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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본 경영

한 명의 탐욕이 조직을 망친다

심영섭 | 22호 (2008년 12월 Issue 1)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고객인 은행이 있었다. 233년의 유서 깊은 전통과 영국 제1의 은행이라는 자부심에 충만하던 영국의 베어링스 은행이다. 그러나 이 은행은 1995년 네덜란드의 금융보험그룹 ING에 단돈 1파운드에 팔리는 수모를 당했다. 위대한 전통의 역사를 치욕의 파산으로 끝내야만 했던 것이다. 대체 왜?
 
베어링스 은행의 파산은 고졸 출신의 20대 은행원 닉 리슨의 불법 선물 거래 때문이다. 리슨은 베어링스 은행에 현재 자산 가치로 2조 원이 넘는 18억 달러의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파산 직전까지도 베어링스 은행은 리슨에게 막대한 보너스를 지급하는 등 특급 대우를 해줬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현실에서 일어난 것일까.
 
주가지수 선물거래 했다 화 입어
리슨은 일본 닛케이 225 주가지수 선물을 집중 거래했다가 큰 화를 입었다. 싱가포르의 전자거래 시장 사이멕스에서 어떤 선물이 1만8580에 ‘매도(offer)’ 주문이 나오고 오사카 시장에서는 1만8590에 ‘매수(bid)’ 주문이 나왔다면 싱가포르 시장에서 사들인 만큼 동시에 오사카 시장에서 매도해 10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보통 계약 단위가 100만 달러이므로 10의 차이가 가져다 주는 이익은 엄청났다.
 
1992년 당시 싱가포르 시장은 오사카보다 훨씬 작은 시장이었다. 사이멕스에서만 거래한 로컬 트레이더 리슨은 베어링스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닛케이 지수를 단 몇 초 동안 느닷없이 올리거나 떨어뜨리기도 했다. 이 몇 초 사이에 오사카와 싱가포르 사이에 선물 가격 차이가 발생했으며, 리슨은 바로 이 시세 차이를 노려 투자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쉬운 이 차익거래를 현실에서 행하기란 쉽지 않다. 리슨이 처음 이런 거래를 시도할 때만 해도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주식시장이 활황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는 눈부신 수익률을 올렸다. 리슨은 인도네시아 시장에서 무려 2000%라는 경이적인 수익률을 달성했다. 겉으로는 베어링스 은행 전체 수익의 5분의 1을 창출하는 일급 트레이더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리슨과 그 부하들이 저지른 실수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엉뚱한 수량을 주문하거나 엉뚱한 가격에 사들이거나, 9월물 선물을 사야 하는데 3월물을 사는 등의 온갖 실수가 발생했다.
 
리슨은 이를 휴면계좌 ‘88888’로 관리했다. 닉이 에러 계좌를 비우기 위해 엄청난 물량을 사들인 사이 1995년 역사적인 고베 대지진 사건이 일어났다. 도쿄 주식시장이 급락하자 닉이 집중 투자한 닛케이 주식 선물은 결국 베어링스 은행을 파산으로 이끌었다.
 
이 희대의 사건은 ‘그 이후’가 더욱 유명하다. 스물 일곱의 나이에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대형 사고를 친 리슨은 감옥에 들어가 자신의 경험담을 자서전으로 펴내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리슨이 자서전 제목으로 선택한 이름은 기묘하게도 ‘악덕 트레이더(rogue trader)’다. 이 이름은 지금까지도 리슨을 지칭하는 별칭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그의 실패 경험을 높이 산 한 다국적 기업은 악마의 손을 가진 이 직원을 거액에 스카우트 하려 들었다.
 
감옥에서 대장암을 얻어 수감 4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난 리슨은 2008년 현재 한 차례 강의료가 1000만 원을 웃도는 고급 강사로 변신했다. 게다가 재혼도 하고 세 아이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심지어 2006년에는 아일랜드 축구클럽 갤웨이 유나이티드 FC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리슨의 홈페이지(www.nickleeson.com)를 방문해보라. 사기도 이 정도로 크게 쳐야 무슨 일을 해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리슨의 사건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바로 1999년 제임스 디어든 감독이 만든 영국 영화 ‘갬블(원제 rogue trader)’이다. 당시 영국의 톱스타인 이완 맥그리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단지 한 은행의 파산을 불러일으킨 사건의 외면만을 주목하고 있지 않다. 영웅 심리에 도취된 한 직원의 심리 상태와 이를 방조한 은행 임원들의 안이한 태도를 모두 비판하고 있다.
 
리슨은 영국의 가난한 하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장공이었고, 그 역시 고졸 중퇴자에 불과했다. 그런 리슨이 단지 모건스탠리의 선물 및 옵션 결제부에 있었던 경력만으로 베어링스에 입사했을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처음 리슨은 충성심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신출내기 직원이었다. 몇 건의 계약 성공으로 그는 상류 계급의 눈부신 금발 미녀를 아내로 맞았고, 언감생심 꿈꿀 수밖에 없었던 모든 것을 자신의 손 안에 넣었다. 이후 그는 완벽한 직원으로 행세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듯하다.
시스템이 못 걸러낸 탐욕
리슨이 88888 계좌를 만든 것도 흔히 생각하는 탐욕과는 다른 이유였다. 88888 계좌는 리슨이 부하 직원의 실수를 덮기 위해 만든 은닉처였다. 그는 자신의 팀원을 해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자신의 팀에서만큼은 스스로 유일무이한 보스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즉 88888 계좌는 리슨의 영웅심리와 이런 이상 심리를 지닌 직원을 시스템으로 걸러내지 못한 조직의 미흡한 위기관리 체계가 낳은 산물이다.

그렇다면 조직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막을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영진이 자신이 관리하는 영업 내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리슨의 사기극은 최고경영진이 회사의 모든 중요 활동에 대해 폭넓게 이해했다면 절대적으로 막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두 번째, 명확한 직무 분리를 시행해야 한다. 사실 리슨은 혼자서 프런트, 미들, 백오피스 역할을 다 했다. 본인이 금융거래를 하고(프런트 오피스), 이에 대한 장부정리(백 오피스)까지 했던 것. 1994년 베어링스 은행이 감사를 실시했을 때 닉의 백 오피스 역할을 해제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 그러나 임원들은 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 번째, 엄격한 내부 감사의 시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업 규모와 위험이 클수록 전문지식과 능력을 지닌 전문가가 내부 감사를 해야 한다. 또 내부 감사와 외부 감사의 소통을 통해 CEO이건 조직 내 스타이건 간에 성역 없는 감사를 실시해야 한다.
 
리슨의 사건은 세계 금융기관에 중대한 교훈을 안겼다. 그러나 제2, 3의 리슨이 나타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번 금융위기로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와 베어스턴스도 결국 기업이 자신의 손실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시 체계와 위기 관리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는 금융기관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아무리 감시 및 통제 시스템의 기술적 보완을 가해도 ‘사람’이라는 문제를 당해낼 수가 없다. 악덕 트레이더의 뒤에는 늘 허술한 위기관리 및 인재관리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편집자주 제품의 기능보다 꿈과 상상력이 중요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입니다. 유명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가 영화를 통해 본 경영 원리와 스토리 경영의 가능성에 대해 연재합니다. 새롭고 신선한 소재를 통해 비즈니스의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필자는 서강대 생명공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심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으면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심리학과 영화를 접목해 새로운 영화평론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현재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이자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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