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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캣 인수 직후 ‘소통 不在’로 주가 폭락-IR 실패한 두산, IR 강자로 대 변신

하정민 | 77호 (2011년 3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미래전략연구소 인턴 연구원 이창하(26·서울대 경영학과 4), 오병섭(25·고려대 경영학과 4) 씨가 참여했습니다.

과거 OB맥주 등 소비재를 주력으로 했던 두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통해 대대적인 주력사업 변경 작업에 나섰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인수하면서 변신을 시작한 두산그룹은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잇따라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중공업 전문 그룹으로 거듭났다. 특히 2007년 두산인프라코어는 총 49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중장비 회사 밥캣을 인수했다.

이는 한국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외 인수합병(M&A)이자 한국 기업이 미국 대기업을 인수한 최초의 사례였다. 밥캣 인수 전까지 한국 기업의 해외 M&A는 대부분 외국의 중소기업을 사들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업계와 금융시장에서도 두산이 중공업 전문 그룹으로의 변신을 마친 증거가 바로 밥캣 인수라는 평가가 많았다. 당시 두산은 이때 모든 자금을 자체 자금으로 조달할 수 없어 약 39억 달러를 미국과 한국에서 차입 조달했다. 흔히 부채 약정(debt covenant) 또는 재무 약정(financial covenant)이라 불리는 이때의 차입 조건은 밥캣의 부채가 EBITDA(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 상각비 차감 전 이익) 7배를 넘어서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밥캣을 인수한 지 불과 1. 서브프라임(subprime) 대출 부실에서 시작된 미국 발 금융위기가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했다. 당연히 미국의 주택건설 경기도 악화됐다. 건설장비를 생산하는 밥캣 역시 후폭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적 악화로 밥캣의 EBITDA가 나빠지면서 밥캣은 부채가 EBITDA 7배가 넘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두산그룹은 증자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일부 부채를 상환하기로 했다.

재무 약정에 근거해 밥캣의 EBITDA 부족분을 보충하려면 1억 달러 미만의 증자만 해도 충분했다. 그러나 두산그룹은 10억 달러의 대규모 증자를 결정했다. 왜 지금 당장 필요한 돈의 10배를 조달하려 했을까. ‘서브프라임 사태가 언제 진정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장 필요한 돈만 마련하면 안 된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회복 속도가 예상보다 늦어지면 추가 증자를 할 수도 있었다. 나중에 또 증자를 한다고 발표하면 금융시장은 더 큰 충격을 받을 게 뻔했다. 당시 두산 경영진은차라리 지금 대규모 증자를 단행해 시장에 한 번의 충격만 주자고 결정했다.

하지만 두산그룹의 계획은 시장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결국 2008 8월 말 10억 달러 증자 계획이 발표되자 두산그룹 주가는 요동쳤다. 증자의 당사자인 두산인프라코어뿐 아니라 두산그룹 계열사 전체 주가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1

당시 두산그룹은 밥캣이 유동성 위기를 겪지 않도록 지원하면 장기적으로는 두산그룹의 성과에 상당한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했던 금융위기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밥캣 인수는 회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으며, 투자자들 역시 이 점을 이해해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장과의 교감 없이 발표된 10억 달러의 증자 계획은 투자자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1년 전 한국 기업 역사의 새로운 장을 썼다는 평가를 받았던 밥캣은 졸지에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의 가치까지 훼손하는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했다.

밥캣 문제로 두산그룹이 겪은 홍역은 대표적인 IR 실패 사례이자, 역설적으로 IR이 기업 활동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주가 급락으로 단순히 주주와 해당 기업만 큰 손해를 입은 게 아니라 그룹 전체의 신뢰도 및 이미지가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한 번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일을 겪은 후 두산그룹은 사태의 해결 방안 및 후속 작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심 끝에 시장 및 투자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업 문화를 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자본시장과의 올바른 소통이 실적 향상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현재 두산중공업의 IR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손종원 상무와의 인터뷰를 통해 두산그룹의 변화 및 IR 업무의 중요성에 관해 알아보자.

두산그룹의 잇따른 애널리스트 영입

2005 9월 굿모닝신한증권에서 자동차 업종 분석을 담당하던 손종원 애널리스트가 두산중공업 IR 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증권계에 18년간이나 몸담은 베테랑 애널리스트가 대기업의 IR 부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최초의 사례였다. 지금은 애널리스트 출신 IR 담당자를 두고 있는 기업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내부 인사가 아닌 외부 인사에게 IR 책임을 맡기는 기업은 많지 않았다.

몇 달 후 미래에셋증권에서 조선업종을 담당했던 남권오 애널리스트도 두산인프라코어 IR 팀장으로 옮겼다. 두 사람 모두 경력이 10년이 넘는 베스트 애널리스트였던데다, 소비재 기업도 아닌 B2B 기업에서 유명 애널리스트를 IR 담당자로 잇따라 뽑았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얼마 후 대우증권의 장충린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 역시 ㈜ 두산의 IR 책임자로 변신했다.

두산그룹의 오세욱 전무는 애널리스트 대거 영입과 관련, “지주회사 전환과 관련해 재무 관련 쟁점이 많은데 내부 인력만으로는 각 계열사의 재무 상태에 관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B2B 기업이라 소비자들과의 접촉도 많지 않은데 투자자들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시장과 투자 심리를 잘 아는 전문가 영입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손 상무는 1987년 이코노미스트로 증권업계에 발을 담근 후, 1991년부터 자동차 업종을 분석해온 1세대 애널리스트다. 그는 “18년간 리서치 업무를 담당했던 터라 스스로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싶었다. 애널리스트 재직 기간 중 많은 기업의 IR 담당자를 만나면서 느꼈던 아쉬움도 해소하고 싶었다. IR의 핵심 업무는 회사와 금융시장의 가교 역할인데, 기존 IR 담당자들이 시장의 언어나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고 이직 이유를 설명했다.

손 상무는지금은 주식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도 대충 뜻을 알지만 당시만 해도 롱(long, 주식 매수), (short, 주식 매도)이라는 간단한 용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톱 라인(Top line, 매출)과 바텀 라인(bottom line, 당기순이익), 오버행(overhang, 물량 부담), 오버웨이트(overweight, 투자 비중 확대)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매출과 순이익을 톱 라인과 바텀 라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매출이 손익계산서의 가장 윗부분, 당기순이익이 가장 아랫부분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 어려운 말도 아니고 왜 그런 용어를 쓰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의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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