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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탄금대전투 패배는 ‘불합리한 낙인’

최중경 | 348호 (2022년 07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의 탄금대전투에서의 패배는 전술적인 측면에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신립 장군이 조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 적군의 상태, 아군의 전투력, 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신립이 새재가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결전을 치른 것은 합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전투 당시 날씨가 좋지 않았고, 일본군의 전술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해 신립의 기병 부대가 제힘을 쓰지 못한 것이 주요한 패인이었다. 오늘날 조직에서도 신립처럼 불합리하게 부정적인 낙인이 찍힌 인재가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립 장군(1546∼1592)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이순신, 권율 장군만큼이나 칭송을 받는 뛰어난 무사였다.1 하지만 임진왜란 때 새재에 방어진지를 마련하고 전투를 하자는 부장들의 건의를 무시하고 기병을 활용한 정면 돌파를 주장해 충주 벌판의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가 참패를 당했다. 패배의 치욕을 못 견딘 그는 결국 남한강에 투신해 순절했다. 중요한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특히 그가 새재가 아닌 탄금대를 택한 전술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오늘날에는 이를 둘러싼 민간 설화가 TV 프로그램을 통해 확대 재생산될 정도로 폄하되고 있다. 민간 설화의 줄거리는 여러 가지 세부 버전이 있지만 뼈대는 다음과 같다. 신립 장군이 젊은 시절 어느 여인의 원한을 산 적이 있다. 새재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치르기 직전 그 여인이 꿈에 나타나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로 가면 필히 승리한다”고 해 그대로 따랐다가 크게 졌다. 여인의 원혼이 복수를 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신립 장군은 꿈에 나타난 처녀 귀신의 말을 그대로 믿고 움직인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신립 장군이 비난을 받는 이유가 다양한데 첫 번째 근거는 지형에 관한 결정 때문이다. 높고 험한 곳인 새재를 점령해서 방어하면 유리한데 평야 지대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보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싸우면 유리하다. 화살이나 총탄도 더 멀리 날아가고, 몸끼리 부딪치는 육박전을 할 때도 상대적으로 힘을 쓰기 수월하다. 두 번째 근거는 종사관 김여물 등 부하 장수들이 새재에서 싸울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별다른 설명과 토론이 없이 독단으로 탄금대를 선택했다는 시각이다. 세 번째 근거는 유명한 인물들의 신립에 대한 부정적 견해 표명이다. 다산 정약용이 새재를 넘어가며 신립 장군의 결정을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또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새재에 정찰 부대를 보내 조선군의 배치 상황을 파악하려 했는데 조선군이 없다고 보고하자 믿기지 않는다며 또 다른 정찰 부대를 보내 조선군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병력을 새재로 진출시켰다. 새재를 통과하며 고니시는 “조선에는 병법을 아는 자가 없구나”라며 신립의 결정을 폄하하고 조롱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신립 장군의 선택을 비난하는 근거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논리적인 허점이 있다. 신립의 전술 결정을 현대 군사학의 관점에서 재평가하면서 그 시사점을 분석해보자.

1. METT-TC 관점에서 본 신립의 결정

신립을 비난하는 주된 근거는 높고 험한 곳에 진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높고 험한 곳이 반드시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서기 228년에 촉나라와 위나라 간에 벌어진 가정(街亭)전투에서 높은 곳에 진을 친 촉나라 군대가 크게 패했다. 촉군 사령관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자신의 후계자로 여기며 아끼는 마속(馬謖)을 가정전투의 지휘관으로 파견하며 반드시 낮은 곳에 진을 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마속은 자기 재주를 믿고 병법의 상식대로 높은 곳에 진을 쳤다. 부장으로 같이 간 왕평(王平)이 승상의 지시를 상기시키며 제지하려 했지만 교만한 마속은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위군 사령관 사마의(司馬懿)는 예상과는 달리 촉군이 산 위에 진을 친 것을 보고 공격을 가하지 않고 포위하는 작전을 썼다. 그 결과 이렇다 할 무력 충돌이 없었지만 촉군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촉군이 진을 친 산꼭대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에 탈진한 촉군 병사들이 무더기로 탈영해 위군 진영으로 투항해 왔기 때문이다.2 이처럼 물과 같이 중요한 물자의 보급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유리한 지형이 불리한 지형으로 바뀔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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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도 지형을 6가지로 분류했는데 지형의 물리적 형태만 고려해 분류하지 않았고, 적군의 조치나 반응에 따라 물리적으로 동일한 형태라고 해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손자에 따르면 지형은 길이 사방으로 통하는 통형(通形), 급경사를 이루다가 평탄한 지역이 계속되는 괘형(掛形), 장애물이 널리 산재한 지형(支形), 두 산의 사이에 낀 좁고 험한 애형(隘形), 지세가 험하고 도로가 불비한 험형(險形), 피아가 멀리 떨어지고 그 사이에 광활한 공간이 위치한 원형(遠形)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새재는 험형에 속한다고 봐야겠다. 손자는 험형에서는 아군이 먼저 점령하되 반드시 높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적을 기다려야 하며 만약 적군이 먼저 점령했다면 병력을 이끌고 퇴각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손자는 땅의 형상에 따른 용병법을 제시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적과 나의 상태, 천시(天時)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손자병법』에 의거해 판단한다면 높고 험한 새재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립의 판단이 반드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3

현대 군사학에 따르면 전술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Mission(주어진 임무)’ ‘Enemy(적의 규모, 전투력 등)’ ‘Troop Available(아군의 규모, 전투력 등)’ ‘Terrain(지형과 기후)’ ‘Time Available(주어진 시간)’ ‘Civil Consideration(민간에게 미치는 피해 등)’ 등 일명 ‘METT-TC’를 고려해야 한다. 신립의 전술도 METT-TC의 관점에서 재평가할 수 있다.

먼저 Mission의 경우 신립에게 주어진 임무는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라는 것으로 신립은 왜군과 반드시 격돌해 승부를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도주해 와서 보고한 왜군의 병력 규모와 전투력이 대단함을 감지한 신립은 조정에 후퇴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그러니까 신립은 새재 아니면 근처의 다른 곳에서라도 일본군과 결전을 해야 했다.

‘Enemy’를 보면 일본군의 병력 규모는 모두 5만 명 수준이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새재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죽령으로,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正)의 제3군은 추풍령으로 진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새재에서 고니시의 제1군을 막는다 해도 가토와 구로다가 조선군의 방어선을 신속히 돌파할 경우 퇴로를 차단당한 채 포위돼 협공을 받을 가능성이 존재했다.

‘Troop Available’ 측면에서 조선군의 병력은 1만 명 내외였으며 주력 부대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 부대였다. 따라서 산악 지대보다는 평야 지대에서 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Terrain’의 경우 새재가 험준한 산악이라 방어에 유리한 것은 인정되나 5배가 넘는 일본군에게 포위됐을 경우 적시에 한양이나 지방에서 대규모 지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전멸당할 우려가 있었다. 특히 식량이나 화살을 충분히 보급받지 못한 상황이라면 험준한 산악에 진을 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결정인데 당시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을 감안할 때 신립 부대의 보급 상황이 넉넉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미뤄 짐작할 수 있다.

‘Time Available’을 보면 하루 이틀 내에 일본군과 조우할 것이므로 새재에 진을 치든지 새재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전투를 준비해야 했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이고 물류 거점이었기 때문에 일본군으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어서 조선군이 진을 치고 있을 경우 반드시 격파할 필요가 있었다.

‘Civil Consideration’은 현대전에서 민간인의 안전을 충분히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임진왜란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고려 요소였을 것이다. 물론 당시에도 백성을 안전한 곳으로 소개하는 조치는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당시 곧 출현할 일본군과 결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신립은 사지라고 판단되는 새재에 진을 칠 수 없었고 게다가 주력 부대가 궁기병이기 때문에 평야 지대이면서 일본군이 지나칠 수 없는 요충지인 충주에서 결전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신립 관점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 무기 비교

신립이 믿고 있던 조선군의 주 무기는 궁기병이 말을 타고 돌격하면서 발사하는 ‘편전’이었다. 조선군의 편전은 화살 무기 중에서 세계 최고의 파괴력과 정확성을 지닌 비밀 병기였다. 북방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여진족 기병대의 예봉을 단숨에 꺾어버린 무기이기도 했다. 편전은 애기살이라고 하는 30㎝ 정도의 짧은 화살을 통아(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모양의 통)에 넣고 발사하는 독특한 화살이다. 최대 사거리는 활의 장력, 궁수의 완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최대 사거리가 380m에 달했고 관통력이 우수했으며 철갑 갑옷을 뚫고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유효 사거리는 80m 정도였다. 일본군의 주 무기는 잘 알다시피 화승총인 조총인데 최대 사거리는 500m, 유효 사거리가 100m 정도였다.5

유효 사거리가 비슷하고 모든 일본군이 조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니 편전 발사 속도가 더 빠르다면 8000명의 정예 궁기병 부대를 출전시킨 조선군이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었다. 조총의 1분당 발사 속도가 2∼3발인 점을 감안하고 숙련된 조선군 궁기병의 발사 속도가 훨씬 빨랐다고 본다면 주 무기의 승산은 오히려 조선군에게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신립은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결전에 임해 먼저 공세를 취하는 작전을 구상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에 따르면 신립은 조총의 위력에 대해 주의를 촉구한 유성룡에게 조총이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부정확하기 때문에 기병의 빠른 돌격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만일 유성룡이 조총에 대한 주의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총의 복사 제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역사가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조선 조정이 마음만 굳게 먹었으면 조총의 복사 제작이 그리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다. 1543년 일본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처음 전래된 포르투갈 조총은 1년여 만에 복제돼 일본 전체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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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엇이 전투의 승패를 갈랐을까?

1815년 엘바섬을 탈출해 다시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운명의 일전을 벌인 곳은 벨기에의 워털루(Waterloo)였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몇 가지 우연적 요소(Hinge Factor)가 나폴레옹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패배했다. 가장 중요한 우연적 요소는 기후였다. 결전 전날 비가 내려 길이 질퍽질퍽해지는 바람에 대포 운반에 시간이 걸려서 전투 개시 시간이 늦어졌다. 일찍 시작했더라면 프로이센 군대가 영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영국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영국군이 먼저 격파됐다면 나중에 전장에 도착한 프로이센 군대는 항복하거나 포위당해 전멸됐을 것인데 영국군이 버티는 가운데 프로이센 군대가 도착해 프랑스군의 측면을 강타하며 전세가 급속도로 역전되면서 프랑스 군대의 참패로 마무리됐다. 비가 온 후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대의 발이 둔해져 패배한 또 다른 유명한 전투로 백년전쟁 중 1415년에 있었던 아쟁쿠르(Azincourt)전투가 있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대가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영국 보병부대의 도끼에 찍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탄금대전투 전날에도 비가 와 달천평야가 질척거렸고 신립의 궁기병 부대가 돌격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기병 돌격은 충격력을 통해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므로 속도가 생명이다. 신립은 일본군의 조총이 재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속도감 있는 돌격으로 재장전 이전에 적진을 휩쓸어 버린다는 작전 구상을 했다. 하지만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의 돌격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날씨뿐 아니라 무기도 신립의 편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새로운 사격술을 채택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개발해 1575년에 나가시노전투에서 적용한 연속 사격술이다. 1열이 쏘고, 재장전하는 사이에 2열이 쏘고, 이어서 3열이 쏘고 나면 재장전을 완료한 1열이 다시 쏘는 방식으로 탄환이 중단 없이 날아오기 때문에 기병대의 돌격으로 적진을 돌파하기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나가시노전투6 에서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가 자랑하는 기병 부대도 궤멸했다.

따라서 신립의 궁기병 부대 돌격 작전은 이미 실패할 것이 예정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느린 속도로 돌격해 오는 신립의 궁기병 부대에게 일본군이 쏘는 탄환이 중단 없이 쏟아졌다. 여기에다 가장 중요한 패전 요인은 중과부적(衆寡不敵), 즉 고니시와 가토의 군대를 합하면 일본군의 병력이 신립 궁기병 부대의 3배 수준에 달했다는 사실이다.7

가토의 군대 약 1만 명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고 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엄연한 예비대로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만큼 고니시 부대가 부담 없이 가용 병력을 모두 투입해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신립이 일본군의 연속 사격술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좀 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다가 틈을 봐서 기병 부대를 돌격시키는 작전을 구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술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었던 신립은 궁기병의 편전을 믿고 오히려 선제공격을 가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고니시가 조선군의 시야가 차단된 좌우 측면으로 기습부대를 우회시켜 조선군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는데 신립 쪽에서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승패를 가른 요인으로 볼 수 있다.8

4. 신립에 대한 후대 평가가 박한 이유

신립은 적군의 무기 운용 체제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을 뿐이지 전장을 선택한 것 자체는 METT-TC 관점에서 합리적이었으며, 그는 본인이 택한 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일단 중요한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거의 모두를 수장시키는 참패를 당하고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급에 포함된 것을 보면 이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둘째, 신립의 작전을 평가하는 잣대가 너무 단순하다. 많은 이가 METT-TC와 같은 여러 가지 작전 요소 중에서 지형 하나만 두고 전체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셋째, 생존 장병들의 뒷말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하 장수들이 그에게 새재에서 싸우자고 했을 때 왜 새재가 사지인지, 왜 평야 지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시켰다면 어땠을까? 전투에 임하는 부하 장수들의 태도가 달라졌을 것이고 전투가 더 효율적으로 이뤄졌을지 모른다. 부하들을 설득하지 않고 일방통행식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평소 과격한 면모를 보였던 신립에 관해 생존 장병들의 뒷말이 나오고 아집에 찬 결정을 했다는 선입견이 고착됐다고 볼 수 있다.

넷째, 고니시 유키나가의 작전 평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고니시가 새재를 버린 신립을 비웃으며 조선에는 병법을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언급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직접 상대해서 승리를 거둔 적장의 평가로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니시의 작전 목표는 새재 돌파이고 신립의 작전 목표는 일본군 섬멸이었다. 고니시가 이끄는 부대뿐 아니라 세 갈래로 진격해 오는 일본군 전체를 대상으로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신립의 작전 시야가 고니시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니시의 시각으로만 신립의 작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다섯째, 잘못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의 내용 때문이다. 설화의 내용이 황당해 신빙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민간에 구전돼왔고, 최근에는 방송 매체에서 자주 단막극 형태로 다룸으로써 신립이 ‘꿈속에 나타난 처녀 귀신에게 홀려 일을 그르치는 무능한 졸장’으로 그려지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9

5. 맺음말: 신립은 어느 조직에도 있다

신립의 탄금대전투는 전투 전개 과정과 결과, 참여한 전투 부대의 규모와 성격, 주 무기의 파괴력, 병사 훈련 수준, 지휘관의 작전 개념과 작전 계획, 지형, 기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고작 황당한 내용의 구전설화, 군사 전문가가 아닌 유명 인사의 코멘트, 일본군 지휘관의 견해에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역사 인식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느낀다. 지형 선택에 치우치지 않고 군사 작전 요소를 모두 고려해 내린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하지만 일반 국민에게 널리 전파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10

신립의 탄금대전투는 대대적인 역사 복원 작업과 함께 『손자병법』의 깊이 있는 이해와 현대 전술의 관점에서 면밀한 분석 작업을 통해 진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후대가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바라보고 역사 인식의 수준과 전략적 사고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조직에서도 조직 구성원의 능력, 성향이나 조직 구성원이 담당해 실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다양한 뒷담화가 존재한다. 많은 조직에서 현대판 신립이 양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특히 조직의 수장이나 인사 담당 책임자들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유능하지만 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부족한 구성원이 인사에서 필요 이상의 불이익을 받으면 조직 전체의 역량 저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조직, 특히 큰 조직의 인적 역량을 극대화하려면 단순히 세평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심층 면접과 학위, 자격증 등 객관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각 구성원의 역량과 잠재력,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평가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업무 경험 축적, 자기 계발, 현실 세계의 냉혹함에 적응 등을 통해 조직 구성원의 업무 역량은 지속적으로 변화 발전한다. 10년 전 상급자나 동료의 평가에 묶여 10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 한 차원 업그레이드된 인재를 기용하지 못한다면 그 조직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의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가 있다.
  • 최중경 |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choijk19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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