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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5. LG 시그니처 마스터 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루어

“본질에 충실한 미니멀 디자인이
소비자 뇌를 사랑에 빠지게 해”

배미정 | 256호 (2018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브랜드 구축 혹은 제품 개발 단계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기업이 많다. 하지만 소비자의 오감을 거쳐 심장을 뛰게 만드는 디자인은 브랜드나 품질에 대한 소비자 인식 수준 자체를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디자이너, 엔지니어뿐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가 창조적인 열정과 합리적 이해를 공유하면서 최선의 솔루션을 만들어야 한다. LG 시그니처 가전을 디자인한 덴마크 산업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루어는 본질에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의 힘을 강조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소정(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LG전자는 국내 가전업계 최초로 초(超)프리미엄 브랜드 ‘LG 시그니처’를 출시했다. 2016년 3월 국내에 첫 출시한 후 미국과 유럽 선진국 진출에 성공한 데 이어 올 하반기 멕시코, 콜롬비아 등에까지 진출하면서 총 50여 개국에서 글로벌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아무리 공들여 만든 초프리미엄 브랜드라도 고객이 그 가치를 체감하지 못하면 유명무실해질 뿐이다. 하지만 LG 시그니처는 기술 혁신에 기반한 성능뿐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 이전의 가전이 제공하지 않았던 직관적인 사용성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기존 가전과 차별화된 혁신적 디자인은 사내 조직인 ‘디자인위원회’와 더불어 LG 시그니처 가전 디자인을 총괄 자문한 마스터 디자이너 토르스텐 밸루어(Torsten Valeur)의 공이 컸다.

토르스텐 밸루어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디자인 스튜디오 ‘데이비드 루이스 디자이너스(David Lewis Designers)’의 CEO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다. 글로벌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B&O)’ 전담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유명해졌다. 에이수스(Asus), 엘리카(Elica), 숄테스(Scholtes) 같은 글로벌 기업과 작업했다. 차별화된 제품디자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DBR이 e메일 인터뷰를 통해 디자인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었다.

제품 품질이 개선되면서 디자인이 고객 선택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디자인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품의 전반적인 품질이 높아졌지만 가전제품 같은 품목에서는 아직도 품질을 개선해 차별화할 여지가 충분하다. 지금도 가전제품에서 소비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디테일, 예컨대 나사나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제품의 부피가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보다 더 크거나 작기도 하다. 이는 디자이너가 의도한 결과라기보다 소비자가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준다. 소비자는 A 제품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도 다른 제품도 별반 다를 게 없거나 그 부분이 아닌 다른 기준으로 A 제품에 끌렸을 수 있다. 소비자는 품질과 디자인이 최적화된 상품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품질은 여전히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디자인할 때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품질(perceived quality)’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소비자들의 현실적 타협을 최소화하고, 소비자를 방해하는 것들을 오히려 기회로 바꾸기 위해 엔지니어들과 협업한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소비자들을 제품과 감정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비슷한 제품군에서 가장 눈에 띄게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제품은 강력한 캐릭터와 아이콘적 특성을 갖는다. 소비자는 제품을 통해 만든 이의 열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디자인의 핵심은 강력한 아이디어, 오감을 통해 소비자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아이디어다. 이런 아이디어는 당신이 제품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뇌가 인정하도록 만든다. 이런 디자인은 독창적일 뿐 아니라 논리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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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아이디어를 만들려면 오감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겠다.

디자인할 때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이 있는가?
우선 시각이 가장 중요하다. 소비자는 먼 거리에서 디자이너가 제품에 부여한 형태를 시각적으로 처음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각을 만족시키려면 제품 형태가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할 뿐 아니라 제품의 기능이 무엇인지, 소비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를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또 주어진 환경과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뤄야 한다.

청각은 제품의 반복적 사용과 관련된 감각으로 제품 품질을 판단하는 데 쓰이는 감각 중 하나다. 예컨대 제품의 표면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는 단단한지, 속이 비었는지, 조용한지, 혹은 삐걱거리는지를 느끼게 함으로써 품질을 시사한다. 세탁기 문같이 움직이는 부분의 소리는 조용하면서 단단하거나 기름칠하지 않은 경첩처럼 시끄러울 수 있다. 소음 없이 조용하게 작동하는 전자기기나 냉각 팬의 시끄러운 소음의 차이를 생각해보라. 휴대전화의 경고음 혹은 정보 알람같이 활동적인 소리는 사용 경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소리는 원래 목적도 달성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끄럽거나 짜증 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뱅앤올룹슨에서 무선 전화기를 디자인할 때 자연스러운 느낌의 벨소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특히 B&O의 한정판 무선 전화기 Beocom 2 디자인은 재즈 작곡가와 협업해 벨소리에서 전화 자체가 연상되도록 알루미늄 튜브 본체 자체를 매우 시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벨소리를 몇 주간 들어보면서 사용자가 쉽게 질리지 않을지를 계속 시험했다.

최근 촉각이나 후각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촉각도 제품의 반복적 사용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손가락 끝에 매우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어 어렸을 때부터 좋은 느낌과 불쾌한 느낌을 구분하는 법을 배운다. 갓난아기가 엄마를 만지기 위해 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해보라. 가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물건을 만져보는지 떠올려보라. 가게 주인은 “소비자들의 눈이 손끝에 달려 있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나는 디자인하면서 촉각의 중요성을 실감하곤 한다. 소비자가 만지는 모든 부분은 좋은 느낌을 전달해야 하고, 그 느낌은 제품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즐겁도록 손가락에 딱 맞아야 한다. 어떤 부분이 불쾌한 느낌을 전달했다면 그 부분을 만든 사람이 신경을 제대로 쓰지 않았거나 게을렀다는 증거다. 리모컨 Beoremote 1을 디자인하면서 사용자가 이 제품을 손에 쥐었을 때 그 품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만들려고 굉장히 애쓴 기억이 난다. 소비자들이 매일 만지는 리모컨인데 아직도 많은 TV 제조사가 별로 신경을 안 쓴다는 게 안타깝다.

후각과 미각은 제품이 눈에 안 보일 때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감각이다. 뜨겁고 악취가 나는 전자기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제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건 뭔가 잘못됐다는 의미다. 숟가락이나 컵같이 입안에 넣는 제품이 아니면 제품의 맛을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품을 맛봤을 때 자연스럽지 않거나 건강하지 않은 맛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제품에 좋은 맛이나 냄새가 나도록 맛이나 향을 더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런 조치는 대부분 인공적으로 여겨져서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LG 시그니처 가전을 디자인하면서 가장 공들인 부분이 무엇인가?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LG 시그니처 가전 중에서도 특히 세탁기 디자인이 가장 만족스럽다. 이 제품의 디자인 목표는 깨끗하고 순수한 외형을 통해 제품의 진보가 매우 직관적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또 소비자가 즉각적으로 세탁기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했다. 제품을 작동시키기 편하다고 느끼게 만들면서도 성능을 타협해서는 안 됐다.

특히 나는 가전제품의 품질에 대한 소비자 인식 자체를 업그레이드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다른 세탁기와 비교해보면 우리가 목표를 달성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품질이 높으면서도 미니멀하고, 직관적이면서도 유쾌한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유리문을 개선하고, 분할선 없이 완전히 깨끗하고 단단한 몸체 디자인을 통해 고급스러운 ‘가구’라는 점을 어필했다. 품질과 혁신성 모두 우아하게 알리는 디자인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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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점은 없었나?
본질만 남은, 미니멀한 제품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핵심적인 강력한 아이디어가 없이 작업하게 되면 단순하면서 지루하고, 매력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그 자체로 순수하고도 강력한 아이디어를 만들려면 초기에 여러 차례의 디자인 작업이 필요하다. 또 생산 단계로 가기 전에 디자인 발전 단계에서 온갖 현실적 타협을 이겨내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LG 팀은 나와 이런 과정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LG 시그니처 세탁기 같은 제품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LG 시그니처 브랜드의 첫 제품을 디자인할 때만 해도 브랜드 정의가 불분명한 상태였다.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브랜딩 방향을 정해 나갔다. 꿈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에 펼쳐졌다. 최고의 디자인 솔루션을 찾는 과정에서, 혁신과 창조를 바탕으로, 또 논리적으로 브랜드 캐릭터가 만들어졌다. 이는 결코 사전에 계산된 결과가 아니었다. ‘본질에 충실한 세련된 미니멀리즘’이라는 브랜드 캐릭터는 디자이너로서 내가 추구하는 개인적인 신념이기도 했다. LG와 함께 일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LG 시그니처 가전은 프리미엄 브랜드다.
프리미엄과 일반 브랜드의 디자인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디자인이 현실적으로 타협하는 수준이 다르다. 독창성의 수준도 다르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소비자들이 제품에 더 많은 돈을 쓸 의지가 있어서 회사도 제품에 더 큰 비용을 쓰고 현실적인 타협도 덜하게 된다. 일부 기업, 사람들은 프리미엄 브랜드와 일반 브랜드의 차이를 스타일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소비자가 좋은 제품과 나쁜 제품을 구분할 능력이 매우 뛰어난 작금의 환경에 맞지 않는다. 프리미엄 브랜드는 프리미엄 품질을 갖춰야 한다. 북유럽에 이런 말이 있다. “럭셔리 제품은 최고로 품질이 좋은 제품이지 최고로 화려한 제품이 아니다. 우리는 기술적 완벽함, 정직한 재료, 우수한 외형을 갖춘 럭셔리에 흥분한다.”

프리미엄 브랜드 제품은 비슷비슷한 제품들 속에서 특별하게 눈에 띄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프리미엄 제품을 산다면 그 제품이 당신을 위해 특별한 역할을 하길 원할 것이다. 우리는 개성(personality) 있고 독창적인(uniqueness) 제품을 디자인하면서 소비자들을 제품과 감정적으로 연결시키고자 한다. 제품을 만든 사람과 만드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제품에 개성을 부여할 수 있다. 숙련된 수작업으로 디자인하고 생산하는 과정을 소비자에게 보여주라. 만든 이의 독창적인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아이디어와 만든 사람 모두 돋보이게 할 수 있다.

디자인할 때 타깃 고객을 특정하는가?
고객 정보를 어떻게 얻는가?

디자이너가 소비자의 행동과 니즈, 잠재 욕구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다. 최고의 디자인은 마치 나의 바람, 선호, 니즈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주는 선물처럼 느껴져야 한다. 내가 그런 소망이나 선호, 니즈를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는데도 알아주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 소비자층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디자인이 합리적이기보다 사변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다. 나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솔루션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프로세스의 힘을 믿는다.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주시하려고 노력한다. 늘 새로운 분야를 다루게 되고, 내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기에 고객사의 전문 지식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평소 디자인의 영감 혹은 아이디어를 어디서 어떻게 얻는가?
영감이 처음부터 확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는다. 문제의 한복판에서 해결 방법을 찾고 뇌가 답을 찾느라 노력할 때 문득 영감이 떠오른다. 우리 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고,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며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면서 수많은 감각과 인사이트를 축적한다. 영화를 볼 때나 여행할 때, 박물관에서 혹은 인터넷을 할 때도 영감을 받는다. 디자이너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끊임없는 호기심과 살아 있는 감각이다.

일이 너무 바쁘면 합리적인 뇌가 영감을 지배하기 때문에 새로운 영감을 얻기 힘들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휴식을 취할 때, 녹차를 마시며 의자에 편히 앉아 음악을 들을 때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곤 한다. 영감은 ‘하늘에서 잎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것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해결책은 쉽고도 명백하다. 때론 다른 사람이 말한 한 문장이 영감을 촉발하고 문제의 해결책을 떠올리게도 한다.

시장 트렌드가 굉장히 빠르게 바뀌고 있다. 변화하는 트렌드에 영향을 많이 받는가?
나는 내 디자인이 오랫동안 지속하고 사용자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단기간 사랑받고 쉽게 사라지는 트렌드에 의존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이 주도하는 장기적 트렌드에는 주의를 기울인다. 기술은 소비자가 어떤 것을 새롭게 얻고 기대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디자이너는 탁월한 아이디어를 창조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단순히 다수의 의견을 따라서는 안 된다. 본래의 아이디어에 충실하면서 그것이 분명하고도 즉각적으로 소비자에게 인식되게끔 만들어야 한다. 최종 아이디어는 마치 한 사람의 창의적인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실제로는 수백 명의 사람이 참여했어도 말이다.

디자이너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또 크리에이터로서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최고의 솔루션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의무다. 우리 목표는 ‘우리의 미션’을 달성하는 것이지 다른 제품을 베껴서 단순히 돈 몇 푼을 더 버는 게 아니다.

최근 기능에 충실한 심플한 디자인이 인기다.
이런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나는 심플한 것이 곧 예술적이고, 심플함이 예술적 창조의 진정한 기반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심플함은 미니멀리즘 같은 스타일과 다르다. 오히려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심플함(Being Simple)’은 단순한 삶, 온갖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삶과 관련돼 있다. ‘심플함’이 요즘 인기를 끄는 이유다. 디자인 측면에서 심플함은 본질을 드러내고 정직한 제품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제품은 그 제품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다. 본질은 매우 달라질 수 있고 본질에 충실한 독창적인 솔루션도 다양하다. 디자인에 본질만이 남을 때 독창적인 예술적 솔루션은 더 강력하고 분명해질 것이다.

제품디자인 과정에서 생산, 마케팅 등 다른 부서와의 협업이 중요하다.
디자인 철학을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인가?
성공적인 창조는 전체론적(holistic) 작업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전문가들 간 협업이 매우 중요하다.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전문가들과 관계를 맺으며 때로 그들의 중심에 위치하기도 한다. 우리는 각 분야에서 수집한 균형 잡힌 인풋을 토대로 방향을 설정하고 창조한다. 원탁에 둘러앉아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식은 아니다. 각 분야에서 도출해낸 제일 나은 선택이 무엇이며, 이를 현실적 타협 없이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를 의논한다. 때때로 한 분야에서 도출한 최고의 선택지가 다른 분야에서는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다고 각 분야에서 감수해야 하는 희생 때문에 타협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분야가 최선이라고 여기는 솔루션을 만드는 게 목표가 돼야 한다.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능한 일이다. 서로 다른 분야를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며, 솔루션에 관한 대화를 창의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엔지니어들과의 협력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쉽다. 서로 창조적인 열정뿐 아니라 구성 요소와 원리에 관한 합리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회사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들 간 장기적 협업이 갖는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 결과로 원래 컨셉보다 낮은 수준의 제품이 완성되곤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훌륭한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한국 기업과 디자이너에게 조언한다면?
한국 회사들은 디자이너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디자인 수준을 더 높이고 싶다면 디자이너를 완전히 신뢰하는 한편 그들이 창조적이고 혁신적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데 적합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에게도 엔지니어들처럼 회사의 핵심 인사이트에 접근하고 관련 전문가와 교류할 기회와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은 촉진자(facilitator)나 옵션을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지 말고 직접 답을 만든다는 책임감을 갖고 디자인에 임하는 게 중요하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디자인 전문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디자이너들에게 오감을 계속 훈련하고, 특히 감각에 귀 기울이는 능력을 키우라고 조언하고 싶다. 너무 많은 생각은 감각을 지배한다. 생각은 사전에 정해진 대로 타협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감각에 세심하게 귀 기울이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다 정직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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