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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공급망과 리스크 관리 ①

‘디지털 통한 공급 사슬 관리’로 위기 탈출

장영재 | 280호 (2019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의 시대다. 과거 운영상의 공급 사슬망 리스크 관리 기법만으로는 미·중 무역 분쟁, 한일 무역 마찰 등 탈세계화의 흐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증강/혼합현실 (AR/MR) 같은 디지털 기술이 글로벌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 예로, 반도체 등 장비를 설계, 제조, 서비스하는 신성FA는 국내 벤처인 지노텍과 협업해 AR/MR기술을 활용한 지식 전달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 플랫폼 덕분에 신성FA는 숙련된 엔지니어를 해외 공장에 파견하지 않고도 현지 미숙련 인력에게 작업 노하우를 쉽게 전달할 수 있게 됐고, 지리적 이동에 따른 시간과 비용 투입을 최소화해 리스크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이 글은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디지털 기술과 빅데이터가 어떻게 운영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의사결정을 고도화할 수 있는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소개한다.


각자도생의 새로운 세상

각자도생의 세상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냉전 체제의 종식 이후 이어져 온 세계화 공조가 최근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은 스스로 그 지위를 벗어나려 노력 중이며 세계 경제 공조를 위해 설립된 WTO와 IMF가 스스로 그 결속을 해체하는 데 앞장서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1 이러한 탈세계화의 시그널은 제조 분야 실물 경제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화웨이 논쟁으로 본격화한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과 화이트 리스트로 불거진 일본과 한국의 무역 마찰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겪어보지 못한 불안한 정세 속에서 기업들이 취해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정치·경제적 관계 등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적 방향도 중요하겠지만 이로 인한 혼란의 시대에 대응할 기업의 전략 및 전술 또한 중요하다. 지난 20년간의 세계화로 인해 글로벌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대부분 제품은 ‘제품설계/개발 - 부품개발 - 조립/가공- 영업/서비스’ 과정에서 전 세계 분업으로 이뤄져 왔다. 하지만 세계 공조에 금이 가면서 이들의 연결 고리를 관리하는 공급 사슬망의 리스크 관리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이미 많은 글로벌 기업은 S&OP(Sales and Operations Planning)나 기타 다양한 공급 사슬망 기법을 통해 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한일 무역 마찰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터지는 불확실성의 세상에서는 늘 수행해온 운영상의 리스크 관리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불안한 국제 정세로 인한 공급 사슬망 리스크에 대항할 솔루션이 될 수 있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보여주려 한다.



운영의 공급 사슬망 리스크 관리 vs. 전략적 글로벌 리스크 관리 차이점
일반적으로 운영의 공급 사슬망 리스크 관리(Operational SCM Risk Management)는 예측할 수 있는 시장 분석, 주기적인 S&OP를 통한 부서별 정보 교환, 그리고 리스크를 피할 수 있는 제조 설비 유연화 등을 다룬다. 2 이와 대조적으로 이 글에서 다루는 전략적 글로벌 리스크 관리는 예측이 어려운 세계정세 변화나 대형 재난 상황에서의 전략적인 대응을 뜻한다. 이번 한일 무역 사태와 같은 국제 갈등, 서브프라임 사태와 같은 경제 위기,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같은 대형 재난, 그리고 일본 도요타의 브레이크 결함 사태와 같은 기업의 예기치 못한 악재 등이 글로벌 리스크 관리에 포함된다.

이런 국제 분쟁이 글로벌 공급 사슬망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막대하다. 한일 무역 분쟁으로 국내 반도체 기업이 단기간에 협력 업체 수급처를 찾아야 하는 상황, 미·중 경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중국 기업이 제조 시설을 중국에서 인근의 베트남으로 급히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다.

일반적인 운영의 공급 사슬망 리스크 관리 기술은 크게 1) 상황 예측 2) 상황 대응 두 가지로 요약된다. 3 하지만 글로벌 리스크처럼 상황 예측이 불가능한 경우 기업이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행동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리스크 관리의 성패가 상황 대응으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동안 경영학계에서 발표된 많은 연구는 리스크 상황 관리에 있어 기술보다 기업의 문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4 하지만 최근에는 기술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증강/혼합현실(Augmented/Mixed Reality)과 같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효율적인 전략적 리스크 상황 관리가 가능한 세상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과 공급 사슬망 리스크 관리

디지털 기술을 통한 리스크 관리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드 컴퓨팅의 예를 생각해보자. 요즘 대부분의 대형 제조 시설은 자체적으로 IT 부서를 두고 서버와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센터가 전통적인 방식의 하드웨어 서버로 구축돼 있을 경우 예상치 못한 제조설비의 이동이나 감축, 증축에 신속히 대응하기 어렵다. 그러나 데이터센터가 클라우드로 구축돼 있으면 전통적인 방식과 비교해 훨씬 유연하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센터를 사무실 임대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전자의 경우 기업이 사무실 건물을 매매하고, 건물에 들어가는 모든 사무 가구를 직접 구매해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요즘 각광받고 있는 위워크(WeWork)와 같이 사무 가구와 집기가 갖춰진 업무 공간 대여 솔루션을 활용하는 것과 같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기업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할 때 사무 공간을 매입해 활용하는 기업과 업무 공간을 빌려 사용하는 기업 중 어느 곳이 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지 답은 명확하다.

이처럼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은 기업의 IT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 기반의 유연성을 제공하는 디지털 솔루션이라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과 클라우드 서비스의 핵심 가치는 IT 시스템 확장의 유연성과 관리의 편의성이지만 이와 동시에 글로벌 리스크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제공한다. 해외에 투자한 제조설비의 IT 인프라를 클라우드로 구축하면 지역적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제조설비를 쉽게 이전하거나 증축, 감축할 수 있다. 클라우드 등의 디지털 기술이 기업의 공급 사슬망 리스크 대응 능력을 향상시키는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사례1 신성FA와 지노텍의 지식 서비스 플랫폼 구축

신성FA는 국내 본사를 둔 반도체와 평판 디스플레이 산업에 특화된 자동화 장비를 설계, 제조, 서비스하는 기업이다. 신성FA는 최근 국내 벤처인 지노텍과 협업해 증강/혼합 현실을 활용한 지식전달(Knowledge transfer) 플랫폼을 개발했다.

일반적으로 자동화 장비 개발업체는 장비를 개발 및 제작한 뒤 성능 테스트를 거쳐 고객사의 반도체 공장에 장비를 설치해주는 업무까지 담당한다. 특히 장비를 설치하는 작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장비를 조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비 운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현장에서 테스트하는 업무까지 포함한다.

이런 일련의 업무는 상당한 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만일 고객사의 반도체 공장이 해외에 있는 경우 신성FA의 엔지니어들이 현장에 파견돼 고객사의 공장에 길게는 몇 주 넘게 상주하며 설치 및 세팅 작업을 한다. 이러한 작업에는 상당한 비용이 발생했고, 이는 가격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신성FA는 해외 공장을 설치하는 작업에 현지 인력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대신 [그림 1]과 같은 지노텍의 증강/혼합 현실 플랫폼을 활용했다. 증강/혼합 현실이라는 직관적인 정보전달 기술을 활용해 경험이 없는 미숙련 현지 인력이 신속하게 조립 작업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도록 돕는 플랫폼을 개발한 것이다.



장비 조립 작업에 있어 과거 2차원 도면과 설명서를 일일이 보며 조립하는 방식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명확히 조립 도면을 숙지 못할 경우 잘못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3차원 홀로그래피 이미지로 제공되고, 조립 순서를 실시간으로 하나하나 보여주는 증강/혼합 플랫폼을 활용하면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조립에 필요한 노하우 습득 시간과 조립 오류를 현저히 줄이게 된 것이다. 또 5G와 같은 초고속 통신망을 활용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작업자가 본사 엔지니어와 상호 유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며 조립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제조시설을 옮길 때마다 현지 작업 인력을 고용해 새로운 공장 기본 셋업을 진행해야 했다. 현지 인력을 교육하는 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었고, 이는 결국 높은 비용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현지 인력을 교육하고 본사 엔지니어와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현장의 셋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되면서 지리적 이동으로 인한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증강/혼합 현실 기술은 지식 전달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효과적으로 리스크에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기술이 공급 사슬망 유연성을 높일 혁신적인 미래 기술로 주목받는 이유다. 5


사례2 삼성중공업의 빅데이터 기반 리스크 대응
삼성중공업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카이스트와 협력해 빅데이터를 활용한 스마트 야드(smart yard) 솔루션을 구축했다. 6 이 기간은 국내 조선업계 역사상 최악의 불황으로 기록되는 시기였다. 2000년대 이후 저가 선박 건조에서 탈피해 초대형 해양 시추선 등 고부가 해양 플랫폼 개발에 전략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지만 기술 개발 시행착오와 새로운 시장에 대한 경험 부족 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국의 저가 수주 경쟁과 세계 조선 경기 침체 등의 대외 상황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우외환을 타개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으로 삼성중공업은 연구소 주도로 ‘스마트 야드’란 이름의 조선 기술 고도화 작업을 추진했다.

이 개발이 착수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우선 해양 플랫폼과 같은 초대형 시스템 건조는 계획된 기간 안에 제품을 완성해 고객에게 인도하는 것이 핵심 경쟁력이다. 만일 예상치 못한 제조상의 문제로 납기가 지연되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한다. 더구나 선박, 해양 시스템 건조의 특성상 제조 공간의 제약으로 제품의 제조가 지연되면 다음 건조 계획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획된 기간 내 제작을 완성하는 것이 비용 관리의 핵심인 셈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삼성중공업이 건조해 본 적이 없었던 해양 플랫폼의 경우 ‘설계 - 부품제조 -조립/가공’ 등 모든 프로세스에 불확실성이 존재했다. 삼성중공업은 이에 제품이 제작되는 모든 프로세스 가운데 납기 지연에 영향을 미치는 단계를 분석해 조사했다. 그 결과 부품 제조에서 조립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불확실성과 의사결정 지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해양 플랫폼의 경우 배관재, 파이프, 구조물 등 대부분 부품이 협력업체에서 제작돼 삼성중공업에 입고되고 삼성중공업은 이들 부품을 바탕으로 야드에서 조립 가공 작업을 진행한다. 한 번도 제작해본 적 없는 부품을 제작하는 수백여 개의 협력업체들 입장에서도 불확실성에 따른 리스크를 겪는 게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업체와 삼성중공업의 유기적인 대응은 해양 플랫폼 사업을 성공으로 이끈 요인 중 하나가 됐다.

삼성중공업은 제조상의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한 작업으로 다음 두 가지 프로세스 고도화를 진행했다.


· 첫째, 협력업체 부품 제작 및 납기 일정 관리
· 둘째, 입고된 부품 대상 작업 계획 고도화


첫째, 협력업체 부품 제작 및 납기 일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협력업체가 제작할 수 있는 최대 가용량(capacity)을 분석해 정량화하기 시작한 게 주된 변화였다. 가용 노동력과 제조 장비의 제약으로 협력업체들이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품의 수량에 한계가 있는데 이런 한계를 최대 작업 가용량이라 칭한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협력업체라도 최대 작업 가용량보다 많은 제작량을 삼성중공업으로부터 의뢰받게 되면 납기를 지킬 수 없다. 그런데 과거 삼성중공업은 협력업체의 최대 작업 가용량을 산출하지 않고 각 협력업체를 맡은 담당자의 자체 판단만으로 제품 제작을 발주했다. 물론 예전처럼 일반 선박이나 유조선같이 제작 경험이 많은 제품을 생산할 때는 협력업체 담당자의 개인 판단만으로 물량을 배분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해양 플랫폼에 들어갈 새로운 부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자 과거에 축적된 경험치가 없다는 문제가 생겼다. 그 결과 특정 협력업체에 발주가 몰려 납기가 지연되거나 반대로 다른 업체의 부품은 납기보다 일찍 입고되는 등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삼성중공업은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협력업체들이 제작한 부품과 납기일과 관련해 과거에 정형화되지 않았던 빅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데이터 분석으로 각 협력사의 최대 가용량을 가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먼저, 부품 형태와 조립 프로세스별로 난이도를 나누고 각 협력사가 가진 설비와 장비를 데이터베이스(DB)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카이스트와 함께 최적 물량 배분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 협력업체에 물량을 골고루 나눠 발주하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완성했다. 과거 개별 담당자 경험에만 의존하던 발주 프로세스가 투명한 데이터로 관리되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이 수천 개의 부품과 수백여 개의 협력업체에 대한 판단을 맡게 되면서 고도화된 의사결정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 입고된 부품을 대상으로 작업 계획을 고도화했다. 첫 번째 고도화 작업은 투명한 협력업체 관리를 가능케 하지만 이것만으로 수천여 개 부품이 100% 정확히 입고일에 맞춰 야드에 입고되길 바랄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오늘 야드에서 부품이 제날짜에 입고되지 않았다면 야드 내 조립과 가공 작업 지시를 담당하는 매니저는 지금까지의 입고 상황을 고려해 작업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과거에는 이러한 수정 계획이 오로지 야드 매니저 개인의 판단만으로 이뤄졌다. 야드 매니저는 담당 엔지니어와 통화를 하고 설계 도면을 파악해 자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현장의 야드 매니저와 설계 담당 엔지니어의 정보 교환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지체됐다. 그리고 복잡한 정보 교환의 특성상 정보 전달의 오류도 발생했다.

삼성중공업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각 제품 입고 상황도 DB화했다. 그리고 설계 도면과 같은 정보는 현장에서 원활히 파악할 수 있도록 디지털 전환하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사설 LTE 통신망을 구축하고 태블릿 PC를 활용해 복잡한 설계 도면을 정확하게 야드 매니저에게 전달하는 시스템도 개발했다. 나아가 2차원 도면을 3차원 홀로그래피 이미지로 전송해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증강/혼합 현실 기술도 검토했다. 운영상에 발생할 수 있는 정보 전달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것이다. 이런 기술에 맞춰 운영 프로세스도 혁신했으며 과거 개개인이 담당했던 의사결정을 시스템화했다. 이런 작업은 개개인에 따른 운영 편차를 줄이고 예측 가능한 운영을 가능케 했다. 이 사례는 탈세계화 시대의 제조 및 공급 사슬망 운영과 관련해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의사결정 고도화 전략의 필요성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불거지는 글로벌 정치적 상황처럼 전례도 없고, 전조 징후도 없는 사건은 사전에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가장 현실적인 해답은 신속한 판단과 행동으로 상황에 애자일하게 대처하는 것뿐이다.

예측이 필요한 이유는 의사결정의 시점과 의사결정의 결과가 작용할 시점의 시차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패션업의 경우 ‘제품 기획/개발 - 제조 - 유통 - 판매’에 보통 1년의 시간이 걸린다. 즉, 어떤 옷을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획/개발은 1년 후 어떤 옷이 유행할지를 예측해야만 진행될 수 있다. 만일 극단적으로 이 전 과정에 1년이 아니라 하루가 소요된다면 더 이상의 예측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하루 전 어떤 옷이 유행하는지를 감지해 하루 전에 만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전 예측이 불가능하다면 의사결정의 시점과 의사결정의 결과가 작용할 시점을 최대한 줄이는 전략이 유일한 답이다. 이러한 전략을 취한 것이 바로 10여 년 전 패션 브랜드 자라 (Zara)였다. 자라는 매번 바뀌는 유행을 1년 전에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기획/개발에서 판매까지 기간을 극단적으로 4주까지 줄였다. 이 같은 자라의 전략은 유행을 간파한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탄생시켰다. 기업이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이유도 결국 이처럼 시대의 요구에 맞는 정확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함이다.

그동안 제조업의 ‘설계/개발 - 부품제조 - 조립/가공 - 유통 - 판매’ 과정을 면밀히 분석한 기존 연구들은 작업의 지연이 주로 사람의 의사결정, 특히 매니저들의 의사결정 때문에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설계 부서에서 도안을 만들었는데도 설계 최종 담당자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든지, 마케팅 담당자가 최종 전략 결정에 시간을 끌어 모든 판매 작업이 중단된다든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의사결정의 지연은 특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곧잘 드러난다.

과거 도요타자동차의 브레이크 부품 결함 사태를 떠올려보자. 당시 의사결정 담당 매니저들은 공개 리콜을 할지 말지 신속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또 2011년 세계 하드 드라이브 제조 시설의 80%가 위치한 태국에 큰 홍수가 나 제조 시설이 마비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컴퓨터 업체는 수개월 치의 하드 드라이브 재고가 있었음에도 머뭇대다가 제품을 출하하지 못했다. 7

두 가지 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 전달이 어려워 책임자들이 판단을 망설였기 때문에 불거진 사태였다. 이처럼 사람들은 한 번도 겪지 못한 상황이 닥치면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 정보를 파악하기 전까지 결정을 유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정보 전달 프로세스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제조 시설을 담당하는 공장장이거나 협력업체를 담당하는 책임자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보길 바란다. 현재 담당하고 있는 해외 제조 공장이 정치적인 이슈로 공장을 당장 폐쇄해버린다면? 해외 협력 업체가 내일 당장 원자재 공급을 중지하겠다고 통보한다면? 당신은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어떠한 판단이라도 내리기 위해 당장 필요한 자료를 요청했을 경우 실무진이 얼마나 신속히 적절하고도 정확한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불확실성 시대의 디지털 기술

최선의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다. 정보가 없이는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하다. 과거 도요타의 브레이크 사태 당시 경영진은 브레이크 제품을 재설계할 때 협력업체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알지 못했고, 이런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프로세스도 갖고 있지 않았다. 태국의 하드 드라이브 공급 사태를 겪은 수많은 컴퓨터 제조 업체들도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프로세스 자체가 없어 우왕좌왕했다.

다행히 최근 빠르게 발전하는 데이터 처리와 빅데이터 분석 기술은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정보 수집 절차와 프로세스를 정형화해 의사결정 기간을 단축한 삼성중공업의 사례는 ‘의사결정의 알고리즘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각 협력업체의 생산 가용량을 DB화해 특정 업체가 도산하거나 공급 사슬망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중앙 관제를 통해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태풍이 몰아쳤을 때 천변의 평균 수위와 지역 강우량을 담당자가 개인 역량으로만 관리했기 때문에 마을이 침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전국 단위로 데이터 수집 방식을 표준화하고 이를 데이터로 기록해 분석하는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태풍이 접근해도 신속히 위험지역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다. 침수 지역에서 대피하기 위한 중앙 컨트롤타워 설치도 용이해졌다. 나아가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8 을 활용해 미래 시나리오를 가상환경에서 구현하고, 이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미래에 닥칠 상황에 대한 최적의 대응책을 찾는 연구도 학계에서 활발히 진행 중이다. 9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다양한 재난 상황과 이에 대한 대응 시뮬레이션 및 계획까지 생성하는 디지털 트윈 기술이 연구되고 있다.

세계정세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력만으로도 이에 대비하고 자생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불확실한 상황이 연출되더라도 의사결정자들이 과감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데이터와 프로세스가 정비돼 있는지부터 점검해볼 때다. 클라우드 컴퓨팅과 서비스, 가상/혼합 현실 활용 지식 전달 플랫폼,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 디지털 혁신 기술을 적극 검토해 봐야 한다. 기업들이 정치적 난국을 어떻게 기술로 극복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다.

필자소개 장영재 KAIST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 yjang@kaist.edu
장영재 교수는 미국 보스턴대 우주항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 MIT 경영대학원(슬론스쿨)에서 경영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MIT 기계공학과에서 불확실성을 고려한 생산운영 방식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테크놀로지 본사 기획실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근무하면서 과학적 방식을 적용한 원가 절감 및 전략적 의사결정 업무를 담당했다. 연구 분야는 스마트 팩토리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스마트 SCM이다.
  • 장영재 장영재 | - (현)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 공학과 교수
    -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기획실 프로젝트 매니저
    - 매사추세츠 공대 생산성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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