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기만 한 박, 줄기가 울퉁불퉁한 나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여 버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장자가 일침을 놓는다. 박으로는 커다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고 나무는 너른 들판에 심어 느긋한 쉼터로 삼는다. 색다른 접근, 독창적 산물이다. 틀에 박힌 시선으로 재료를 바라보면 만들 수 있는 제품이 한정적이다. 좀 더 자유롭고 열린 사고방식에서 보다 주도적이고 활용도 높은 물건들이 탄생한다. 오늘날 기업이 염두에 둬야 할 교훈이다.
팹랩(fablab)은 제조를 뜻하는 fabrication과 실험실, 연구실을 뜻하는 laboratory의 합성어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내 설치된 비트-아톰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의 프로젝트 이름에서 유래된 용어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닐 거쉰펠드 교수는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방법’이라는 수업을 진행하면서 개인 컴퓨팅과 개인 제조 사이의 유사성을 깨닫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목표는 수업 내용과 동일한데 기존 소프트웨어에 연결된 모든 장비를 참여자들이 직접 제조하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이다. 팹랩의 앞글자 팹에 ‘제조’라는 뜻 외에 ‘굉장하다(fabulous)’는 뜻도 담겨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팹랩의 원리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물건의 아이디어를 디지털화해서 컴퓨터에 입력한 후 컴퓨터로 제어되는 레이저와 밀링머신, 3D프린터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뽑아내는 것이 기본 원리다. 팹랩에 상주하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최신 장비들에 대한 사용방법만 익히면 누구나 직접 해볼 수 있다.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도 팹랩에 모두 비치돼 있다.
팹랩의 가장 큰 매력은 재료의 쓰임새와 제품의 모양, 용도 등을 참여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만든다는 데 있다. 최첨단 DIY(do-it-yourself) 제품 혹은 디저털화한 이케아가구쯤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실제로 MIT가 보스턴 시내의 사우스엔드기술센터에 처음 문을 연 팹랩에는 인근 지역의 소녀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팹랩에 찾아와 연구실에 비치된 첨단 장비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구상한 공예품을 직접 만들어 길거리에 내다 팔기도 했다. 취향에 맞는 제품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자존감도 높아지고, 최첨단 기술 습득과 함께 경제적인 수익까지 얻게 되자 팹랩은 입소문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확산됐다. 디트로이트를 비롯한 미국 주요 도시에, 아프리카 가나, 노르웨이, 인도 등 다양한 국가들에 수백 개의 팹랩이 개설됐다. 한국에도 서울, 수원, 부산 등 주요 도시에 팹랩이 문을 열었으며 그 수는 계속 확산되고 있다. 청계천 세운상가는 팹랩을 통해 3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려했던 명성을 재현할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으로 거듭나고 있다.
박영규chamnet21@hanmail.net
인문학자
필자는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승강기대 총장과 한서대 대우 교수, 중부대 초빙 교수 등을 지냈다. 동서양의 고전을 현대적 감각과 트렌드에 맞게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에 『다시, 논어』 『욕심이 차오를 때 노자를 만나다』 『존재의 제자리 찾기; 청춘을 위한 현상학 강의』 『그리스, 인문학의 옴파로스』 『주역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읽다』 『실리콘밸리로 간 노자』 등이 있다.