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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실패를 허용하는 아마존의 벤처 정신

아마존에서 자기 의견 숨기는 건 해악
‘일 저지르기’ 장려해 벤처 정신 북돋워

박정준 | 274호 (2019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필자가 경험한 아마존은 벤처 정신을 직원들에게 주입하거나 코칭한 적이 없다. 다만 조직이 추구해야 할 변하지 않는 가치(‘고객 중심’)를 제시하고 개개인의 타고난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실패를 허용하는 아마존의 노하우는 다음과 같다.

1. 구성원이 자기 의견을 숨기는 것을 해악으로 여긴다. 리더십 원칙 중 하나가 ‘강골기질’이다.
2. 사원은 물론 3개월 근무하는 대학생 인턴들까지 새로운 일 저지르기를 장려한다. ‘저스트 두 잇(Just Do It)’ 상을 줄 정도로 ‘행동주의’를 강조한다.
3. 사내 이직 제도를 운용해 인재들이 회사를 나가지 않고 아마존 내의 다른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제공한다.
4. 개인 평가는 사업의 단기적 성패보다 개인의 능력과 더불어 아마존의 추구 가치와 원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사업의 단기적 실패는 아마존이 보증을 서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벤처 정신을 키울 수 있을까?

직원들의 벤처 정신은 과연 조직이 키울 수 있는 것일까? 설령 묘수를 발휘해 벤처 정신에 투철한 사원을 길러냈다고 해도 그 사원은 그 정신에 따라 결국 조직을 벗어나 자기만의 모험을 떠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조직과 리더가 감당해야 할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도전 정신과 모험심, 의욕과 잠재력으로 설명 가능한 벤처 정신은 누군가 키워야 하는 대상이라기보다 누구나 그 씨앗을 갖고 있으며 애써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자연적으로 피우게 될 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놀이동산의 테마가 언제나 꿈과 모험의 나라이고, 젊은 친구들이 좋아하는 게임의 배경이 항상 목숨을 내건 위험천만한 전장일 리 없다. 세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모험심을 심어줄 수 있는 방안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도 녀석들은 새롭고 불안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필자가 아이들의 타고난 벤처 정신을 잠재우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실패해도 최대한 다치지 않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머지않아 준비가 되면 각자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발치에서 응원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여전히 분명한 것은 어떤 기업은 새로운 혁신의 파도 속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성장하는 반면 다수의 나머지 기업은 퇴보하고 끝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마존에서 12년을 일했지만 아마존이 필자에게 무언가를 직접 심어주거나 코칭해준 경험은 떠올리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아마존은 이 시대 가장 미래지향적인 기업으로 성장했고, 나 또한 아마존에서 독립해 내 나름의 도전과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존의 무엇이 다른 기업과의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아마존의 성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로서 내린 결론은 하나의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벤처 정신의 주입이나 교육이 아니라 조직에 몸담은 대다수가 진심으로 믿고 추구하는 분명한 가치, 개개인의 의욕과 잠재력이 좌절되지 않고 발현될 수 있는 환경, 다시 말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환경의 조성이다. 가치의 공유는 한 기업의 끊임없는 성장의 이정표가 되며 실패가 가능한 환경은 혁신의 필수 조건이다.



변치 않는 가치의 지속적인 추구

아마존이 위치한 시애틀 일대에서 100여 년 전 가장 성행하던 산업은 연어 통조림 산업이었다. 깨지기 쉬운 유리병에 음식을 보관하던 방식에서 내구성은 물론 값도 싸고, 보존 기간이 길며, 깡통 자체를 조리도구로 응용할 수 있는 통조림은 발명 당시 대단한 혁신이었다. 하지만 한 세기를 지나 이제는 박물관으로만 남아 있는 공장의 벽에 걸린 흑백사진들에서 수많은 동양인 노동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막을 살펴보니 처음에는 중국인, 일본인으로부터 시작된 아시아 노동 이민이 1910년 고종 황제 때 이르러서는 한인 4533명이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한인들의 최초 미주 노동 이민 역사가 시작됐다. 이후 이들 중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1000명가량은 샌프란시스코와 시애틀 등 미국 본토의 서부로 이주했고, 상당수가 연어 통조림 공장에서 어부나 생선 손질, 또는 가공사로 일했다.



한때는 수십 개의 공장이 생길 만큼 왕성했던 연어 통조림 공장은 경쟁적이고 무리한 연어잡이로 인해 포획량이 갈수록 줄어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 살아남은 몇몇 회사는 이후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맛은 떨어지지만 영양에는 좋은 청어 통조림을 군수품으로 납품하고, 또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등 생산 효율을 높이면서 다시 한 차례 활기를 찾는다. 그렇지만 이내 새로운 혁신으로 인해 결국 문을 닫고 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냉장고의 발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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