국식 경영을 비교한 오우치 교수의 명작 <Z이론(THEORY Z)>(1981년)을 번역한 후, 한국 기업을 이 틀에 맞춰 분석한 글에서 “한국식 경영은 일본식과 미국식의 중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견해에 동감하는 다른 학자들도 많다.

한국의 기업 문화는 ‘동적 집합주의(Dynamic collectivism)’라고 할 수 있다. 분명 한국 기업도 동양적 전통하에 일본처럼 조화를 중시하지만, 일본 기업에게는 없는 역동성이 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일본 직장인들이나 일본 기업은 참 착실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동시에 ‘답답’하기도 하다. 도요타 생산 방식(TPS) 연수를 위해 일본을 다녀온 수많은 한국인들의 반응은 ‘대단하다’고 감탄을 하면서도 ‘저래 가지고 답답해서 어떻게 사나’이다. 그래서 도요타 방식은 우리에게 영원한 ‘참고’ 사항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식이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듯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일본을 벤치마킹하러 다니던 한국 기업이 1990년대 이후에는 부쩍 미국을 찾고 있고, 일본 고문을 모시던 한국 기업들이 미국계 다국적 컨설턴트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적 집합주의가 드러난 사례는 우리의 산업 현장에 수도 없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 최근 우리나라 TV 제조업체들이 내놓아 세계 시장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TV의 개발 스토리를 꼽을 수 있다. LED TV를 내놓기 전 벽걸이 TV로 판매하던 기존 LCD TV는 나름대로 얇고 가볍긴 했지만, 소비자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가볍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은 TV를 벽에 걸기 위해 여기저기 못질을 해야 했는데, 자기 집 벽에 여러 개씩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소비자들이 질색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소비자의 불만을 파악한 삼성전자 최고 경영진은 엔지니어들에게 최대한 두께를 줄일 것을 지시했다. 엔지니어들은 40mm가 한계라고 보고했다. 당시 최신 TV 두께가 130mm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경영진들은 “못 하나로도 벽에 걸 수 있도록 ‘무조건’ 30mm 이하로 두께를 줄이라”고 밀어붙였다. 결국 엔지니어들은 사고의 전환을 통해 기존 LCD TV에서 사용하던 냉음극형광램프(CCFL) 대신 LED를 도입했고, 시장이 깜짝 놀랄 만큼 기습적으로 29.9mm TV를 내놓았다. 이런 것이 바로 ‘한국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학주의, 전문가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미국 기업에선 아무리 CEO라 해도 전문가인 엔지니어의 판단에 대해 ‘무조건’을 들먹이며 자기 의지를 강요하기란 쉽지 않다. 일본 기업도 마찬가지다. 중간 관리자들이 합의를 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하고 위에서 밀어붙일 수 있을까. 아마 집단적 충성심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동시에 갖고 있는 한국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동적 집합주의는 이제 한국의 고유한 기업 문화로서 제대로 평가받고, 한발 더 나아가 좀 더 다듬어져 한국형 경영 모델로 확립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동적 집합주의가 예상치 못한 성과를 낼 때마다 우리는 ‘발전도상 국가에 존재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폄하하곤 했다. 그러나 동적 집합주의는 독재 정권하 개발 경제 체제에서 고속 성장을 가능케 했던 토양이었던 동시에, 1990년대 말 외환 위기를 단기에 극복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며,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잘 넘길 수 있게 한 저력이었다. 물론 한국식 경영이 ‘엉터리’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았다. 혹자들은 그럴 때마다 ‘착실한’ 일본식 경영을 배워야 한다고 했지만, 현재 휘청거리고 있는 일본 기업을 볼 때 그것이 해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미국식 경영을 그대로 답습할 수도 없다. 무한 자유를 넘어 방종으로까지 치닫도록 내버려둔 신자유주의 체제하 미국의 경영 방식이 결코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라는 점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일본과 미국식 경영 방식 모두를 결합해 21세기형 ‘섞음의 미학’을 풀어내는 것, 이것이 바로 현재 한국 기업이 해결해야 할 숙제다. 이는 한식의 진수라고 꼽히는 ‘비빔밥’ 문화와도 연결된다. 서로 다른 재료를 혼합시켜 독창적인 맛의 세계를 이끌어내듯이 일본과 미국의 경영 방식을 절묘하게 결합해 우리만의 한국형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고도화된 감각이 필요하다. 비빔밥이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재료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잘 섞어 비비느냐 하는 문제를 빼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 기업에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는 풍토가 싹트고 있다지만, 지금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적극적으로 문호 개방을 확대해야 한다. 성과주의도 좀 더 다듬어야 한다. 철저히 실적에 따라 보상하겠다고 하지만, 제도만 정비돼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차등을 두지 않아 형식적 성과주의에 그치는 사례가 많다. 개방적 혁신 모델을 추구하려면, 사회적 신뢰 수준 역시 지금보다 월등히 높아져야 한다. 공정성과 신뢰는 우리가 선진화되기 위한 필수 덕목이다. 각 기업별로 기업 전략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서구와 일본식 경영 모델 간의 최적 균형점은 달라질 수 있다. 앞서 제시한 네 가지 시나리오에 비춰 기업의 상황에 맞는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게 관건이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자연에서는 ‘순수’보다 잡종이 우세하다”고 가르친다. “섞여야 건강하다. 섞여야 아름답다. 섞여야 순수하다. 왜냐하면 자연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섞여왔기 때문이다.” (최재천, <열대예찬>, 2003)
 
 
 
편집자주 이 코너의 제작에는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박윤영(서울대 경영학과 4학년), 홍세화(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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