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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과 경영

블리자드의 시작과 성공, 그리고 위기

이경혁 | 295호 (2020년 4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블리자드는 2000년대 들어 게임업계 정점에 섰다. 블리자드가 만든 스타크래프트는 국내에서 ‘국민 게임’ 지위에 올랐고 e스포츠라는 새로운 콘텐츠를 창조했다. 이 외에도 워크래프트, 디아블로,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RPG 장르의 흐름을 바꾸었다. 게이머들이 열광하는 게임을 만들 줄 알던 블리자드. 그러나 이 회사는 어느 순간 서서히 힘을 잃는 모습이다. 쇠락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그러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바로 블리자드의 조직문화였던 ‘겜덕 문화’의 실종이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의사결정의 속도가 떨어지고 블리자드만의 강점이 사라졌다.


블리자드(Blizzard). 눈폭풍이란 뜻이지만 한국에서는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이하 ‘블리자드’)라는 초대형 게임사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블리자드사의 오늘을 있게 만든 대히트작 ‘스타크래프트’는 국민 게임 혹은 민속 게임이라는 별칭마저 붙을 정도로 대흥행했다. 스타크래프트 이후에도 블리자드는 지속적으로 대작들을 성공시키며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토록 강대했던 블리자드의 영향력도 최근 들어서는 한풀 꺾인 분위기다. 블리자드에 열광하던 ‘블빠(블리자드 팬)’들의 지지는 냉소와 외면으로 변해가고 있고, 재무 실적도 과거 전성기 수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다.

21세기 디지털 게임 문화를 견인해 왔지만 이제는 그 리더십에 의문부호를 받기 시작한 블리자드 사의 이야기를 되짚어보고 기업 경영에 주는 교훈을 찾아보자.


블리자드 성장의 핵심 ‘겜덕 문화’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에 위치한 세계적 게임회사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의 시작은 1991년 설립한 작은 게임스튜디오였다. 실리콘 앤드 시냅스(Silicon & Synapse)라는 이름의 이 회사는 직접 게임을 개발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게임을 다른 플랫폼으로 이식하는 컨버전 업무를 하청받아 수행하는 일에 주력했다. 앨런 에드햄, 마이크 모하임, 프랭크 피어스 세 사람이 모여 만든 이 회사는 궁극적으로는 자체적인 게임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UCLA 출신 젊은 엔지니어들의 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이들의 주력 사업 플랫폼이었던 아미가(AMIGA) 컴퓨터는 IBM-PC 호환 기종과 애플 매킨토시 계열이 주도하는 PC 시장에서 점차 쇠퇴해 가던 플랫폼이었고, 이렇다 할 든든한 수익원을 찾지 못했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실리콘 앤드 시냅스는 1994년 데이비슨 앤드 어소시에이츠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사에 인수된다. 동시에 사명을 실리콘 앤드 시냅스에서 지금의 블리자드엔터테인먼트로 변경하는데, 기존의 회사명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단순 하청용역으로 운영할 때는 문제가 없을 수 있겠지만 자체 게임 제작을 통해 브랜드를 다잡아 나가기 위해서는 사명 자체가 브랜드가 돼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후 회사의 주인이 몇 차례 바뀌었지만 블리자드라는 이름은 유지하고 있다.

초기의 블리자드가 제작한 게임은 대단한 판매고를 자랑하지는 못했지만 게임 애호가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잃어버린 바이킹’(1992)은 부드러운 그래픽과 적절한 퍼즐로 대체로 ‘상당한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로큰롤 음악과 레이싱이라는 미국 주류 트렌드를 혼합한 ‘로큰롤 레이싱’ 또한 상당한 임팩트를 남겼던 게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오늘날의 블리자드를 있게 한 기념비적인 첫 작품은 기존의 게임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으로부터 나왔다. 바로 PC 기반의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게임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이었다.

‘워크래프트’ 이전의 게임들은 대부분 별도의 퍼블리셔(유통사)를 통해 출시됐다. 그런데 ‘워크래프트 1’은 제작사인 블리자드가 직접 퍼블리싱에 나섰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윤 또한 기존의 게임들과는 사뭇 다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미 포화된 경쟁시장이었던 가정용 콘솔게임기기가 아니라 조금은 색다르고 작은 시장으로 여겨졌던 PC 기반 게임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해 냈다. PC에서 쓰이는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인터페이스를 활용해 넓은 지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다수의 유닛을 선조종한다는 개념은 조이스틱과 조종패드로 소수의 주인공 캐릭터만을 조종하는 콘솔 게임의 조작법과는 완전히 다른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워크래프트 1’의 성공으로 블리자드는 본격적으로 미래가 기대되는 게임개발사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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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블리자드의 사내 문화는 게임 생산자라기보다는 적극적 게임 애호가, 일명 ‘겜덕(게임+덕후의 줄임말)’ 모임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판매 실적과 별개로 블리자드가 만든 게임들은 기본적으로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이 만든 만큼 게이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반영한 결과물에 가까웠고, 블리자드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게이머들의 회사’라는 자기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게임 제작에 매진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서서히 유의미한 성과물로 돌아오게 된다.


장르, 플랫폼, 모든 것을 바꿔내다

1996년 출시한 액션 롤플레잉 게임 ‘디아블로’는 게임사 전반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 작품이었다. 이 게임에는 ‘배틀넷’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플레이가 제공됐다. 기존의 온라인 게임은 주로 모뎀을 이용해 상대방과 직접 연결하거나 혹은 유료로 제공되는 게임 서버에 접속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블리자드의 배틀넷은 게임만 사면 무료로 접속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방식이었다.

배틀넷 개념은 여러모로 오늘날 온라인 게임의 뼈대를 이루는 구조다. 온라인상에서 쉽게 동료를 찾고 서로 아이템을 거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 성공 비결은 후속작 ‘스타크래프트’에도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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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등장한 ‘스타크래프트’는 ‘디아블로’에서 검증된 배틀넷 방식이 본격적으로 확장 적용된 게임이었다. ‘스타크래프트’ 구매자는 누구나 배틀넷을 통해 전 세계 모든 플레이어와 대전을 벌일 수 있었다. 이는 90년대 말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 확장 추세와 함께 시너지를 일으켰다. 특히 한국에서는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PC방 문화와 함께 ‘스타크래프트’ 대열풍이 불었다. 곧 e스포츠라는 새로운 파생 콘텐츠를 낳았고 블리자드는 그 산업의 중심을 차지했다. ‘스타크래프트’의 대성공이 게임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까지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블리자드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바로 뒤를 이은 게임 ‘디아블로 2’ ‘워크래프트 3’ 등 블리자드의 오늘을 있게 한 공전의 히트작들이 이 무렵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디아블로’라는 각각의 프랜차이즈들은 후속작마다 세계적인 게이머들의 지지를 얻으며 블리자드를 세계 최고의 게임사로 등극시켰다. 단순히 판매량에서뿐만 아니라 게이머들로부터 신뢰받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강력하게 대중들에게 어필한 시기였다. 그 절정은 ‘워크래프트’ 프랜차이즈를 활용해 만든 MMORPG1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이하 와우)’의 대성공이었다. 두터운 세계관과 거기 얹은 스토리텔링은 21세기 MMORPG의 정전(canon)이라 불릴 만한 퀄러티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블리자드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게임에 만들어 넣기보다는 여러 게임에서 훌륭하게 만들어진 점들을 끌어와 자신들의 게임에서 훌륭하게 재가공해내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직원들은 게임개발자이기 이전에 게임을 좋아하는 게이머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직원들은 수많은 게임을 직접 열정적으로 플레이하고, 그 안에서 장점과 단점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 각 게임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내고 이를 발전시켜 적용하는 능력에서 블리자드 스튜디오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제품의 퀄러티에 대한 집착도 컸다. 블리자드는 추가 비용이 들어가고 외부의 비난이 늘어나더라도 신작 발매를 연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치 잘못 구워진 도자기를 깨버리는 것과 같은 장인정신을 보였다. 야심 차게 추진하던 신규 개발 프로젝트를 완전히 폐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나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등은 출시 예정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최종적으로 개발 중지된 게임들이었다. 이미 들어간 비용을 완전히 매몰시키기는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이를 통해 결국 블리자드는 게임의 퀄러티를 보장하는 회사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블리자드는 200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모든 게이머가 블리자드 게임은 믿고 구입한다는 경지에 이르며 영원히 왕좌를 차지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블리자드의 전성시대는 뜻밖의 균열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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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균열들이 모이며 서서히 무너져간 제국

먼저 승승장구하던 블리자드에서 나타난 첫 번째 균열은 이 회사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게임‘와우’에서 나타났다. 패키지 구매 방식이었던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와는 달리 와우는 월정액 구독제 게임이었다. 그래서 가입자들이 계속 게임을 구독하게 하기 위해 몇 년마다 한 번씩 확장팩을 발매했는데 2008년 ‘리치왕의 분노’라는 확장팩에서 인기의 정점을 찍은 뒤부터 이후 다음 확장팩부터는 팬들의 반응이 시들해졌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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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자드 인기의 변곡점으로 가장 많이 지목되는 시기는 ‘스타크래프트 2’의 출시 시점인 2010년이다. e스포츠라는 새로운 산업을 개척했던 ‘스타크래프트 1’이 나온 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서 발표된 후속작 출시 소식은 전 세계 게임 팬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막상 출시된 ‘스타크래프트 2’의 성과와 평가는 프랜차이즈의 위명(威名)에 비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수준이었다. 특유의 장인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기존 게임들이 가지고 있던 장점들을 훌륭하게 재해석하던 모습도, 스토리텔링과 두터운 세계관 설정을 바탕으로 제공하던 압도감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배가 불렀다’는 비아냥도 나왔다. ‘스타크래프트 2’는 13년 전 출시된 1편에 비해서도 PC방 이용률에서 밀리는 참담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또 다른 프랜차이즈인 ‘디아블로’의 세 번째 작품도 올드 게이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공전의 히트작 ‘디아블로 2’는 음침하고 어두운 고딕 스타일의 그래픽과 음악, 풍부한 스킬 트리와 강력하고 다채로운 적들로 배치되는 던전 구성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디아블로 3’는 악마와의 사투를 벌인다기보다는 밝고 명랑해진 느낌이었고, 아이템을 주우러 다니는 듯한 게임이었다. 심지어 서버 운영도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아 여러 에러에 대한 패치가 늦어지면서 정상적인 게임이 어려워지는 사태도 속출하기 시작했다. 장인정신의 블리자드라는 말은 여기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블리자드의 철옹성은 2020년 1월 출시된 ‘워크래프트 3: 리포지드’에서 마침내 무너졌다. 블리자드는 ‘워크래프트 3’에 대해 “혁신적인 게임 구성과 탄탄한 스토리, 무엇 하나 빠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던 원작을 4K 화질 시대에 맞춰 새롭게 재구성했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막상 공개된 ‘워크래프트 3: 리포지드’2 는 발전한 PC와 그래픽 기술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연출력 등에서 원작보다 떨어지는 수준에 머무르며 큰 반발에 직면했다.

디테일 면에서도 참담한 비난을 면치 못했다. 블리자드는 전작들을 통해 한국어화와 같은 현지화에 공을 들여온 바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2’를 발매할 때는 게임 캐릭터가 대사를 할 때 입모양까지도 한국어 발음에 맞춰 내놓을 정도였다. 그런 블리자드가 신작에서는 한글 폰트가 깨져 ‘엘프’를 ‘깐프’로, ‘대족장’을 ‘대개장’으로 표기한 채 발매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덕분에 ‘워크래프트 3: 리포지드’는 아예 ‘깐포지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결국 야심 차게 내놓은 신작을 조건 없이 전액 환불해야 했다.

게다가 어느새 게임 산업의 흐름은 블리자드를 외면하고 있었다. 대세는 이미 PC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 넘어가고 있다. 또 블리자드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e스포츠 산업은 신생 개발사인 라이엇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에 왕좌를 내줬다. 게임 덕후들의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으며 게임 제국을 건설했던 블리자드는 이제 그렇고 그런 게임 회사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블리자드 추락의 두 가지 이유

애정이 크면 실망도 큰 법. 블리자드를 향한 덕심은 빠르게 실망으로 바뀌었고 현재 블리자드는 게이머들의 신뢰를 많이 잃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아직 이런 균열이 기업의 재무적 지표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은 조금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2020년 2월에 발표된 액티비전블리자드3 의 실적 발표에 따르면 2019년 매출은 전년 대비 13%, 순이익은 19% 감소했다. 감소세라고는 하지만 액티비전블리자드의 2019년 총 순익은 약 15억 달러(1조8000억 원선)으로, 사업이 위기에 몰리거나 하는 상황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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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적어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블리자드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2018년 블리즈컨(블리자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신작 게임 발표 콘퍼런스)에서 블리자드가 모바일 버전의 ‘디아블로’ 시리즈인 ‘디아블로 이모탈’을 발표하자 청중들의 야유가 쏟아지고 게임 게시판에 비난과 조롱의 글이 엄청나게 올라왔던 사건은 현재 블리자드가 처한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다면 블리자드는 왜 이렇게 빠르게 몰락하고 있을까.

1. 회사의 성장과 함께 잃어버린 ‘겜덕’ 문화

일각에서는 블리자드가 2008년 ‘액티비전(Activision Publishing)’이라는 또 다른 거대 게임 회사와 합병해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된 이후부터 과도하게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으며 게임성보다는 수익 중심으로 게임 개발의 방향성을 바꾼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오히려 액티비전이 개발을 지원한 프롬 소프트웨어의 경우, 2019년 내놓은 액션게임 ‘세키로: 그림자는 두 번 죽는다’가 업계의 찬사를 받으며 2019년 GOTY4 를 상당수 휩쓸었다는 점을 보면 이는 섣부른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뒤로 접어놓더라도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은 그리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규모가 커진 회사가 놓친, 원래 블리자드의 강점이 그것이다.

설립 초기부터 블리자드의 전성기를 이끌어왔던 가치는 ‘이용자 중심의 사내 문화’였다. 개발자들 스스로가 게임을 즐기는 문화였다. 게이머들이 좋아할 만한 게임을 만들자는 이 단순한 가치는 회사의 규모가 커질수록 지키기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저 현업 개발자 몇 명이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소규모 스튜디오 시절과 북미 게임산업의 거두가 된 지금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작은 규모에서 가능했던 빠른 의사결정, 조직의 가치와 비전에 대한 합의, 그리고 그 공유된 가치가 구성원 전체에게 노이즈 없이 전파되며 만들어낼 수 있었던 기업 문화가 사라져버리니 콘텐츠의 퀄러티에도 악영향을 준다. 회사의 규모를 키워갈수록 사내 커뮤니케이션은 어려워지고, 구성원 간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정치적 손익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극심한 성장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비단 블리자드라는 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롤플레잉 게임계 전통의 강자로 군림해 왔던 ‘베데스다 스튜디오’ 또한 ‘폴아웃’ 시리즈의 꾸준한 성공으로 점차 규모 있는 회사로 성장하다 ‘폴아웃 4’부터 조금씩 블리자드와 유사한 문제들을 맞닥뜨리게 됐다. 그 결과로 최신작인 ‘폴아웃 76’는 게이머들과 평단의 혹평을 받으며 대실패한다. 마니아층 수요가 두텁고 팬들의 피드백이 빠르고 강하게 돌아오는 게임시장에서 베데스다의 실패는 블리자드가 지금 마주하는 일과 겹치며 위기감을 자아낸다.

블리자드의 성공에는 이른바 ‘블빠’라고 불리는 강렬한 팬층의 지지가 일정 지분을 차지한다. 오랫동안 만들어낸 결과물로부터 얻어온 신뢰에 기반한 팬층은 한편으로 기업의 든든한 아군이지만 그 기업의 본질이 변했을 때 가장 먼저 이를 알아차리고 반응하는 리트머스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덕업일치’로 일어선 회사가 그 덕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오래된 블리자드 팬들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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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바일 게임 중심의 속도전에서 패하다

오프라인 시절의 게임 사업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팔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온라인 시대에는 많은 게임이 실시간으로 서버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업의 중심 추는 생산보다는 운영 쪽으로 쏠리고 있다. 한번 잘 만들면 끝났던 과거와 달리 온라인 게임의 운영은 끝없는 자원 투여를 요구한다. 서버는 24시간 유지돼야 하며 여기에는 그만큼의 하드웨어와 인력이 들어간다. 또 모바일 플랫폼 중심의 요즘 게임들은 초기 플레이는 무료로 즐기되 추가적인 플레이나 원활한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유지비용은 곧 지속적인 소비자의 결제라는 방식으로 디지털 게임의 소비 양태를 바꿔놓았다. 플레이어들이 질려버려 떠나는 일을 막기 위해 게임 콘텐츠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돼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 PC방 점유율 1위를 십여 년째 장악하고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의 제작사 라이엇게임즈는 게임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매년 5∼6개씩 새로 제작하고, 게임 안의 규칙 또한 끊임없이 수정하며 게임의 밸런스를 조정한다. 식상함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국산 패키지 게임으로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며 흥행한 ‘배틀그라운드’의 크래프톤(전 블루홀스튜디오) 또한 게임 출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신규 맵, 새로운 총기, 기존과 다른 게임 규칙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블리자드의 신화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온라인 서비스의 운영 문제가 불거진 시점과 일치한다. ‘배틀넷’이라는 무료 온라인 대전 시스템을 기반으로 업계의 정점에 오른 블리자드였지만 이제는 콘텐츠 제작 속도가 이용자들이 기대하고 소비하는 콘텐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블리자드 캐릭터를 총집합해 기대를 모았던 신작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도 지속적인 소비자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하지 못하면서 운영 위기를 맞았고, 끝내 관련 e스포츠 정규 리그를 폐지한다는 발표를 하며 오랜 블리자드 팬들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앞서 언급한 ‘디아블로 3’의 서버 운영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했다.

2019년에는 또 다른 게임 ‘하스스톤’의 e스포츠 아시아지역 초청전에서 사건이 터졌다. 대회 중 인터뷰에서 방독면을 쓴 채 홍콩 민주화시위 지지 발언을 한 선수에게 상금 회수와 1년 선수 자격 정지라는 과도한 징계를 내린 것이다. 이를 두고 게이머들은 블리자드가 ‘게임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을 강조하더니 정작 현실에선 강대국인 중국 눈치를 본다’며 비난했다. 이 사건도 결국 라이브 운영에서 있어서 소비자의 눈높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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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봤듯 블리자드는 현재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겪고 있다. 온라인 서비스 운영 능력이 부족하며, 커진 몸집에 반비례해 의사결정 속도는 느려졌다. 그러나 이는 블리자드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다. 대기업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다. 이런 이슈를 현명하게 이겨내며 승승장구하는 경쟁사들도 있다. 한때 최고의 게임회사였던 블리자드가 유독 빠르게 추락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제품의 제작과 서비스 운영에 있어서 소비자의 마인드와 눈높이가 얼마나 높은 우선순위로 반영되고 있느냐, 그것이 블리자드가 가지고 있는 근본 문제다. 이는 게임산업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산업에 적용되는 교훈이다.
  • 이경혁 | 현)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게임문화 연구, 게임연구자
    현)시사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게임 관련 패널
    grolmar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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